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이나 배식단사가 일반 왕릉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 건축의 모습에 시간의 흐름과 우리가 인식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이 변화시킨 공간의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단종이 숨을 거두고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하는데 아무도 그 후환 때문에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을 때, 평소에 밤을 이용하여 단종이 거처하는 청령포로 남몰래 물길을 건너와 문안을 드렸던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동월지산 기슭에 암매장 하였다 한다. 그가 지게에 시신을 지고 길을 가는데 걸음이 옮겨지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장릉이다.장릉의 장석배치는 곡장 3면,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마 1쌍, 석양 1쌍, 석호 1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 홍살문, 재실등이 있는데 다른 능과 다른 모습을 지닌 배식단이 있다.
다른 왕릉과 다르게 배식단(配食檀)이 설치되어 있음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하였던 신하와 궁녀들
까지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년) 왕명으로 장릉 밑에 배식단을 설치하였다. 장릉의 능역에는 배식단사(配食檀祠)와 영천(靈泉),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 배견정(拜鵑亭)등이 있다.
망루석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택지가 아니어서 홍살문에서 청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ㄱ” 자로 꺽여 있다. 조선 왕조 500년의 왕후와 후궁들 중 한 많은 여인의 한 사람이 된 단종 비 정순왕후는 1440년 (세종 22년) 여산 송씨 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현수(玹壽)의 딸로 1453년(단종 1년) 열다섯 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2년 뒤 1457년 열 여덟 살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될 때 부인으로 강등되고 궁궐에서 추방당하여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던 왕후는 단종의 죽음이후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올라 소복하고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하였다 한다. 이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했다고 하며 동냥으로 끼니를 잇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세조가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거부하며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살았다 하여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 부르고 있다.이러한 기구한 운명이 지닌 단종임금과 정순왕후의 혼령이 무속신앙인들에게 가장 많이 모셔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피로 물든 삶과 죽음의 어느 선상에서 인간의 혼령이 거주하는 곳으로 영혼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의 위로가 되는 곳으로 선택이 되고 있음이다.그 삶의 아픔과 한이 아직도 이승의 어느 곳에 멈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조상들이 지니고 있는 민속신앙의 한 모습이 그 힘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병든 영혼들의 위로가 될 수 있음 역시 혼이 머무는 공간성의 특성이 지니고 있는 신령함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지 않았던 시간을 걸어갔었다. 그곳에는 과거의 우리가 있었고 현재의 우리가 있었고 또 우리가 걸어가는 미래의 우리 모습이 투영이 된다. 아라리촌에서 만나는 양반과 서민들의 삶이 남기고 간 유형의 문화들이 그러하였고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스카이 뷰의 유리전망대가 그러하였다.
능은 임금의 역사이고 임금은 그 시대의 역사라 해설을 하시던 분의 말씀처럼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만들어가는 영혼을 지니신 임금이 존재하였음으로 단종 임금은 장릉의 영혼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었다. 왠지 듣는 것 만으로도 서글퍼지는 정선 아리랑,
가슴시린 삶의 슬픔을 지닌 아우라지의 한을 움켜진 듯한 척박한 땅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모습의 변화를 만나 던 날 동강의 올갱이 국은 새로운 시작의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살아있음의 생생한 확인을 그리워하였을 단종임금의 마음이 아니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은 살아있음의 생생한 확인이 되어준다. <좋은 시간의 여행을 위하여 수고하시고 준비를 하여주신 궁궐클럽의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혼자서는 만날 수 없는 시간의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