경상북도가 지난 5일 포항 환동해지역본부에서 마련한 독도 교육 개선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독도 지킴이 안용복(安龍福)의 여인
경상북도는 어제 포항 환동해지역본부에서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 독도 교육: 현황과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로 전문가 심포지엄을 열고, 지난달 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까지 개정하며 독도의 일본 영유권 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독도 교육 내용을 체계화·내실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김경원 해양수산국장은 경상북도교육청과 긴밀하게 협조해서 초·중·고교에서의 독도 교육 외에도 대학교 교양과정에 독도강좌를 신설하는 등 대학생과 일반인들의 독도교육 프로그램도 개발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내가 사는 청도군과 독도가 속한 울릉군이 모두 경상북도이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대하는 도민의 입장은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고, 나도 개인적으로 독도를 비롯한 한·일 관계 역사에 대해 전부터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청도로 이사하기 전에 내가 살던 부산의 다대포 또한 일본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있다.
다대포 몰운대 남단 화준구미와 대마도 북서단의 거리는 불과 48㎞밖에 되지 않아 실제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대마도 산봉우리가 훤히 바라다보이기도 하여 1980년에는 故 조오련(趙五連, 1952~2009) 선수가 헤엄쳐 건너가기도 했다.
1970년 청년 시절 내가 부산 수영구 수영동 350번지에 있는 육군 제9 보충대에서 기간 사병으로 복무할 때 부대 외곽 순찰을 하면서 부대 남쪽 담벼락과 인접한 야산에 세워진 ‘안용복 장군 독도수호 기념비’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한 후 여기저기에 있는 안용복(安龍福) 장군의 업적을 살펴보니 그가 비록 당시 수군의 어떤 지위를 인정받지는 않았어도 독도 영유권을 확실하게 지켜낸 업적은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어느 장군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어 을릉도와 부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장군이라 부른다.
나는 독도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영웅 안용복(安龍福) 장군과 다대포 처녀 유유(柳柳)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 조선일보 주필 이규태 님의 칼럼에 보면, 정조 때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왜국이 울릉도 주변의 섬들을 자기네의 땅이라고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의 공이라고 했다. 장보고(張保皐)가 삼국시대 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바다의 영웅으로 적고 있다.
1654년생으로 추정되는 안용복은 동래부 부산면 좌천1리 14경 3호(지금의 부산시 동구 좌천동 성남이로 57번길10) 바닷가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가 해양 진출의 꿈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사춘기 때 이웃에 사는 가난한 처녀 유유를 사랑한 로맨스 때문이다.
가난에 쪼들린 유유의 가정은 춘궁기를 견디지 못해 고향인 다대포로 이사를 하게 된다. 연인과 뜻밖의 이별을 하게 된 안용복은 유유를 그리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나러 온종일 걸어서 다대포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유유가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심청전의 주인공처럼 대마도로 팔려갔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의협심이 대단했던 안용복은 단신 왜지(倭地)에 들어가 유유를 탈환할 셈으로 무술을 익히는 한편 부산의 왜관 인근을 맴돌며 일본말을 익혔다. 그리고 대마도에 건너갈 기회를 잡고자 수영(水營)의 수군 기지에 노 젓는 능노군(能櫓軍) 곧 수병으로 들어간다.
이후 안용복이 유유를 구출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랑을 위한 그의 개인적인 열정이 날로 발전하여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난날 내가 군 시절 근무하며 순찰하던 그 자리에 1900년대 말에 와서 부산시는 2만 7128㎡ 규모의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을 조성하고 2001년에는 안용복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안용복 장군상(安龍福將軍像) 좌대 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돌 판에 새겨져 있다.
“건립문 / 여기 우리는 조선 시대 국토수호에 앞장선 안용복 장군의 동상을 정중히 모신다. / 장군은 조선 숙종 시대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의 수군으로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 부르면서 자주 침범하자 수차례에 걸쳐 그들과 맞서 싸웠으며 동료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 우리의 영토를 수호한 분이다. / 일본이 아직까지 독도가 그들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망언을 늘어놓는 현실에서 우리는 이 동상 앞에서 장군의 정신과 업적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한다. / 서기 2001년 3월 1일 / 발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 주관 안영복장군기념사업회 / 글씨 이태길 조각 곽순곤”
또 2009년 10월경 당시 내가 근무하던 직장 부근에 있는 안용복의 생가터를 답사하고 처음으로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관계기관에 건의한 일이 있었다. 그 후 내가 청도에 와서 투병하는 동안 관계 공무원으로부터 몇 번 문의 전화를 받은 적은 있지만, 영 소식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부산시 동구청은 2014년 안용복의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부산시 동구 좌천동 757번지 부산진교회 뒤편에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 문화관’을 세웠고, 2015년에는 성신여자대학교의 서경덕 교수가 사비를 들여 생가 터에 안내판을 새겨 붙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스토리텔링을 강의하는 내 딸아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지금은 스토리텔링의 시대’라 이야기꺼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이는 역사에도 문화의 옷을 입히는 시대라는 말도 되겠다. 그리고 우리의 독도 교육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옷을 입혀 대중화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끝으로 아무런 전문성도 없는 한 시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킨 부산시 동구청 관계 공무원에게 찬사를 보내며 서경덕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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