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5:1~1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2021. 8. 25
1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1)사하시리이다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 땅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편 65편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내용을 따라 문단을 구분하여 보면 1~4절은 찬송과 서원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인한 죄 사함이 나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는데 이들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들은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5~8절은 이러한 구원의 소식이 땅끝까지 선포됩니다. 9~13절은 창조주와 구원의 주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그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이 다른 번역으로는 침묵입니다. 찬송은 주께 드려짐이 마땅한데 침묵은 어떤 뜻입니까? 침묵이란 주를 신뢰하고 주님 앞에 잠잠한 것입니다. 시편 62:1절을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잠잠히 침묵하는 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기에 소리 내어 찬송함보다 못지않은 찬송입니다. 시온은 주님을 경배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에서 주님을 신뢰하는 침묵과 찬송을 하는 일이 서원을 이행하는 겁니다.
본문 2절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기에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온다고 합니다. 시온 곧 주님을 찬송하는 곳이니 이곳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다윗 시대에 건물로 된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에 주를 만나는 어느 곳이라도 성전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사56:7).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복음을 들은 사람 대부분이 기도할 내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기도한 내용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주제설교를 약 10년 전에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백 편이 넘게 간구하다 호소하다 부르짖는 내용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아벨의 피의 호소이고 두 번째가 아브라함의 간구인데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첫째와 둘째의 간구가 이런 내용이라는 일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물론 요식적으로 이웃과 세계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덧붙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처음 호소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의인의 피의 호소입니다. 그 피 흘림으로 인하여 이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소돔과 고모라의 삶을 살다가 불로 심판을 받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임을 안다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탐심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장소는 성전이든 예배당이든 도둑의 소굴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너희는 도둑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막11:17). 그러면 무슨 기도를 합니까?
본문 3절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1)사하시리이다” 사하시리라는 단어의 각주를 보면 속(贖)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사하신다는 말은 용서를 말하는데, 속한다는 말은 죄에 대하여 제물(祭物)이나 재물(財物)을 받고 용서함을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께 가장 중요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제물로는 결코 죄를 속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의 손에서 받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시편 40:6~7절과 12절을 봅니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입니다” 12절에서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6~7절의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오심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히10:10).
시편 49:6~8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이 내용도 이미 보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도 재물로도 속죄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속전은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사람이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이기는 겁니다. 죄가 우리를 이겼다고 고백하면서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죄를 사하여주신다고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이 권세로 장악하고 있기에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속입니다. 여기서 온갖 종교가 나옵니다만 그러나 어떤 인간의 행위로도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주님의 용서를 바라보는 자가 택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이 고백이 나옵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나를 사하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함의 속성은 죄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죄인이 보게 되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가까이 거하게 하시려면 죄를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 죄를 주께서 대속하신 일이 십자가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그가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심입니다(고후5:21).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소식을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하십니다.
본문 5~8절을 봅니다. “봉독” 본문 1~4절을 통하여 죄악이 나를 이겼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사하여 주셨다는 놀라운 구원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을 땅끝까지 먼바다까지 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주를 의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 역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그 그리스도, 그 언약을 따라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새 언약을 이루시고 그 복음의 소식이 이곳까지 오는 시간이 약 2천 년이 걸렸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들은 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주가 되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물결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시키는 주님을 알고 믿음으로 아침 되는 때와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복음으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시편 38:1~5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죄악의 고통은 아침이 되어도 괴롭고 저녁이 되어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아는 자라야 용서의 기쁨을 알기에 아침도 저녁도 즐거움입니다.
시편 51:12~15절입니다.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입니다. 죄악이 자신을 이긴 겁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말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나를 사하신다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본문 9~13절입니다. “봉독” 이런 내용을 그림 언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들이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상태를 이사야 11장에서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어노는 모습으로,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래서 더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사하여주시리라고 고백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돌보심이 어떠한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을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해석하면 성경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가 증거되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일어나는 생명의 풍성함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번영신학이 되고 맙니다. 땅을 돌보시고 하나님의 강에 물이 넉넉하다는 것은 생명수의 넉넉함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죄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렘2:13).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러한 자를 생명수의 넉넉함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사야 12:1~4절입니다. “1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주의 진노를 돌이켜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기에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습니다.
이어지는 4~6절입니다. “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구원받은 소식이 땅끝까지 증거되듯이 여기서도 그 아름다운 일을 만국 중에 선포합니다. 극히 아름다운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봅니다. 죄악이 우리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사하여주신다는 그 내용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겁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주께서 택하신 자들이며 주께서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환경이 넉넉하지 못하여도 생명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
요즈음 부산의 정 집사님과 문자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정 집사님이 말씀 묵상한 내용을 보내면 제가 간단히 답을 하는 식인데 그 내용이 너무 많은 내용이라서 다 인용은 할 수가 없고, 어제오늘의 내용을 요약하여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짓게 된 죄의 직접 피해당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많은 선지서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복"을 언급한다. 이 번역은 아주 적절한 단어 선택이다. 우리의 죄는 참소기관(사단)을 상대로 한 "자수"가 아니라 직접 피해당사자에게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복"의 개념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자복"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만 하면, 아니 우리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 우리가 "자복"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시기만 하면, 사단(참소기관)은 절대 우리를 참소하지 못한다. 이러한 창세 전 하나님의 섭리가 현실의 법체계에도 일부 반영된 것이다.” 반의사불벌죄(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소추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가 간단한 답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설교가 ‘죄가 나를 이겼사오니’입니다. 자복해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면 처벌받아야 하는데 그 처벌을 십자가로 해결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으로 설복하고 있는 하나님의 열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답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복하더라도 피해당사자가 용납해 주지 않으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마땅한 것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직 죄 가운데서 죄에 취해 피해자를 훼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기 아들을 속죄양으로 희생하시는 사랑, 이것은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며 그 발에 입맞춤을 쉬지 않을 뿐입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이런 내용을 전하는 이유는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는 모습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다시 요약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모든 육체가 나오는 이유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여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주께서만 사하여주시기에 나오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입니다. 5~8절은 이런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땅끝까지 증거됩니다. 그러면 그 놀라운 죄 사함의 소식을 들은 자들이 역시 주께 나아오면서 하는 고백도 같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다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9~13절은 이러한 자들은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의 샘에서 영원히 흐르는 생명수 강을 마음껏 마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나온다고 한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욕망만 나오는 배에서 생명수가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 생명수를 마음껏 마실 뿐만 아니라 넘치기에 흘려보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는 자들은 역시 이 고백을 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주께서 사하여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