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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해답이다. / 호 14:1-9
한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 어떤 섬인지 아십니까? 울릉도에서 약 87.4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그런데 독도가 분명히 한국 땅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한국 사람들이 독도를 빼앗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이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들은 전혀 미안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을 도둑놈이며 강도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중에, 호사카 유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국적을 갖고, 한국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이라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일본 사람들에게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목숨을 걸고 알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일본 사람이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며, 아예 한국 사람으로 귀화까지 했겠습니까? 진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백년 간의 역사자료를 연구하면서,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이라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 왜 많은 일본 사람들은,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사람을 강도라고 비난하면서, 전혀 미안한 생각도, 죄책감도 갖지 않는 것입니까? 참 진실을 모르고 거짓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거짓을 믿는한, 절대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식으로 표현한다면, 일본 사람들은 거짓을 믿는 한 절대로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브레인컨설팅 대표이사였던 박승오는 KAIST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공부한, 대한민국 과학 엘리트였습니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실명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밤샘 공부와 안약 남용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방황과 눈물로 보냈습니다. 뿌옇고 좁은 시야 속에서 좌절하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우연히 읽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였던 구본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이후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을 탐색했습니다. 이 기간이 삶의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LG전자, 마이다스아이티, 카네기연구소 등에서 교육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그가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이런 책이 있습니다. ‘시계를 멈추고 나침반을 보라’ 이 책에 나오는 “어디로 배를 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시계는 시간을 보는 것이고 나침반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중요하지만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더 중요합니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에게 시계보다 나침반이 더 중요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면 쉬었다 내일 가도 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김은주는 ‘달팽이 안에 달’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침반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에 항상 흔들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바른 방향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흔들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흔들리되 방향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항상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이 나침반이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인생의 나침반인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흔들리다가도 곧바로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자리를 조금 이탈했다가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습니다. 부두에 묶여있는 배는 안전할지 몰라도, 배를 부두에 묶어두려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배를 만든 이유는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어쩔 수 없이 바람을 맞고 물결에 부딪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럼 흔들리다 중심을 잡으면 됩니다. 왜 가다가 넘어집니까? 왜 항해하다가 전복됩니까? 중심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중심을 잘 잡기 위해서는, 무게 중심이 낮아야 합니다. 운동할 때도 보면, 무게 중심이 낮으면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오뚝이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게 중심이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겸손해야 할 이유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성경은 교만하면 넘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 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렘 50:32절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고전 10: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나님 앞에 겸손의 표현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엎드려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엎드려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넘어질 확률이 낮습니다. 그건 삶의 무게 중심이 낮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나침반이 아무리 북쪽을 가리켜도, 그것을 무시하면 소용없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길을 안내해도,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겸손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경을 보면 ‘오라’와 ‘가라’는 두 명령이,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고, ‘가라’는 것은 일터인 세상을 향해서 가라는 겁니다. ‘오라’와 ‘가라’의 사용 횟수를 보면, 오라는 말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북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고멜은, 패물과 귀고리로 장식을 하고 가출을 했습니다. 호세아는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데리고 와서 그를 사랑했습니다. 집을 떠나면 외롭고 고생스럽습니다. 돈 뺏기고 몸 더럽히고 상처를 받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흉년을 면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 땅으로 가서, 고생하고 실패하였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나오미 가정이 실패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 실패의 장소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즘에 생각 외로 집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집을 떠나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면 절망입니다. 교회를 떠나면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온다는 말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욜 2:12-13상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여기서 돌아오라고 한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고쳐주십니다.
1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고 목 놓아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답답했습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매사에 눈치가 보였습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감시를 받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을 뛰쳐나가 바알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니 세상 좋았습니다. 간섭하는 이 없는 내 세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완전히 의절할 수는 없습니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연중행사로 하나님을 찾아가 절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는 상태로 보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간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하는 것을 언제까지 두고 보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2-3절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조건 빌라고 하십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빌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성서는 보다 실감나게 번역했습니다. 3-4절 “모두 야훼께 돌아와 이렇게 빌어라. ‘비록 못된 짓은 하였지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 입술로 하느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아시리아가 어찌 우리를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아니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것 보고,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외에 누가 고아 같은 우리에게, 어버이의 정을 베풀겠습니까?’” 왜 무조건 빌어라 했을까요? 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했을까요? 용서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포기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안 볼 작정이었으면 버려두면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는, 하나님의 품이 답답해서였습니다. 하나님한테 매이는 게 귀찮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거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어떻게 됐습니까? 2-3절 말씀을 보면 나옵니다. 그들은 수송아지에 매였습니다. 앗수르에 조공 바치면서도, 간섭은 간섭대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군마를 하나님처럼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아 처지 같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군마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시 20:7-8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군마를 의지하는 자는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로 선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고아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 곧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를 떠난 인생이 고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있는 고아라는 사실입니다. 멀쩡히 아버지가 있는데 고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향해 호칭이 바뀝니다. 뭐라고 바뀝니까? “아버지”, “아빠 아버지” 이전에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요 두려운 하느님이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하면서, 울컥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고아인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아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아버지를 만난 우리를 통해서,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고아 신분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통해서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미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친 후, 제발 돌아와서 빌기만 해다오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철든 자녀입니다. 왜 하나님은 저렇게 나만 보면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무슨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우리만 보면 화를 내겠습니까? 하나님께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에게 괜히 화내지 않습니다. 괜히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습니다. 화를 실컷 돋구어놓고 왜 화를 내냐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럼 더 화가 납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화가 폭발할 수 있습니다. 한쪽이 화를 내면, 다른 쪽에서는 대꾸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이건 하나님께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4절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타이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할 계획을 세우고, 무조건 잘못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아직도 반역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가 서 있습니다. 이 반역을 하나님이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리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밖에 모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하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쁜 짓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랑하십니다. 아파하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미운 짓만 골라서 하면, 하나님이 아파하면서 사랑하십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까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파하면서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징계를 당해 아팠고, 그런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더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파하는 사랑을 끝내고 싶으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거 같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파하면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거 같습니까?
5-7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랑하실 때,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기후가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쯤은, 다들 알 것입니다. 건기에는 비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그럼 식물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이슬 때문입니다. 이슬은 식물에게 생명입니다. 이슬이 그치면 식물은 말라죽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습니다. 이슬이 아무 때나 내리지 않습니다. 밤중에 내립니다. 한 낮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에는 내리지 않습니다. 그때 내리면 땅에 내리기가 무섭게, 금방 말라버립니다. 이슬은 밤중에 내려야 합니다. 이슬이 밤중에 내리는 게, 제 때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제 때 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가장 절적할 때에 됩니다. 아픈 사람에게 밤중은 가장 고통스런 시간입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밤중은 가장 힘겨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밤중에, 그 고통스러운 밤중에, 그 힘겨운 밤중에,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행 16:25-26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제까지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입니다. 수분을 받지 못해 고사 직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기적같이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란 나무가 회복되었습니다. 백합화가 피었습니다. 레바논 백향목처럼 뿌리가 내렸습니다. 가지가 감람나무 같아졌습니다. 그 향기가 레바논 백향목 같았습니다.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왔습니다.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이 풍성한 곡식을 냈습니다. 향기로운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8절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영락없이 집나갔던 둘째 아들을 맞이했던 아버지 모습입니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는 모습을 한 탕자를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이 흥분하셨습니다.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그동안 미운 짓만 골라가면서 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이제 그들이 열매 맺게 될 거라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9절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이런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의인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믿음의 사람이 의인입니다. 의인의 길로 다니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말씀의 나침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결국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말씀에 인생의 길이 있고, 말씀에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해답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살 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며 사랑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치즈로 유명한 크래프트 회사가 있습니다. 설립자인 크래프트의 이름을 따서 회사명을 지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만, 신실한 믿음과 성실로 치즈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성장하자, 그는 주일을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한번, 두번 예배를 빠지면서, 급기야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던 회사가 갑자기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산 라인이 중단되기 시작했고, 직원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습니다. 크래프트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군. 적자가 날 리가 없는데’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자네가 망할 줄 알았네. 자네, 회사를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한 적이 있는가? 믿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을 제쳐놓고 사업을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네.” 크래프트는 친구의 말을 듣고 새롭게 결단을 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무엇도 아닌 말씀을 붙든 것입니다. 그후 지금까지도 크래프트 치즈는 치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순결한 삶을 원합니까?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원합니까? 영육 간에 아름답고 강건한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널리 발하는 복된 삶을 원합니까? 아마 성도라면 누구나 다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다시는 죄의 길을 가지 않겠노라고 서원하는 사람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슬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바꿔 말한다면 무슨 뜻입니까? 회개 없이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은, 예수를 수십 년 믿는다 할지라도, 결단코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쓰러지고 넘어졌을 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연약해서 또 넘어졌습니다. 힘이 없어서 이렇게 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는 죄악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 인도해 주세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결국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에서, 말씀의 나침반에서 눈을 떼지 말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슬과 같은 은혜와 사랑을 풍성하게 받아, 말씀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허락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참으로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연약할 때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강함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지혜로움을 깨닫고, 그 지혜를 배우게 하옵소서. 주님을 의지함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슬픈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위로가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상처 투성일지라도,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일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메마른 땅일지라도, 우리의 육신이 깨어진 옹기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받으면서, 날마다 축복을 노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지난 4개월 동안에 호세아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가 더 귀하고, 복된지를 알게 하셨으니, 이제 행하게 하옵소서. 이제 실천하게 하옵소서. 능력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