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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죽음[老死]
20.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1)
(*1) 여기서부터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에 관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본경에서는 연기의 가르침을 노 · 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명까지 역순으로 관찰하여 올라가서
이 무명의 조건으로 다시 번뇌[漏, āsava]를 설하고 있다.
21.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늙음과 죽음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22.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늙음과 죽음이고, 무엇이 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늙음과 죽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여러 중생들의 부류 가운데서 이런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이가 빠짐, 머리털이 허옇게 셈,
피부가 주름짐, 수명의 감소, 감관의 노화- 이를 일러 늙음이라 합니다.
여러 중생들의 부류 가운데서 이런저런 중생들의 죽음, 떨어짐, 종말, 사망, 서거, 오온의 부서짐,
시체를 안치함,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 이를 일러 죽음이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러한 늙음과 이러한 죽음을 일러 늙음과 죽음이라 합니다.
태어남이 일어나면 늙음과 죽음이 일어납니다.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도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2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늙음과 죽음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태어남[生]
24.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25.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태어남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26.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어남이고, 무엇이 태어남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태어남의 소멸이고, 무엇이 태어남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여러 중생들의 부류 가운데서 이런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출생, 도래함, 생김, 탄생,
무더기의 나타남(*2) 여섯 감각장소의 획득- 도반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합니다.
존재[有]가 일어나기 때문에 태어남이 일어납니다.(*3)
존재가 멸하면 태어남이 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태어남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27.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태어남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태어남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2) “한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eka-vokāta-bhava, 즉 무상유정천)에서는 한 가지가,
네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즉 무색계존재)에서는 네 가지가,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즉 인간 등)에서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 생긴다.”(MA.ⅰ.217)
(*3) “‘존재[有]가 일어나기 때문에 태어남이 일어난다(bhavasamudayā jātisamudayo).’에서
‘존재[有. bhava]’는 태어남의 조건인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를 말한다.”(MA.ⅰ.217)
존재[有]
28.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29.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존재[有]를 꿰뚫어 알고, 존재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존재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30.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존재[有]이고, 무엇이 존재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존재의 소멸이고, 무엇이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도반들이여, 세 가지 존재[有]들이 있습니다.
욕계 존재[欲有],(*4) 색계 존재[色有], 무색계 존재[無色有]입니다.
취착[取]가 일어나기 때문에 존재가 일어납니다,(*5)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31.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존재[有]를 꿰뚫어 알고, 존재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존재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4) “‘욕계 존재[欲有, kāma-bhava]'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이다.
업으로서의 존재란 욕계에 다가갈 업을 말한다. 그것은 재생의 원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결과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재생으로서의 존재란 그 업에 의해서 생긴, 취착의 [대상인] 오온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곳에서 업과 재생, 둘 다를 여기서 욕계존재라 했다.
이 방법은 색계 존재와 무색계 존재에도 적용된다.”(MA.ⅰ.218)
(*5) “‘취착이 일어나기 때문에 존재가 일어난다(upādāna-samudayā bhava-samudayo).’
이 취착은 유익한 업으로서의 존재에게 오로지 강하게 의지하는(upanissaya) 조건으로 조건이 되고,
해로운 업으로서의 존재에게 오로지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으로 조건이 되고,
함께 생긴 조건 등(sahajātādi)으로도 조건이 된다.
그러나 취착은 태어남으로서의 존재[生有]에게는 오로지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MA.ⅰ.218)
취착[取]
32.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3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취착[取]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34.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취착[取]이고, 무엇이 취착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취착의 소멸이고, 무엇이 취착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도반들이여, 네 가지 취착[取]이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欲取],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입니다.(*6)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취착이 일어납니다.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취착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35.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취착[取]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취착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6) “‘네 가지 취착(cattāri upādāna)’ 가운데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欲取, kām-upādāna]’이란
대상이라 불리는 감각적 욕망(vatthu-kāma)을 취착하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이라 한다.
혹은 감각적 욕망 자체가 취착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이라고도 한다.
취착이라는 것은 강하게 거머쥐는 것(daḷha-gghaṇa)이다.
이것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두고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견해 그 자체가 취착이기 때문에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 diṭṭhi-upādāna]이다.
혹은 견해를 취착하기 때문에 ‘견해에 대한 취착’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계와 의식을 취착하기 때문에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 sīla-bbatt-upādāna]’이라 한다.
혹은 계와 의식 그 자체가 취착이기 때문에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이라고도 한다.
소처럼 행동하고 소처럼 사는 것이 청정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취착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통해 주장하기 때문에 교리(vāda)라 한다.
이것을 통해 취착하기 때문에 취착이다. 무엇을 주장하거나 취착하는가?
자아다. 자아의 교리를 취착하는 것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 我設取, 我取, atta-vādupādāna]’이다.
혹은 단지 자아의 교리가 자아이고, 그것을 통해 취착하기 때문에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이라고도 한다.”(MA.ⅰ.218)
갈애[愛]
36.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37.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갈애[愛]를 꿰뚫어 알고, 갈애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갈애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38.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갈애[愛]이고, 무엇이 갈애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갈애의 소멸이고, 무엇이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7)가 있습니다.
형색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에 대한 갈애입니다.(*8)
느낌[受](*9)이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납니다.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39.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갈애[愛]를 꿰뚫어 알고, 갈애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갈애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7) 연기의 구성요소를 정의하고 설명하고 있는 본경과 『상윳따니까야』 제2권 「분석 경」(S12:2) §§8~10 등에서
갈애와 느낌과 감각접촉의 셋은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cha taṇhā-kāya)’와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cha vedanā-kāya)’와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cha phassa-kāya)’로 무리(kāya)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고 있다.
이것은 눈·귀·코·혀·몸·마노의 여섯 가지를 무리라는 단어로 모아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가지는 『디가니까야』 제3권 「합송 경」(D33) §2.2(3)~(8)에서
알음알이,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sañcetanā), 갈애에 적용되어
각각 여섯 가지 알음알이 무리(cha viññāṇa-kāya),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
여섯 가지 인식의 무리, 여섯 가지 의도의 무리,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로도 나타나고 있다.
(*8) “이 여섯 가지는 눈의 문 등에서 속행의 과정으로 일어난 갈애의 이름들이다.
이 중에서 형색을 대상으로 한 갈애가 형색에 대한 갈애이다.
이것은 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세 가지이다.
① 이 갈애가 감각적 욕망(kāma-rāga-bhāva)으로 형색의 대상을 즐기면서(assādenti) 일어날 때,
그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kāma-taṇhā]라 한다.
② 상견과 함께 한 욕망(sassata-diṭṭhi-sahagata-rāga-bhāva)으로
‘그 형색의 대상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한 것이다.’라고 즐기면서 갈애가 일어날 때,
그것을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라 한다.
③ 단견과 함께 한 욕망(uccheda-diṭṭhi-sahagata-rāga-bhāva)으로
‘그 형색의 대상은 끊어지고 멸하여 죽으면 끝난다.’라고 즐기면서 갈애가 일어날 때,
그것을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라 한다.
이 방법은 소리에 대한 갈애 등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하여 갈애는 18가지가 있다.
이것은 안의 형색 등으로 18가지이고, 밖의 형색 등으로 18가지가 되어 모두 36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 과거의 갈애 36가지, 미래의 갈애 36가지, 현재의 갈애 36가지로 108가지의 갈애가 있다.
다시 그들을 요약하면 형색 등 대상(ārammaṇa)으로 여섯이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등으로 셋이라고 알아야 한다.”(MA.ⅰ.219)
(*9) “여기에서의 ‘느낌[受, vedanā]’은 과보로 나타난 느낌(vipāka-vedanā)을 말한다.”(MA.ⅰ.219~220)
12연기의 느낌을 과(果)로 이해하는 것은 아비담마가 12연기를 인과의 중복된 반복(兩重因果)으로
12연기를 해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북방 아비담마 · 아비달마에서는 무명 · 행과 애 · 취 · 유를 인(因)으로 이해하고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와 생 · 노사를 과(果)로 이해해서
삼세에 걸쳐서 이러한 因과 果가 두 번 반복된다고 해서 삼세 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12지 연기를 비롯한 연기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정설로 삼고 있다.
느낌[受]
40.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41.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느낌[受]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42.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느낌[受]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가 있습니다.
눈과 접촉하여 생긴 느낌, 귀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코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혀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몸과 접촉하여 생긴 느낌, 마노[意]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입니다.(*10)
감각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납니다.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4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느낌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10) “이들은 눈의 문 등에서 일어난 유익한 느낌(kusala-vedanā), 해로운 느낌(akusala-vedanā),
무기(無記)의 느낌(abyākata-vedanā)의 이름들이다.
『위방가』(분별론)에서 “눈과 접촉하여생긴 느낌은 유익한 것도 있고, 해로운 것도 있고,
유익하거나 해롭다고 설할 수 없는 무기의 느낌도 있다.”(Vbh.26)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감각접촉[觸]
44. “도반이시여, 참으로 장하십니다.”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리뿟따 존자에게 계속 질문을 하였다.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있습니다.
45.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감각접촉[觸]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46.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접촉[觸]이고,(*11) 무엇이 감각접촉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감각접촉의 소멸이고, 무엇이 감각접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입니까?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가 있습니다.
눈의 감각접촉, 귀의 감각접촉, 코의 감각접촉,
혀의 감각접촉, 몸의 감각접촉, 마노의 감각접촉입니다.(*12)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가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일어납니다.
여섯 가지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감각접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47.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감각접촉[觸]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감각접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11) 일반적으로 ‘감각접촉[觸]’은 빠알리어 phassa를 옮긴 것이다.
본서 「꿀 덩어리 경」(M18) §16에서는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tiṇṇaṃ saṅgati phasso).”라고 감각접촉을 정의하고 있으며,
『상윳따니까야』 제2권 「괴로움 경」( S12:43) 등 니까야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잡아함경에서 삼사화합생촉(三事化合生觸)이나 삼사화합촉 등으로 한역되었다.
그런데 본경을 비롯한 니까야 전체에서 ‘감각접촉’으로 옮기고 있는 원어는 samphassa와 phassa의 두 단어이다.
전자는 예외 없이 ‘눈의 감각접촉(cakkhu-samphassa)’이나 ‘귀의 감각접촉(sota-samphassa)’ 등의 합성어에서
쓰이고 있으며 후자는 그 외의 경우에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본경에서도 ‘감각접촉의 일어남’ 등은 phassa-samudaya로 나타난다.
이처럼 samphassa와 phassa는 용례만 다를 뿐이지 뜻은 같다.
(*12) “‘눈의 감각접촉[眼觸, cakkhu-samphassa]’부터 ‘몸의 감각접촉[身觸, kāya-samphassa]’까지는
유익한 과보로 나타난 것과 해로운 과보로 나타난 것의 열 가지 감각접촉을 말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은 나머지 22가지 세간적인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을 말한다.
눈의 감각장소 등 여섯 가지 감각장소가 일어날 때 이런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MA.ⅰ.221)
여기서 감각접촉도 앞의 느낌(受)의 경우처럼 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도 아비담마가 12연기를 인과의 중복된 반복으로 12연기를 해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