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서산에 걸린 해가 마지막으로 위용(威容)을 과시하며 온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夕陽)무렵.
곡식바리를 운송하는 두 사내 앞에 야트막한 동산 아래로 그림처럼 펼쳐진 마
을이 나타났다.
표행의 목적지인 숭덕촌(崇德村)이었다.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자 사군명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도검(刀劍)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녹림당은 고사하고 강아지 새끼 한 마리 거
치적거리는 일없이 길게 이어진 관도를 따라 그저 하염없이 걷기만 했을 뿐이
지만 꿈에도 그리던 표사가 되어 처음으로 나선 표행이 드디어 끝나 가는 것
이다.
다그닥, 다그닥……!
행여 외동딸의 혼수밑천인 곡식바리가 털릴까봐 딴에는 구렁이 알 같은 비싼
표행료를 지불하고 미리 도착해서 마을 입구에서 서성이던 촌로(村老)는 반색
을 하고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여깁니다 여기!"
노인이 서 있는 당산나무 아래에 도착한 순간, 한심한(?) 표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고승후가 우렁찬 기합을 토하며 말 등에서 솟구쳤다.
"파핫!"
핑그르르……! 착!
나름의 계산아래 펼친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역시! 아, 이런 양반들이 떡하니 지키고 오니까 도적놈들이 감히 덤빌 엄두
를 못 내지."
"아암, 어르신 말씀이 지당합니다요."
"그러기에 표사나리들이 필요한 게지."
"도적놈들에게 몽땅 털리는 거에 비하면 은자 닷냥은 오히려 싼 거야, 안 그
런가?"
일가붙이쯤 되는지 촌로의 등뒤로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소리씩 하
며 촌로의 말을 거들었다.
벅찬 감회를 다스리며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군명의 귀에 애써 강한 긍정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말이 어쩐지 석연치 않게 들려왔다.
하나, 고승후는 화주(貨主)들의 심정을 능히 헤아리고도 남을 정도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표사였다.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그가 알기로 표물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아무런 사고 없이 예
정대로 도착하면 본전 생각(?)에 속이 쓰린 것이 화주들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은 표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와 무관했고, 표행을 의뢰할 때 도
중의 위험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예상했던 마음과도 상관이 없었다.
화주들의 그런 허전함을 일부나마 메워주는 것이 엄격하고 절도 있는 형식이
었다.
고승후는 수레 옆에 버티고 서서 세권표국의 기치를 바닥에 꽂았다.
"세권표국 표사 고승후와 사군명은 대명(大明) 만력(萬歷) 삼년(三年) 삼월
십오일 절강성(浙江省) 숭덕촌(崇德村) 왕가복(王加福) 대인이 맡긴 표물을
무사히 운송했소. 화주께서는 물목(物目)을 확인해 주시기 바라오!"
우렁차게 외치고 품속에서 두루말이를 꺼낸 고승후는 무려(?) 은자 닷냥의 표
행료에 걸맞은 표물의 목록을 하나하나 읊어 내려갔다.
"백미(白米) 여덟 섬, 대두(大豆) 두 섬, 낙화생(落花生) 한 섬 반. 맞소이까
?"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승후를 바라보던 노인은 그제야 생각난 듯 수레에 실린
곡식가마를 훑었다.
"예, 예 다 맞습니다."
고승후는 수령증(受領證)을 대신하는 물목이 적힌 두루말이를 내밀었다.
"그럼 물표(物標)를 건네주시고 이 곳에다 수결(手決)해 주시오."
평소에 무림인들을 두렵게 여기기 마련인 촌민(村民)들인지라 이름높은 세권
표국의 표사가 정중하고 절도 있게 뭔가 복잡한 절차를 진행하자 노인은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자신이 갑자기 대단히 중요하고 고귀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며 표행료로
지불한 은자 닷냥이 아깝다는 생각은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노인은 어제 표국에 물건을 맡기면서 받은 물표를 소중히 꺼내어 건네고 고승
후가 내민 두루말이를 펼쳐 들었다.
"흐흠. 에…… 또, 이곳에다 수결을 하란 말이지……."
사군명은 새삼 고승후가 까마득히 보였다.
마구간지기를 하며 표사들의 생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들어왔지
만 마치 국서(國書)에 옥새(玉璽)를 찍는 황제라도 된 양 엄숙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이름자를 써 내려가는 노인의 모습을 대하자, 노인이 지불한 표행료를
아깝지 않게 만드는 고승후의 경험이 부러워진 것이다.
어쩌면 표사란 것이 단순히 표물만 운송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다 됐소이까?"
말은 고승후에게 해도 실은 뒤편에 늘어서서 존경스런 눈길(?)로 자신을 바라
보는 사람들을 의식해 한껏 목에 힘을 준 노인에게 고승후는 마지막 선물(?)
을 전했다.
과장되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한쪽 무릎을 땅에 꿇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
것이다.
"본 표국과 거래해 주신데 대해 국주를 대신해서 감사드리며 대인의 건승을
하늘에 빌겠소!"
"고맙소이다, 고마워……."
흐뭇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노인을 뒤로하고
돌아선 고승후가 사군명을 향해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군명이 앞으로 나선 것은 그때였다.
그 역시 노인에게 줄 것이 있는 까닭이었다.
노인을 비롯한 촌민들은 물론, 말에 올라타려던 고승후도 영문을 모르고 사군
명을 바라볼 때, 사군명이 등뒤에 감추었던 손을 내밀었다.
손에 들린 것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작은 자루 하나.
"가마사이로 흘러내린 곡식입니다. 고른다고 골랐지만 바쁘게 줍다보니 아마
돌도 꽤 많이 섞였을 겁니다."
"……!"
노인은 평생을 농사일만 한 사람이었다.
길바닥에 흘러내린 낱알을 주어서 저 정도를 채우려면 허리를 몇 번이나 숙여
야 하는지, 얼마나 바쁘게 손을 놀려야 하는지 노인은 알고 있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사군명과 곡식자루를 번갈아 바라보던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어찌 이런 수고까지……."
고승후조차 사군명에게 향한 놀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표사 노릇으로 보낸 지난 평생을 돌아보아도 과히 부끄러울 일이 없다고 자부
하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자부심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
낀 것이다.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중인의 시선이 쑥스러운지 사군명의 얼굴에 옅은 홍
조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표사가 되기를 꿈꾸던 시절부터 가슴속에 새긴 얘기를 털어놓았다.
"표물은 표사에게 생명입니다. 누구라도 생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소박(素朴)하고 우직한 진심의 토로(吐露).
심부름꾼으로 표국에 들어온 지 십오 년 만에 마구간지기에서 당당한 표사가
된 사군명의 나직한 음성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이곳
은 그가 첫 표행을 마친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