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 문화라는 긴 글에서, 그림이 나오는 일 부분만을 발췌하였습니다. 진경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경문화
(*긴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라 글의 흐름이 매그럽지 못합니다. 삼연은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청나라에 붙잡혀 간 삼학사)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영의정 김창집, 예조판서 김창협은 형제이다. 안동김씨로 노론의 거두이다. 인왕산 아래에 살았고, 문인식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겸재도 드나들었다.)
삼연의 문하에서는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배출되어 이들이 진경문화를 절정에 올려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다.
겸재는 스승 삼연과 집우 사천이 진경시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사생해 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림으로 바꿔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이에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창강 조속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성리학파들의 숙제이기도하였다. 마침내 겸재는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진경산수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당시를 살던 조선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 중국풍의 산수화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등장하던 인물들이 중국의복을 벗지 못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진경산수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의 그림이 중국의 산수와 중국 사람(신선 등)을 표현했으나, 겸재는 우리의 산수와 우리나라 사람을 그렸다. 우리나라 사람과 풍습을 그린 풍속화도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출현하여 그 화법을 완성시켜 나감으로써 그림에서 조선고유색을 현양해 내고 있을 때, 도자기도 분원(分院)이 광주(廣州) 경안리(慶安川) 하구(河口) 한강과 합수(合水)되는 지점 부근의 금사리(金沙里)와 분원리(分院里)에 차례로 정착되면서 달항아리나 술병, 각종 제기(祭器) 및 연적(硯滴), 필통(筆筒) 등 문방구(文房具)에서 조선 특유의 기형과 깊이 있는 순백색을 자랑하며 조선 고유의 백자 문화를 한껏 고양해 간다.
(조선 후기의 이조백자를 만든 곳이고, 여기서 만든 도자기가 조선후기 청화백자가 대표적이다.)
이는 진경문화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영조(英祖, 1694-1776)가 왕자 시절 사옹원도제거(司饔院都提擧)가 되어(1711) 그 후원 대책을 확립하고 나서 진행된 급속한 발전이었다.
(우리가 이건희 수집품에서 본 청화백자는 사옹원 분원에서 만든 것입니다.)
조선고유색 발현에 앞장서서 진경문화를 선도하던 겸재세대가 숙종 초년(1675)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세대인데 반해 명문화의 계승을 주장하며 중국풍으로의 환원을 시도한 세대는 숙종 35년(1709)경에 출생한 세대들이었다. 30여년이라는 한 세대 차이의 세대간의 갈등과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문화적 대립 현상은 오히려 진경문화를 다양하고 폭넓게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회화분야에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4),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64-1822), 초원(蕉園) 김석신등이 출현하여 겸재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이들이 화원화가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시대 초기문화를 주도하면서 조선고유색 짙은 화풍을 창안해 내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와 풍속화풍의 시조인 관아재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의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는 정조의 치세 하에서 대미(大尾)를 찬란하게 장식하면서 북학문화로 연결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니,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나 화성행궁, 수원성곽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겸재가 비내린 뒤의 인왕산을 그린 산수화로 국보 216호이다.
《 인왕제색도》를 그린 때는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이다. 이때 정선의 나이는 76세였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평생을 사귄 벗이었던 이병연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관념적인 풍경이 아닌 실제 풍경을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다. 검은 먹을 사용해 비온 뒤 인왕산의 기암괴석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바위 틈새를 흰 선으로 표현해 사실감을 더했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북종화와 남종화를 종합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