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세계 / 렘 32:6-15, 고전 13:1-13
이제야 봄이 온 것 같다. 젊은이의 계절이기에 청년을 가리켜 청춘이라고 한다. 또한 봄은 꽃의 계절이다. 산과 들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벚꽃축제니 철쭉제니 경기 고양기에서 세계 꽃박람회가 곧 열릴 예정이다. 그래서 봄을 화춘이라고도 한다. 무엇보다도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그래서 봄에 결혼식이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사랑의 계절에 사랑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 고전 13장은 사도 바울이 쓴 사랑의 찬가이다. 많은 신학자들과 문학가들은 고전 13장을 ‘윤리의 보고’라고 극찬하고 있다. 신학자 하르낙은 ‘고전 13장은 바울의 기록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있고, 가장 심오한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은 고전 13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12장 마지막 부분에서 성령의 은사 곧 병고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면서 13장에 들어와 사랑을 말씀한다. 모든 은사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13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1-3절은 사랑의 중요성, 4-8절은 사랑의 특성, 9-13절은 사랑의 세계에 대하여 말씀한다.
먼저 1-3절 말씀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살펴 보자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람의 방언’이란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당시 유대는 다중언어 사회였다. 종교언어는 히브리어, 생활언어는 아람어, 문화와 상업용어는 헬라어, 법률과 정치언어는 라틴어였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어, 이집트어가 혼용되었다. 이러한 다중언어 사회에서 누구나 많은 외국어를 잘 구사할 줄 아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특히 땅끝까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사도들에게 그것은 더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외국어를 잘하고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천사의 말’이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수 있는 영적 언어를 말한다. 곧 기도의 언어이다. 아무리 기도를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에 증오와 미움이 가득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하나의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2절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2천년 전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가 아닌 신화시대에 살고 있었다. 모든 사술을 신비롭게 여기고 신화적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때 장래 일을 알려주는 예언술은 당대의 광장한 능력으로 보았다. 오늘날은 과학시대이므로, 과학기술이야말로 현대인의 능력이다. 미래학자인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현대과학기술의 대표적인 두가지는 컴퓨터와 핵무기라고 말했다. 컴퓨터의 발전은 세계를 단일 문화권으로 만들고 있고, 핵무기의 발전은 세계를 일순간에 파괴시키고도 남을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힌 과학기술에 인류애라는 사랑이 깃들어 있지 못하면 인류는 한순간에 가공할 범죄와 죽음의 공포에 놓이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전기에 보면 2차대전 때, 미국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원자탄이 제작되었을 때, 원자탄에 대한 미국 국회 비밀청문회가 열렸다. 아인슈타이이 증언하기를 ‘원자탄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미국의 과학기술이 성취하였지만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미국의 도덕과 종교가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과학기술도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해악이 된다.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역사상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던 정권이 독일의 나치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각료, 참모 85%가 대학 졸업자이고, 그중 절반 이상이 대학원을 마친 전문 지식이들이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르다. 지식인은 학식이나 기술을 갖춘 사람인데 비하여 지성인은 지식에다 인류애라는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유우 사회의 문제점은 대학을 마친 지식인은 많으나, 인류애를 갖춘 지성인은 드물다는데 있다. 모두들 이기적이다. 그래서 성서는 사랑의 덕을 갖추지 못한 지식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이 누구였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졌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로 당대의 지식이들이었다. 사랑의 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고하게 죽였다. 지식인이나 기술자는 내가 이만큼 많이 배웠고,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므로 내가 남보다 더 대우를 받고 살아야 하겠다는 이기심보다는, 가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가진 것을 통해 더욱 봉사해야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절하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은 믿음의 가장 성숙한 단계이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제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가장 위대한 것, 가장 높은 것, 가장 큰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 위에는 소망, 소망 위에는 사랑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성숙하지 못한 외형적인 믿음에 불과하다. 마 23장에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층을 꾸중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누구보다도 성전 예배에 열심이었고, 기도생활이나 율법공부 등 어느 면으로나 열심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요일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사랑이 있는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형적 신앙생활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속에 사랑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썩은 것과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이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의 품성이 자라는 것이다.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두가지 봉사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내 소유를 남을 구제하기 위이해 내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몸을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봉사인가? 칭찬받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봉사나 희생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한다. 본문의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아가페’라는 말을 썼다. 물질을 주고, 몸을 희생한다 하더라도 아가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신약성서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네가지가 나온다.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 가족간의 사랑을 스톨게, 우정이나 사회적 사랑은 필리아라 하는데 비해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에로스, 스톨게, 필리아의 공통점은 상대적인 사랑이다. 상대가 좋으니까 사랑하고, 상대가 잘해 주니까 사랑하고, 피치 못할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사랑하고, 내가 필요하니까 사랑한다. 상대가 좋지 않으면 사랑은 미움으로 변한다. 내게 손해될 듯하면 사랑이 식어진다. 이것은 다분히 나의 이해관계에 따른 사랑이다. 이런 사랑 때문에 남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내고, 몸을 희생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아가페가 없는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희미하다. 아가페가 있는 사랑만이 완전하고 영원하다. 아가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다. 상대가 좋고 나쁘건 간에 사랑하는 것이다. 때로는 주먹이라도 한 대 치고 싶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아픔을 동반하는 사랑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한의 사랑이다.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터득할 수 있다. 그래서 요일 4:10-11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멘.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영국의 존 퍼시트 목사는 1782년 봄 어느날 시골 웨인츠게이트의 작은 교회를 사임하고 런던의 큰 교회인 차터스레인 침레교회로 부임하기로 했다. 이삿짐을 마차에 싣고 떠나는데 배웅나온 가난한 농민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면서 섭섭한 표정들이었다. 마차가 고개 언덕을 넘는 순간 포시트 목사는 다시 동네로 되돌아가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가족은 여러분과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이날 밤 작사한 찬송이 221장으로 다음과 같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시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1절)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3절). 그후 35년간 이 마을에 살면서 160편의 찬송과 가정 기도서를 저술했다. 국왕 죠지3세도 그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여 친서를 보내기를 ‘퍼시트 목사, 귀하가 희망하는 것을 무엇이나 들어주고 싶으니 서슴지 말고 말해 주시오’라고 써서 보냈다. 이에 퍼시트 목사는 ‘지금도 저의 소원은 오직 웨인츠게이트 교우들과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라고 답신을 보냈다 한다. 왕의 총애보다 더 값진 것은 사랑을 나누는 생활이었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과 따스함이 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를 4절 이하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그래서 4절 첫머리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해 참는다는 것은 ‘감정을 자제할 줄 안다, 시비에 말려들지 앟는다, 마음을 느긋이 가진다’는 뜻이다. 한국인의 단점 중 하나는 성미가 급하다는 것이다. 무엇에나 서두른다. 사소한 일에도 얼굴을 잘 붉히고 큰소리를 친다. 우리 모두 참고 견디는 정신이 부족하다.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때 스탠턴은 ‘링컨은 저급하고 교활한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링컨은 대통령이 된 후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기용했다. 그는 남의 비난을 들을 줄 알고 참고 견딜 줄 알았다. 그후 링컨이 암살되아 장례식을 거행할 때, 스탠턴은 링컨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습니다. 그는 참고 견딤을 통해 승리한 자입니다’라고 통회하였다. 사도 바울은 롬 5:4절에서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라고 했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인격을 연단시킬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
2. 사랑은 온유하며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의 기도문 중에 ‘주님, 제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이 되지 말게 해주시고, 온유의 성품이 자라게 해 주옵소서’라는 말이 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은 마 11:28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한 마음이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부드럽게 대하고, 관심을 가지고, 포용하는 마음이다. 성미가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남의 허물을 잘 들추어 낸다. 그런데 비해 온유한 사람은 따스한 사람으로 남을 잘 이해하고 감싸준다. 잠 17: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남과 시비를 잘 걸거나 잘 다툰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남의 생각을 이해하거나 포용하려는 자세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매사에 독단적이다. 그래서 본문 5절에 온유의 성품을 가르치기를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가르치고 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남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기 것만 챙긴다. 남에 대해서는 베타적이다. 온유한 사람은 남의 슬픔도 기쁨도 같이 한다.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괴로워한다. 사랑은 이해와 관심을 나누는 것이다. 독일 수학자가 머리카락 수를 세어보았다. 사람마다 머리카락 수가 달랐다. 갈색, 검은색, 누런색 순으로 머리카락 수가 많았다. 머리카락 수는 평균 14만개 정도이다. 눅 12: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 사랑은 겸손하다.
4절하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마음이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이란 자기를 높이고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겸손보다는 교만을 더 가지고 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이 최초의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했다. 바울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빌 2:6-7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 때문에 타락의 씨앗이 된데 비해 예수님은 겸손을 통해 구원의 씨앗이 되었다. 겸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된다.
4.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과 진리는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해서 불의까지 용납해서는 안된다. 죄지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해야 하나, 죄악 자체는 끝까지 배격해야 한다. 그래서 시 85:10절에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진리편에 서서 사랑해야 한다. 해적선에 탄 선원이 동료에 대해 헌신적인 봉사나 사랑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은 해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먼저 해적선에서 내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 자신이 진리 편에 서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나 자신이 진리이신 예수님 편에 바로 설 때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다.
5.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8절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없어진다. 세상의 지식이나 직위나 불질은 일시적이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영원한 것처럼 사랑도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원불변한 것처럼 남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결과가 어떠하겠나? 본문에서는 우리가 사랑하게 될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모든 것이 온전해 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사랑할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사랑할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랑하며 살 때, 주님과 나 사이가 분명해 지고 더욱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 진다. 내 인격과 삶이 온전해 진다.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우리의 인격과 삶도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사랑을 키워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같이 옆에 있는 분과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3번씩 하자. (1997-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