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머리 / 김석수
지난 주말 난생처음 파마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을 보고 혼자 빙긋이 웃는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소크라테스나 베토벤을 연상하게 한다. 이마 위 흰 머리카락은 실타래를 풀어 놓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다. 귀밑머리는 하얗고 두상은 검다. 운전하면서 신호 대기 중 실내 거울로 내 머리를 자주 본다. 딴 사람 같다. 아직은 익숙지 않아서다. 아내는 염색하면 사십 대로 보일 것 같다고 했다.
오십 대 초반부터 염색해 오다 작년부터 안 했다. 집 근처 목욕탕 내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염색했지만 코로나19로 가지 못해서다. 이발만 하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이발사가 부추겨서 염색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동안(童顏)이니 머리를 검게 하면 깔끔하고 십 년은 더 젊어 보인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머리를 깍는 솜씨는 물론 손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요령이 보통이 아니다. 머리를 만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발소을 시작해서 오십여 년째 하고 있다. 시내 유명 호텔에서 꽤 오랜 기간 일하면서 단골을 많이 사귀었다. 지금도 멀리서 그를 찾아오는 손님만 해도 줄잡아 한 달에 백여 명이 넘는다. 사실 나도 그를 따라온 셈이다. 동네에 새로운 목욕탕이 생겨서 함께 옮겨왔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 관리로 매일 목욕하고 실내 근력 운동과 퇴근 후 저녁에 학교 운동장을 걷는다고 한다. 이발소 안에 앵무새를 키운다. 오디오 시설을 갖추고 손님 취향에 따라 음악을 틀어 준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내가 이발하는 중에 베토벤 <<전원 교향곡>>을 들려주기도 한다.
아내는 목욕탕 이발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눈치다. 동네 미용실을 권했다. 그곳은 오십 대 초반 부인이 혼자 하는 미용실이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지만 미용실이 처음이라 어색했다. 분위기로 보아 중·고등 학생들과 중년 여자들이 주고객이다. 머리는 그런대로 잘 깎아 주었지만 미용실 분위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과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려웠다. 기계적으로 머리만 깎아 주는 느낌이 싫어서 몇 번 다니다 다시 목욕탕으로 갔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발소와 미용실에 가지 못해서 머리가 덥수룩하게 길었다. 긴 머리가 귀를 반쯤 덮었다. 밑동에서 하얀 머리카락이 올라왔다. 이발을 하려고 이곳저곳 둘러보니 사택 근처 아파트 앞에 미용실 푯말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손님이 왔다고 소리치니 사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 깎으러 왔다고 했더니 의자에 앉으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끈으로 느슨하게 묶고 가슴이 훤히 비쳐 보이는 윗옷을 입고 있었다.
한참 뒤 어떤 남자가 들어오자 그녀는 소리를 지른다. 코로나로 손님이 없어서 월세를 줄 수 없다. 다른 가게 주인은 세를 절반으로 깎아주는지 아느냐? 생양아치처럼 굴지 말라고 화를 벌컥냈다. 그들이 싸우다가 내가 다칠까 봐 겁이 났다.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다 머리는 집에서 감겠다고 옷을 털고 나왔다. 거울을 보니 스포츠 선수 스타일 머리다. 아무튼 다시는 그 집에 가기 싫었다. 손님 귀중한 줄 모르는 것 같아서다.
또 시간이 지나 머리가 길어서 찾아 나선 곳이 이번에 내가 파마한 곳이다. 삼십 대 중반 여자 미용사 둘이 일한다. 모두 키가 크고 미녀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으라며 차 한잔을 권하며 예약했냐고 묻는다. 안 했다고 하자 예약하고 나중에 오라고 한다. 다음 날 갔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따끈한 차를 가져왔다. 찾아 주어서 고맙다며 머리를 어떻게 잘라야 할지 내 의견을 물었다.
염색하지 않고 인상이 부드럽고 젊게 보였으면 한다고 했다. 머리를 만져보더니 이번에는 커트만 하고 다음에 파마를 해 보자고 했다. 그런 적이 없다고 망설였다. 요즘 나이 든 사람들도 파마를 많이 한다면서 내 머릿결은 파마하기에 좋다고 했다.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머리가 적당히 길기를 기다렸다 파마 예약을 했다.
가볍게 커트하고 끈적끈적한 파마제를 쳐 가며 롯드를 말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익숙했다. 머리가 잘 마르도록 로봇처럼 생긴 예열기를 머리 주변에 장치했다. 한참 기다리는 동안 차와 커피를 권하면서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롯드를 풀고 머리를 감았다. 거울을 보면서 파마가 잘 나왔다고 했다. 염색하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어울린다고 활짝 웃었다. 예술가가 정성을 다해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웃는 표정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젊은 사람들과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해 보려고 파마했던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