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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사랑 / 시 15:1-5, 요 21:15-17
오늘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베드로는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베드로는 자기 식구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극진하게 사랑한 흔적들이 성서 곳곳에 나와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요 21장을 중심으로 베드로가 얼마만큼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알아보고,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성서 전체를 볼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굉장히 사랑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한 것들은 거짓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라고 결심하는 얘기를 예수님께 여러번 드린다. ‘이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겁이 나서 도망갈 때 그는 도망갔지만 다시 돌아와서 대제사장의 집에 가보았던 것이다.베드로가 물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한 것은 인간적인 마음은 진실이었지만 문제는 인간적인 사랑의 한계이다. 예수님을 결코 버리고 싶지 않지만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으로는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까지 간다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기뻐하셨다.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적인 마음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마음에서 비로소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 얼마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대제사장에게 잡히고 내가 죽은지 삼일 만에 부활하겠다’라고 말씀하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렸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반석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금방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다. 베드로가 ‘예수님! 지금 죽으시면 안됩니다’라고 한 말은 베드로의 사랑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자기 선생님이 ‘내가 죽겠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랑하는 선생님이 죽겠다는데 어떻게 죽도록 가만히 놔 두나? 그래서 베드로가 말렸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책망 받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인간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사랑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아직도 미흡한 사랑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신적인 사랑,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하겠다’라는 그 사랑을 가지고 계셨는데, 베드로가 거기까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사랑에서 ‘죽으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요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떡을 통해서 영적인 말씀을 하신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한다. 많은 사람들은 배부른 육적인 떡을 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흩어지고 다 가버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겠느냐?’라고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며 우리가 뉘게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베드로의 사랑이다. 분명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다. 인간적인 결단이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일 때가 많다.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내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어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탄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왜 기쁜가? 부활절에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왜 기쁜가? 예수님 때문에 기쁜가, 아니면 나 때문에 기쁜가? 예수님을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교회에 나와 주는 일들, 이런 일들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면 예수님을 떠나고 배발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잡으려는 많은 무리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베드로가 졸다 깨어보니 예수님을 잡으러 사람들이 왔다. 내 선생님을 잡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 비록 책망하셨지만 아마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잡으러 온 말고의 떨어진 귀를 붙여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신적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항상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 버렸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한계였다.
성서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나? 베드로는 비겁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체험한 후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사건으로 많은 고난을 당한다. 심지어 대제사장들과 유대 관원들이 잡아 심문하면서 하는 말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앞으로 이 말을 전하지도 말라’라고 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내가 당신들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겠는지, 어느 것이 옳은지 당신들이 판단해 보시오. 나는 내가 듣고 본 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소’라고 말한다. 이거이 바로 베드로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예수님을 위했는지 모른다. 오순절 이전에는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인간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그 사랑과 그 감격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하니까 예수님을사랑하는 것이다. 혹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봐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랍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무속종교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관을 보면 기복신앙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에는 피벌신앙인 것 같다. 벌받는 것을 피해보겠다는 심리가 더 큰 것 같다. 제사드리는 분들을 한번 생각해 보면, 제사를 드려서 자손과 친척의 화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발 받을까봐 제사를 드리는 것 같다.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예수를 믿는 것이 대때로 내 필요에 의해 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잇는 한계이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한게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오고, 또한 헌금 준비도 할 줄 알지만, 예수님 따라다니듯이 왔다갔다만 하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그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체험해야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용감해 질 수 있고 과감해 질 수 있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요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라고 말한다. 시몬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원래 이름이다. 베드로는 영적인 이름을 말하고 시몬은 육적인 이름을 말한다. 그전 같으면 ‘게바야, 베드로야’라고 말했을 텐데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육적인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신 말씀에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잘 아는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처음 한번은 이렇게 묻는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신적인 사랑을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아닙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필로스합니다. 인간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다시 예수님께서 묻는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아니요. 주님, 저는 필로스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묻는다. ‘그러면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로스하느냐?’ ‘예, 주님, 내가 필로스합니다’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세번씩 예수님께 대답한 것은 필로스였다. ‘내 아내를 사랑하듯이, 내 친구를 사랑하듯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의 대답은 명확하다. 베드로는 하지 못할 것을 한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처음은 ‘못합니다.’ 두번째 또 ‘아가페하느냐?’라고 했을 때 ‘앞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는 사랑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아내나 친구를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베드로의 사랑이 얼마나 명확한가? 사랑은 결단코 허영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허영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나는 주님을 필로스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명확하게 대답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요 21장을 ‘베드로의 위임식’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금 베드로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교회를 세우고 또 해야 할 일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구심점이 없어졌고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사도 베드로의 위신도 다른 사람들이 세워주지 않는다. ‘우리는 도망갔지만 당신은 배반하지 않았소?’라는 생각을 할 것이며, 베드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격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다면 이들은 자기들의 구실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위치를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해 다른 제자 앞에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권고해 주심으로써 베드로가 구심점이 되도록 해주셨다.
요 21장은 사도 요한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썼다고 본다. 이 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는 말이 있다. 요 20장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결론이 이미 다 나와 있다. 21장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21장을 다시금 붙여 놓은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한가지는 베드로의 위신을 회복시키는 일이며, 또 한가지는 요한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라고 본다. 당시에 제자들은 요한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 본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이니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요한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해 하고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라는 이 사랑의 확인이 시시때때로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이 물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학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참 크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분명히 아빠 엄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물어본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의 확인 때문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까닭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높이기 위함이다. 사랑을 예수님께서 믿지 못해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나?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만일에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확인이 필요없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는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확인해서 물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베드로에게 주신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초기에 강조하신 것과 중기에 강조하신 것과 말기에 강조하신 것이 조금씩 다르다. 초기에는 주로 ‘나를 따라오너라. 와서 보라’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중기에 가면 주로 믿음에 관한 말씀을 강조하신다. ‘너희가 나를 믿느냐? 또한 믿으라’라고 많이 말씀하신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믿는다, 믿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합쳐서 98번 나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을 믿음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말기에 가면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시고, 베풀고 사랑을 보이시는 일을 하셨다. 물론 초기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따라오라’, 중기에는 ‘믿으라’, 말기에 가서는 ‘사랑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세단계는 결국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단계이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라간 것이 아니다. 무조건 와 보는 것이다. 예수님 초기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당신이 오실 그 선지자입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에도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본 대로 말하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가서 전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초기에는 당신 자신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무조건 와서 보라는 것이다. ‘따라오라. 와서 보라’라고 하신 말씀을 많이 하셨다. 우리가 처음 에수님을 믿을 때에는 교회가 무엇인지 아나? 그냥 와보는 것이다. 모태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유아세례를 받고 부모님 따라 교회를 다니고 입교할 때까지 우리가 무엇을 알고 가나? 그냥 부모님이 가자고 하니까 가는 것이다. 가다 보니까 교회가 좋아지고, 그러다보니 두번째 단계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을 구체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조건이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의 과정인데 믿음이 없으면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세 번째 단계는 사랑이다. 사랑은 믿음이 완성이다. 복음의 완성이고 율법의 완성이다. 모든 것의 결론은 사랑이다. 우리나라 교회를 보라. 110여년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왔나? 그런데 세번째 사랑에 대해서는 무엇이지 마음에 걸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 번째 단계를 거쳐갈 때에 좀더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말씀을 보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첫 번째 물어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셨겟나? 베드로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본심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약점이 사랑하기는 하는데 항상 우월감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라는 우월감 속에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말한다. ‘다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단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실수였다. 베드로가 오히려 예수님께 나와서 ‘이 사람들도 버리지 않겠지만 저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좋아하셨겠나? ‘다 버릴지라도’라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버린다’라는 말이다. 얼마나 신앙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나?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역점이며,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실수였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있느냐? 자격이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베드로는 겸손해졌다. ‘다른 사랍들보다 더 사랑합니다. 저 사람들은 버렸지만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주님과 저와의 관계 속에서 제 사랑만 주님께 고백한다. 때때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사랑을 애기할 때가 있다. 사랑은 나와 주님과의 1:1의 관계에서 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더라도;’라는 말은 필요없다. 신앙적인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앙적인 우월감이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기 쉽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신앙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주님을 섭섭하게 할 때가 반드시 온다. 바로 이것이 인간적인 약점이 될 수가 있다. 사랑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내 사랑을 주님 앞에 고백하면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신다.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는 사랑의 다섯가지 특성을 말한다. 첫째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전문가가 된다. 내가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나깨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둘째는 책임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이들에 대해서 책임을 많이 느낀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될까봐 늘 염려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큼 책임을 느낀다. 교회에 대해서도, 하나님애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만큼 교회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있다든지 이 일을 꼭 해야 하겠는데 힘든 문제가 올 때에 사랑하는 자만이 책임을 느끼고 그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다. 셋째는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하게 되면 순종하게 된다. 아주 어렵고 앞뒤가 맞지도 않는 말에 대해서도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사랑하면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넷째는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아래에 선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위에서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내가 아래에 서 있는 자세를 가지게 될 때에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행 20:35절에도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한 것도 많은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보면 그전까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순종했나? 물론 순종한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예수님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느꼈나? 이해할 것 같았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을 가진 것 같았지만 무관심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던 약점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고백해야 한다. 겸손해진 베드로의 사랑에 대해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던 일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 일에 대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나가서 양을 먹인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양은 사랑으로 먹이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에 양을 치고 양을 먹이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베드로의 사랑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교회에 열심히 출석한다. 모든 일을 잘 하지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예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후, 나아가서 열심히 전도하게 되고 마지막에 잡혀서 순교할 때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성령으로 감동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줄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극진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것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우리는 이것조차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이것조차도 하지 못하면서 주님을 ‘아가페한다’라고 말할 수 있나? 하긴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다. 왜냐면 자녀들이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그 영혼이 지옥에 가든 천국에 가든 관심이 없는 것을 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자녀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으니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겠나? 그렇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내 남편을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것만큼은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내가 내 자녀를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것만큼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이러한 진솔한 고백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기를 바란다 이보다 더 성숙한 성도는 이제 아가페의 사랑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이 사랑을 배워서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잘 감당하고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이 더 풍요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1998-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