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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4일 토요일 대덕산 한계령풀 탐방
고인돌 형님과
산행코스 : 두문동재 – 고목샘 – 두문동재
귀경길에 영월 단종 왕릉 (장릉) 방문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464326
거리 8.6 km
소요 시간 6h 3m 19s
이동 시간 4h 28m 43s
휴식 시간 1h 34m 36s
평균 속도 1.9 km/h
최고점 1,213 m
총 획득고도 472 m
난이도 쉬움
한계령풀
양산박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니다
이른 봄 온갖 꽃 다투어 필적에
뽐내지도 않고 나서지도 않아도
고운 그 자태에 끌려
저절로 너에게로 온 눈이 쏠린다
노란 꽃 송알 송알 구름 뭉친듯
봉오리 하나 하나 벌어질 적에
저 먼 옛이야기 하나씩 피어 오르고
눈망울 총총 주변 꽃들이
저절로 너에게로 온 눈이 쏠린다
한계령풀
꽃 이름 중에 ‘풀’자로 끝나는 것이 제법 많이 있다. 풀이라는 것은 나무에 대비되는 식물 즉 나무가 아닌 식물을 풀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풀이라는 말은 잡초라는 말의 동의어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풀의 어원을 살펴 보면 단단한 땅을 뚫고 힘있게 올라오는 것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니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식물이 풀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 아닐 성싶다.
<한계령풀>은 설악산 한계령 능선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동안 이 꽃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막상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차에 고인돌 형님이 속해 있는 모임 회원 한 분이 이른 봄 함백산(咸白山)에서 눈 속에 묻힌 한계령풀을 보았다며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고인돌 형님이 이 꽃이 자생하는 태백산과 함백산에 갈 계획이 있다기에 미리 약속을 하여 따라 나서게 되었다.
보통 풀이나 초(草)로 끝나는 식물 이름은 보잘 것 없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한계령풀 사진을 보면 결코 보잘 것 없는 그런 풀이 아니다. 뭔가 귀티가 나고 정교한 예술품 같다는 느낌이 드는 ‘풀’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냥 잡초인 꽃마리
애기똥풀
복정역에서 7시에 만나 우선 내비게이션에 함백산 만항재를 찍고 길을 나섰다. 정선 지방의 아름다운 산풍경을 뒤로 하고 지난 겨울 다녀간 함백산이 가까워진다. 정암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라는 내비게이션 안내를 무시하고 직진하다가 마치 산을 가로지르는 길처럼 보이는 산길로 접어 들었다. 굽이 굽이 오르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눈이나 얼음이 얼었다면 승용차로는 오르지 못할 길이다. 맞은편에서 급히 내려오는 차라도 있으면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얼마 후 고갯마루에 도착했는데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고 산 입구에는 작은 안내소가 있다.
두문동재(杜門洞재)는 바로 함백산에서 이어지는 고갯마루 이름이다. 고려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웠을 때 나라는 망해도 충신은 남아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기개있는 충신들 여럿이 조선에서 제안하는 관직을 고사하고 개성을 떠나 경기도 포천군 광덕산 자락에 들어가 살았다. 이들은 그 고을에서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행동을 일컫는 말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관직에 나설 것 을 종용하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몇몇 고려의 충신들은 두문동을 떠나 더 멀리 강원도 고한땅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두문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인지라 그들이 살던 곳을 두문동재라 이름하였고 혹여 고려왕조가 부활하여 자신들을 불러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끔 더 높은 고개에 올라가 개성쪽을 바라보았다 하여 그 고개를 망향재 (望鄕재)라 불렀다 한다. 이 망향재가 지금의 만항재로 바뀌어 불리지만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옛날의 암울했던 상황이 이렇게 지명으로 남아 우리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듯 하다.
두문동재 : 대덕산 야생화 탐방로 입구
두문동재는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을 지나 백두대간 능선길을 따라 가다 보면 만나는 고개이다. 2년 전 야생화 탐방코스로 유명한 대덕산에 열환이와 찾아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는 야생화 천국이라는 말에 찾아와 두문동재에서 대덕산을 거쳐 검룡소까지 이어지는 탐방길을 걸었었다.
우리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안내소에 입장가능여부를 확인했다. 평소 하루에 300명까지 사전등록한 사람에 한해 입장을 허용하는 탐방장소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이렇게 지나가다가 불쑥 찾아온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허락한다. 장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하고 들어가라 한다. 태백시에서는 원래 태백시에서 숙박이나 식사 등 구매한 영수증을 보여주면 입장을 허용한다고 들었는데 최근 고성 산불로 강원도를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정책을 완화한 것인지 우리에겐 참 다행한 일이다.
아직 산불방지기간이라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금대봉에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임도로 이어지는 야생화 탐방로를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입장을 허용한다. 이곳은 곰배령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보안체계를 갖추고 있다. 입장객에게 패찰을 나눠주고 금대봉에서 합류하는 시점에 있는 또 하나의 검문소에서 패찰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검룡소를 나설 때 패찰을 반납받는다. 오늘은 패찰을 관리하는 기계가 고장이라며 패찰 없이 입장하라 한다.
입구에서 중간 검문소까지는 꽤 넓은 길이라서 자동차 통행도 가능할 정도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길가에는 <노랑제비꽃>과 <꿩의바람꽃>이 반긴다. 이 꽃들도 반갑지만 내게는 이들이 눈에 차지 않는다. 나의 목표는 <한계령풀>을 보는 것이다.
꿩의바람꽃
태백제비꽃
노랑제비꽃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니 길 영쪽으로 온통 노랑색이다. 노랑제비꽃이야 익히 알고 있는 꽃이고 양지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니 눈에서 벗어나는데 또 다른 노랑꽃은 아무리 상상력을 도원해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키가 작고 엄지손톱만한 노란 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 꽃잎은 햇빛에 반짝 반짝 빛나는데 제법 단단해 보인다. 이렇게 예쁜 꽃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왜미나리아재비
겹왜미나리아재비
이 꽃의 이름은 <왜미나리아재비>다. 그러고 보니 꽃모양이 <미나리아재비>와 닮았다. 다만 미나리아재비는 키가 큰데 반해 왜미나리아재비는 꽃 이름에 ‘왜’자가 들어가 있듯이 키가 작은 것이 차이다. 풀의 모양이나 꽃모양이 왜미나리아재비와 비슷한데 꽃이 두 겹으로 피어 있는 것은 <겹왜미나리아재비>다. 미나리아재비과 미나리아재비속 여러해살이풀이다. ‘아재비’라는 말은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많이 닮았다는 말이다. 미나리아재비는 그 모습이 미나리와 닮았으나 성질은 다르다는 뜻이다.
고인돌 형님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그 뒤를 따라 나무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나무숲인데다 약간 음지라서 그런지 <현호색>이 즐비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곳에 그 꽃이 있었다.
현호색
계단이 끝난 지점 산길 왼쪽에 긴 꽃대위에 노란 꽃 송이가 달려 있는 모습이 사진에서 보던 꽃 모양과 똑같다. 꽃대가 상당히 굵다. 그 꽃대를 감싸고 마치 가지처럼 잎줄기가 나고 그 잎줄기에는 또 세갈래로 갈라진 잎이 세 장 달려 있다. 내 생애 처음 만나는 <한계령풀>이다.
학명은 Leontice microrhyncha S. MOORE.이다. 북에서는 메감자라고 부른다. 높이 30∼40㎝ 자라는 다년초이며 털이 없고 땅 속에 현호색같은 괴경(塊莖)이 있다. 탁엽(托葉)은 잎 같으며 반원형 또는 원형이고 원줄기를 완전히 감싼다.
잎은 1개이며 2회 3출로 갈라지고 작은 잎자루는 길이 4∼5㎝이다. 소열편은 중앙의 것은 잎자루가 있고 옆의 것은 대가 거의 없다. 중앙열편은 타원형이고 길이 6∼7㎝, 너비 2∼3㎝로서 길이 5∼10㎜의 잎자루가 있고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끝이 둥글다.
처음 만난 한계령풀을 사진에 담고 있자니 한참 앞에 가던 고인돌형님이 다시 되돌아 온다. 앞에 가도 별로 볼 것이 없으니 돌아가자 한다. 태백산에 가면 아주 멋진 한계령풀을 만날 수 있을거라 한다. 이보다 더 예쁜 한계령풀이 있단 말인가 ?
한계령풀
형님이 계단을 밟고 다시 되돌아 올라가는데 알고 보니 그 곳이 ‘고목나무 샘’이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샘이 있고 그 위에는 굵은 나무가 곧게 자라고 있다. 그 주변은 늘 이 샘물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인해 촉촉히 젖어 있어 야생화가 아주 풍성하다. 나무 계단 아래쪽으로는 한계령풀도 많이 있지만 그 외에 <중의무릇> <얼레지> <현호색> 등 다양한 꽃이 자라고 있다. 이 꽃들이 지고 나면 지금 자라고 있는 다른 꽃들이 무대를 차지할 것이다.
고목나무샘
고목나무샘 위에 있는 물푸레나무
중의무릇
목표로 삼았던 한계령풀을 보고 나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다. 다시 임도로 나서 입구쪽으로 되돌아 가는데 꽃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고인돌 형님은 어느 새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헛기침 소리를 쫒아 들어가니 형님 주변은 노란 한계령풀 밭이다. 이제 막 피어나는 것부터 만개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정도면 태백산표 한계령풀 못지 않다 한다.
꽃밭에는 <홀아비바람꽃>과 <꿩의바람꽃>이 덩달아 피어 난다. 나무 그늘이 짙어지기전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 봄 꽃들은 지금 엄청 바쁘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꽃을 그곳에서 만났다. <나도바람꽃>이다. 얼마전에 방태산 계곡에서 다 져가고 있던 나도바람꽃을 만났는데 이 곳 금대봉에는 나도바람꽃이 절정기이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까지 많이 보인다. 뜻하지 않게 바람꽃 삼형제를 한 곳에서 만나니 정말 반갑다.
홀아비바람꽃
나도바람꽃
그 곳에서 한 시간 가까이 있었나보다. 한 시가 넘었다. 다시 햇볕 따가운 임도로 나섰다. <나도양지꽃>, <민눈양지꽃>과 <얼레지>가 자기도 봐달라고 아우성이다. 마치 튤립같이 생긴 얼레지를 얼른 사진에 담고 고인돌 형님을 뒤따라가니 또 숲속으로 사라진다. 그 곳은 얼레지 밭이다. 한 달 전쯤 마음 졸이며 일찍 올라 온 얼레지를 보려고 화야산 계곡을 찾았었는데 이 강원도 산에는 이제서야 얼레지가 무대위에 올라 섰다.
나도양지꽃
얼레지
민눈양지꽃
오후 2시가 넘으니 시장기가 몰려 온다. 탐방안내소를 지나면서 나무 아래 예쁘게 피어 있는 <산괴불주머니>군락과 <족도리풀>을 사진에 담고 있자니 안내소 직원분이 나와서 족도리풀 군락을 가리켜 준다. 무척 친절하신 분이다. 탐방소 밖에 설치된 나무데크 위에서 점심을 먹으려 준비하는 걸 보고는 누가 준 것이라며 주먹밥 두 개를 들고 나온다. 하나는 ‘오주’라 써 있고 다른 하나는 ‘참주’라 써 있다. 수수께끼 같은 그 주먹밥 이름은 다름 아닌 오징어 주먹밥과 참치 주먹밥의 준말이었다. 친절한 안내소 직원분 덕에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할미꽃
회리바람꽃
산괴불주머니
족도리풀
비운의 왕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莊陵)
태백에서 상경하는 길목에 영월(寧越) 단종릉(莊陵)을 들렀다. 나이 10살이던 1452년 문종 원년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2살 때 문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가 3년만에 숙부 세조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단종의 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후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되었다. 안동도호부 순흥현으로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두 번째 복위운동 계획이 노비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금성대군을 비롯한 동조자들이 숙청되고 마침내 단종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데다 자신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에 더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빼앗으려는 숙부의 계획에 17살 청년은 몸서리치도록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 사약(賜藥)을 받지 않고 지체하자 자신을 감시하던 노복이 노끈으로 목을 조여 죽이고 말았다.
장릉 입구
능원내의 산철쭉
옛날 조선시대의 17살 나이는 지금의 17살과 차이가 많이 난다. 당시에는 이미 성인의 나이이며 대부분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나이였다. 더구나 왕세자로서 과거 문헌을 접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웬만큼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 그가 호사롭기만 하던 시절부터 급격하게 추락하여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의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가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가 1457년 10월 24일 죽은 후 200년이 지난 1681년 (숙종 7년)에 노산군으로 복위되고 다시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으로 왕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왕릉이다. 산이 험준하여 무사히 넘어가길 바래야 하는 영월(寧越) 땅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이 묻혀 있는 무덤이다. 단종이 노복에 의해 교살당하고 시신이 서강 천령포에 버려졌을 때 어명에 따라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둘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신이 물에 퉁퉁 불어 강물에 떠 있으나 하류로 내려가지 않고 그 주변을 돌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때 영월군의 호부에서 미관말직으로 근무하던 엄흥길이 자신의 목숨을 감수하더라도 백성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며 단종의 시신을 관짝에 수습하여 자신의 선산에 매장하였다.
등칡으로 만든 줄다리기용 줄
장릉의 유래
장릉의 제실
이후 엄흥길은 혹시나 모를 화를 피해 경상도로 피신하였으며 나중에 단종이 복위된 이후 그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충신으로 인정받아 그의 위패가 단종릉 정각에 모셔져 있다.
장릉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어 입장료 3,000 원을 받는다. 릉 안에는 단종 박물관이 있고 단종에 충성했던 사육신 및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그리고 재실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뜰에는 산철쭉 꽃이 단종을 향한 충신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붉은 색으로 피어 있다.
릉 정원에 눈에 띄는 특이한 물건이 놓여 있다. 마치 민속놀이 중에서 차전놀이를 하는 도구처럼 굉장히 큰 동아줄인데 그 재료가 칡덩굴이다. 그냥 칡이 아니라 등칡이라고 한다. 고인돌 형님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 단종이 유배왔을 때 큰 홍수가 져서 강을 건널 수 없었을 때 사람들이 등칡을 모아 이처럼 큰 동아줄을 매고 강 양쪽에서 잡아 당겨 팽팽해졌을 때 그 위를 밟고 강을 건넜던 것을 기념하여 매년 줄다리기 행사를 연다고 한다.
단종의 무덤은 사당이 위치한 곳에서 올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원래 엄흥길이 암매장했던 그 위치를 능묘로 치장한 것 같다. 꽃쟁이 고인돌 형님은 이곳에서도 귀한 꽃을 찾아 낸다.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분꽃나무>다. 꽃 모양은 화단에 심어진 분꽃처럼 생긴 것이 여러 개 뭉쳐 있는 모습이다. 꽃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인동과 산분꽃나무속 낙엽 활엽관목이다.
솜방망이꽃
분꽃나무꽃
소나무 숲에는 <윤판나물>과 <졸방제비꽃>도 더러 보인다.
윤판나물
졸방제비꽃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꽃이 보이는데 <병아리꽃나무>라고 한다. 역시 처음 보는 꽃이다. 장미과 병아리꽃나무속 낙엽 활엽 관목이다. 하얀 꽃 모양이 갓 부화한 병아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뭇잎은 죽단화 잎과 비슷하다.
병아리꽃나무
병아리꽃나무
계단길을 걸어 릉으로 올라가니 오래된 소나무가 도열해 있고 그 끝에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릉에 비해 좀 작고 주변에 석물(石物)이 많지 않다. 릉 앞에 세워진 석물 중에 다른 릉에서 볼 수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文人石)만 두 개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단종이 무인이었던 세조에 의해 당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감안하여 무인석을 세우지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 그럴싸 하다.
장릉에는 무인석이 없다.
장릉의 능원
봄맞이꽃
은대난초
느릅나무
무덤가에는 아주 작은 <봄맞이꽃>이 피어 있다. 릉에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은대난초>꽃이 피어 있다. 능원 가에 크게 자란 아름드리 <느릅나무>에 꽃이 피어 있다.
오후 5시 임박하여 영월을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