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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 글동무
오종락
지난 토요일 아내와 나는 일일 길동무가 되어 모처럼 시내 외출을 했다. 내가 운전기사가 되어 해묵은 승용차에 아내를 태우고 길을 나선 것이다. 나는 지인 결혼식 참석차 N웨딩으로, 아내는 MBC 방송국 사진전 참석차였다. MBC 방송국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면서 아내는 “대구에 오래 살아도 MBC 방송국도 한번 와본 기억이 없네”라고 했다. “그렇지! 여기 올 기회도 별로 없었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하며 대답했다. 헤어지며 생각해 보니 대구 땅에 예순이 넘도록 살아왔지만 꼭 가볼만한 곳도 한번 가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맘이 허했다.
나는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성못 옆에 있는 N웨딩으로 향했다. 수성못 주변은 나들이 차량과 인파로 인해 도로는 몹시 정체를 빚고 있었다. 한가로이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배를 바라보면서 급한 마음을 달래는 순간, 아까 아내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참! “저 오리배도 한번 타보지 못하고 살아왔구나.”“살아오면서 못해 본 게 왜 이렇게 많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35년이란 세월을 동행하면서, “뭘 하면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던가?” “함께 동행한 인생길은 알차게 보냈는지,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며 좋은 시간들을 놓쳐 버리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예식장에 도착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출발점에 선 신랑 신부가 인생길의 좋은 길동무가 되기를 기원하며 축하인사를 전했다.
식장 밖으로 나와 보니 저 멀리 수성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맞이하는 나 홀로만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봄날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호수가 주는 마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상춘객들의 발길을 따라 호수 주변을 한참 동안 거닐면서 사진을 몇 컷 찍다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숫가에는 수초가 바람결에 일렁일렁 춤을 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모두 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운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을 글로 한번 표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글동무(글쓰기)’를 불렀다. 최근에 글동무와 조금 친해지고부터는 예전과는 달리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호주머니에서 볼펜과 축의금 빈봉투를 끄집어내어 느낀 점을 글동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가족과 지인 등 여러 동행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길동무를 만났다. 특히 어릴 적 나에게 영향을 준 암소, 강아지, 은행나무, 감나무, 소꼴 같은 각종 동식물을 비롯하여 독서,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취미활동은 삶에 활력소가 되어준 소중한 길동무였다. 그 많은 길동무 중에서도 내가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동무가 하나 있었다. 옛날에 얼마 동안 친하게 지내다가 헤어진 동무로 작년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동무는 바로 다름 아닌 인생 제2모작을 떠나는 길에서 만난 ‘글동무’이다. 그 글동무는 요즘 공부를 강요하며 힘들게도 하지만,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십여 년 전 겨울철 혹한에 청송 오지 관사에서 홀아비로 거주하면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고달픈 심정을 시로 한번 표현하여 직장 월간지에 투고를 했다. 동료 직원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며 내용이 참 좋은 시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제출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본부에서 채택되지 못했다. 여러 원인을 분석해 보니 아마 글쓰기에 숙맥인 내가 표현이 미숙한 탓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글을 한 소절 소개하면 “반변천도 꽁꽁, 내 마음도 꽁꽁, 위층 홀아비 밥하는 소리는 쿵쿵...” 이하 생략, 그 시가 당시 상황을 아무리 잘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환경을 너무 부각한 점이 직장 월간지의 콘셉트에 맞지 않아 심사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부터는 글동무와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글동무와 다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반에 입문하고부터다. 퇴임 후 처음 도전해 보는 일이라 부담도 되었고 새롭게 많은 공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글동무와 여행을 떠나는 길에는 ‘훈장님과 문우’라는 가이드가 있어서 용기와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일 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수성못 벤치에 앉아서 내 스스로 글동무를 불러내어 함께 하는 용기도 생겼다.
글동무의 마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잠자고 있는 나의 영혼을 깨어 주기도 하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곧잘 시켜 주기도 한다. 나 혼자만이 떠나는 여행은 깊이 있고 폭넓은 여행이 되지 않았다. 글동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평소에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세세히 느끼게 해 주었다. 글동무와의 동행은 궁극적으로 나를 발견하는 여행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타임머신 같은 글동무는 시공을 곧잘 넘나들며 나를 태워 유년시절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젊은 감성을 지닌 오빠로 만들어 주는 등 만능 요술쟁이 재주꾼이다.
나이가 들면 친한 친구뿐만 아니라, 좋은 취미 동무를 한 가지씩 사귀는 게 좋다고들 한다. 가령 악기, 사진, 그림, 글쓰기 등의 동무들 중 자신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을 선택하여 함께 동행하면 자신의 인생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한다. 글동무는 지난날 청송에서의 아쉬움 때문에 새로 선택한 인생길 동무의 하나다. 나는 글동무를 통하여 지나온 나의 인생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며, 보다 참된 삶을 살기 위한 깨달음도 얻게 된다.
글동무는 때론 길동무가 되기도 한다.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은 자신의 종교와 성별을 초월하여 상대방을 존중하며 편지 글로써 서로 교감한 ‘길동무 글동무’의 좋은 표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내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길동무이며 글동무이기도 하다. 늘 함께하는 인생길의 동무이고 내가 쓴 글의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아내의 생일선물로 수성 호수의 오리배를 태워주며 호수가 주는 낭만을 마음껏 한번 누려 보게 할 생각이다. 또 호수 저편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 산따마르게르따 옥상의 호수정원에서 별미 음식도 함께 맛볼 작정이다. 그런 후 글동무를 초청하여 아름다운 여름날의 추억을 노래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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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쌈지 은행
아버지가 돈을 넣어 두시던 쌈지는 내겐 작은 은행이었다. 20대 초반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찌감치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그때 다달이 월급을 타면 몽땅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드린 월급봉투를 받으시며 “한 달간 고생했다.” “니가 번 돈은 한 푼도 안 쓰고 은행에 넣어 키워 주마”하셨다. 월말이면 아들이 벌어 온 돈을 세어보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 돈은 일정기간 아버지의 쌈지 은행에 보관되었다.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 구들목 쪽에는 검은색 자물통이 달린 벽장이 하나 있었다. 그 벽장 속에는 단단한 작은 궤짝 하나가 들어 있었고, 돈과 중요한 문서는 항상 그 궤짝에 넣어 황동색 붕어 자물통을 채워 보관했다. 내가 드린 월급봉투도 쌈지에 넣어 작은 금고였던 그곳에 함께 보관해 두었다. 양곡이나 소를 판돈은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목돈이 필요할 때 사용하셨다. 또 쓰고 남은 돈은 장날이 돌아오면 큰장(대구 서문시장)에 장을 보러 가시면서 은행에 예치하였다. 70년대 초반 서문시장 좌측에는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은행과 한일은행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시골에서 큰장에 들러 장도 보고 은행 볼일 보기도 편리하여 아버지가 단골로 이용하시던 두 은행이었다.
내가 월급을 아버지에게 맡긴 지 일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월급 돈을 잘 키워나가고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며 용기를 심어주려는 듯이’,“다가오는 장날 장도 보고 은행에 같이 한번 다녀오자꾸나.”하셨다.
큰장이 서는 날 이른 아침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큰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단골 은행부터 찾으셨다. 은행 창구 앞에서 한복 조끼 안주머니에서 쌈지를 끄집어내어 월급 돈을 챙긴 다음 통장과 함께 창구로 내밀었다. 매달 큰장 날 시장 오시는 길에 은행에 들러 빠짐없이 꼬박꼬박 저축해 오고 있음을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은행 문을 나설 때 아버지 쌈지 은행은 나에겐 한국은행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은행 볼일을 마치고 시장에 들러 농기구 상회에서 쟁기날, 괭이 등 농기구를 산 후, 포목전에 들러 어머니가 부탁하신 옷감을 몇 마 뜨시고 재봉실과 흰 실타래도 사셨다. 이것저것 필요한 장보기를 마무리하고 나니 점심을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시장에 장 보러 왔다가 맨입으로 안 돌아간단다.”하시며 시장 내 빵집에서 설탕이 듬뿍 뿌려진 도넛을 한 봉지 사 주셨다. 도넛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며 아버지는 “부지런히 해라. 월급은 장가갈 밑천이 되도록 아버지가 목돈으로 키워 주마”하셨다. 그 당시 은행에 저축하는 일은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으므로 나는 은행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오로지 아버지의 쌈지가 바로 나의 은행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왔다.
아버지의 쌈지는 두 종류가 있었다. 돈을 주로 넣어 궤짝에 보관하시던 쌈지와 평소 담배와 용돈을 함께 넣어 사용하시던 쌈지가 있었다. 돈을 넣어 보관하시던 쌈지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가 세 가지 색상의 헝겊을 사용하여 재봉틀로 촘촘히 박아 고급스럽게 만든 쌈지였다. 평소에 사용하시던 쌈지는 회색 헝겊으로 만든 3단 주머니가 달린 쌈지였으며 맨 안쪽 칸에는 지폐와 동전을, 중간 칸은 담배와 곰방대를, 맨 앞쪽 낮은 칸은 작은 성냥갑이나 지프라이터 등을 넣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쌈지는 푼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열리곤 했다. 어머니가 제사장을 보러 가실 때에도, 가까운 친척 아이들이 방문하여 용돈을 줄 때도, 나의 학습 준비물인 도화지나 크레파스 값을 줄 때도 풀었다 말아 넣으셨다. 아버지 쌈지에서 나온 지폐는 손때와 담배 냄새가 버무려져 특유한 향내를 풍겼다. 그 향내는 내 유년시절 아버지의 향수였고, 오늘날 고급 남성 향수보다도 더 그윽한 내음으로 내 뇌리에 깊숙이 배어있다. 아버지의 쌈지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요술주머니라고 여겼다. 쌈지 끈이 술술 풀리면 지폐와 동전이 곧잘 나오는 것을 보면서 든든한 은행 마냥 여기며 살아왔다.
70년대 후반, 내가 공직에 입문하기 전 대기업에 다닐 때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쌈지를 통하여 모은 돈이 일천만 원을 넘었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일찍이 한 채 마련하는 것을 유독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너 장가가면 곧바로 집 장만하는데 써야 하니 좀 더 모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하루는 큰형 댁에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잘 아는 이쁜 처녀가 한 사람 있다며 중매를 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차곡차곡 저축을 하여 돈을 제법 모아 놓은 사실을 형수님을 통하여 들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가 규수 댁 부모님에게 착실한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여 맞선까지 보게 되었다. 중매쟁이가 나를 그럴듯하게 소개한 영향인지, 규수 댁 부모님은 알뜰히 저축을 하고 있는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맞선을 보고 난 후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성사된 근원은 아버지의 쌈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쌈지를 통하여 마련된 자금은 결혼 후 첫 주택 구입 자금으로 쓰였다. 월급에서 한 푼 두 푼 모은 것이 종잣돈이 되어 대구에 작은 주택을 마련하게 되었다. 집을 구입할 때 모자라는 비용은 큰방과 문간방을 별도로 전세를 놓아 충당하였다. 지방에서 근무를 하다가 집을 장만한 후 두 해가 지난 뒤 대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방에서 근무할 때는 관사에서 거주하다가 대구로 막상 이사를 하려고 보니 큰방 세입자의 전세금 내줄 돈이 부족하여 한동안 고민을 했었다. 아버지는 쌈지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어 보태 주시면서 대안을 가르쳐 주셨다. 세입자에게 내줄 돈이 적은 문간방으로 일단 이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문간방에서 한두 해 살면서 큰방 전세금 내줄 돈을 마련한 후 큰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쌈지 은행은 결혼의 끈을 이어주었고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할 때까지 늘 함께한 든든한 나의 은행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쌈지는 가장의 권위와 경제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월급봉투에서 계좌이체 시대로 변하여 그 시절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옛 추억 속에 남아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쌈지는 아직도 작은 은행의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아버지가 이용하시던 두 은행도 합병으로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서 내 기억 속의 흔적으로 더듬어 보게 된다.
무심한 세상은 아버지의 시대와는 달리 쌈지의 역할도 부모의 처지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쌈지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풀었다가 말아 넣기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이 되었다. 노년의 삶에 있어서 쌈지의 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세태인 것 같다. 바야흐로 ‘셀프 부양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한다. 쌈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잘 관리해야 함은 더 이상 강조해서 무엇하겠는가. 아버지는 당신의 쌈지를 통하여 내가 어릴 적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주신 것 같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경제관념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준 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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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구(生口)
옛날부터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가축은 암소였다. 그 암소는 온순하고 쟁기도 잘 끌며 농사일도 잘 도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거친 황소보다는 농사일에 부리기 쉬운 암소를 줄곧 키우는 편이었다. 또 암소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송아지를 낳아 우리 가족들을 모두 기쁘게 해주었다. 그 송아지를 잘 키우면 우리 집 살림 밑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암소가 송아지를 낳고 나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 송아지는 잘 키워 둘째 살림 내줄 때 사용할란다.” 하셨고, 어떤 해는 “이번 송아지는 너희들 공납금에 보탤 생각이다.” 하시며 송아지가 태어난 데 대하여 몹시 기뻐하시면서 앞으로의 청사진도 말씀하셨다. 집에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송아지를 길러서 팔아 그 돈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내가 결혼 후 살림을 날 때도 아버지는 송아지 판 돈으로 전세방을 구해 주셨다. 그러고 보면 나도 암소가 낳은 송아지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내게 암소의 음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암소는 아버지께 칭찬을 자주 듣게 해주며 의리 있는 나의 친구 역할도 했다. 아버지는 논밭에 써레질이나 도구를 칠 때 암소가 말을 잘 들어 수월하게 일을 끝마치실 때나, 내가 끓여준 쇠죽을 다 먹고 소죽통을 말끔히 비운 것을 보실 때마다 소를 잘 돌봤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칭찬을 들을 경우 나는 더욱더 신이 났다. 하교 후 집에 도착하면 식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 한 그릇을 후다닥 먹고 꼴망태를 메고 쇠꼴을 베러 가곤 했다. 들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암소가 가장 좋아하는 쇠꼴을 골라 베어서 꼴망태에 한가득 담아오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몇 해 전 상영한 독립영화 ‘워낭 소리’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옛날 농촌에서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고된 농사일을 같이한 큰 일꾼이며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삶의 동반자였다. 신분은 동물이지만 한집 식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가축 중에서도 소를 생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소를 생구라고 한 것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우리 집 생구였던 암소는 다른 동물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든든하고 충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외양간이라는 별채에 기거하는 식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런 느낌은 암소가 팔려서 떠나고 외양간이 빌 때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암소가 늙어서 농사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팔 수밖에 없었다. 새로 다른 암소를 살 때 까지는 외양간이 비워져 있었다. 암소가 떠나간 빈 외양간을 들어다볼 때면 가족들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돼지, 강아지 등 다른 가축을 팔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모님은 암소를 살펴보실 때마다 “천석꾼의 살림살이도 소가 절반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가족들은 아침, 저녁으로 암소의 건강상태를 일일이 확인했다. 암소의 표정을 살피고 쇠죽은 남기지 않았는지, 쇠똥의 상태는 정상인지를 살폈다. 쇠죽을 남길 경우 부드러운 쌀겨를 쇠죽바가지에 가득 퍼가서 남긴 쇠죽에 골고루 섞어서 남긴 쇠죽을 모두 먹도록 했다. 또 물똥을 살 경우는 쇠꼴을 적게 넣고 볏짚과 쌀겨를 더 많이 넣어 쇠죽을 끓여 주었다. 농사일이 고되어 털이 까칠할 때는 보리쌀이나 콩을 듬뿍 넣어 쇠죽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춥지 않도록 외양간 바닥에 볏짚을 두툼하게 깔아주고 등에 덕석을 입혀 주며 암소의 보온에도 무척 신경을 쓰기도 했다.
암소는 요즘 가정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암소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우리 집 애완동물의 왕이며 원조이다. 요즘 가정에서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는데 비용이 만만찮게 든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좀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주사도 맞히고, 미용에도 엄청 신경을 쓰며 제법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어르신들은 그런 행동에 대해 못마땅해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요즘 젊은것들(며느리)은 시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노환이라며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강아지가 아프면 즉각 병원으로 달려간다.”라고 푸념이시다. 가족보다 애완동물에게 너무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는 세태라는 것을 느낀다. 애완동물에 들이는 정성을 부모형제나 가족들에게 좀 돌렸으면 하는 바람은 나만의 생각일까?
암소 못지않게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햇볕 좋은 날은 암소를 외양간 밖 두엄더미 옆 말뚝에 고삐를 친친 묶어놓고 일광욕을 시켰다. 어미를 따라 외양간 밖으로 나온 장난꾸러기 송아지는 온 집을 헤집고 다니며 저지레를 했다. 안마당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을 마구 밟고 흐트러뜨려 놓고 가기 일쑤였다. 그런 송아지도 태어 난지 일 년쯤 지나면 코뚜레를 끼웠다. 노간주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둥근 코뚜레 서너 개는 항상 외양간 벽에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작고 가느다란 것을 골라 송아지 코에다 코뚜레를 끼었다. 코뚜레를 끼운 송아지는 어미소와 분리하여 다른 외양간으로 옮겨 키웠다. 머지않은 장래에 다른 집으로 팔려 간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미소와 떨어진 송아지는 ‘음메, 음메’ 하고 울면서 어미소를 불렀다. 어미소도 새끼가 보고 싶어 외양간 문틈 사이로 큰 눈을 휘둥거리며 ‘으음, 으음’ 하며 새끼를 찾았다. 그 소리와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미소를 부르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는, ‘엄~마, 엄~마’ 하는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린다. 그런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생구인 암소와 송아지가 예부터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오면서 발성도 인간을 닮아 그런 것은 아닐까 한다. 세상에는 많은 동물들이 존재하지만 우리 집 생구 만큼 주인과 끈끈히 교감하면서 함께 살아온 충직한 동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사랑채 모퉁이에 있는 외양간에는 쇠죽을 넣어 주는 작은 문이 안채 쪽으로 나 있었다. 암소는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며 새끼를 보내 달라고 ‘으음, 으음’ 하며 울었다. 지금도 그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우리 집 생구였던 암소와 함께 한 옛 시절이 몹시 그립다.
- 상록수필 3호집 발간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첫댓글 좋은 글 두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