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아이 / 한정숙
장성에서 제자가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침에 만보 걷기 시작하고, 그 아이를 보내고 나머지 만보를 채우리라. 운동 일기 간단히 올리고 오늘 자정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기필코 올리리라.’ 암튼 계획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제는 추석에 못 내려 온 큰아이가 점심 때 왔다가 밤에 가는 바람에 마음이 허전하여 잠이 늦게 들었다. 아침 운동도 역시 늦었다. 그래도 어제 내린 장대비가 운동장 모래밭을 맨발로 걷기 편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가볍게 오 천보를 넘겼다. 자칫 앞에서 걷는 여자 분의 실루엣이 그 때, 그녀처럼 커서 어? 했으나 아니었다. 한 달여 못 만났으니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본다.
몸과 마음이 퇴직 후 느긋한 생활에 길들여지는지 매사에 여유를 넘어 굼뜨기 일쑤다. 12시 약속을 맞추는 데 10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멋스러운 외출 준비가 아니라 동작과 동작 사이에 쉬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시어머님 살아 생전에 시누이 더러 “네 언니는 심성은 더할 수 없는데 손이 느려야.” 하며 안타까움을 내색하셨다고 한다.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 나이 든 지금에야 덧붙일 말이 없다.
서른이 된 그 아이를 7년 만에 만난다. 목포시 교감일 때 학교로 군복 입고 찾아 와서 교직원들이 신기한 듯 봤었다. 장성에 있는 군사학교 (육군 포병학교)에서 6개월간의 간부 교육을 받는 중이고 내년 대위 진급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반기부터 얼굴 보러 온다고 하면서도 교육이니, 평가니, 작전과 과제까지 발목을 잡는다고 투정하더니 퇴임 후에야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아파트 입구에 시간 맞춰 차를 댄 경호와는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보는 사이처럼 거리감 없이 서로 묻지도 않는 가족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목포에서 인기 많은 곳 – 나도 젊은 친구들을 만날 때면 가는 곳이다. 레스토랑과 빵집, 찻집이 한 울타리에 함께 있다. – ‘송자르트’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버섯 샐러드’를 경호는 ‘새우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다. 고기를 추천해도 살이 많이 쪘다며 한사코 마다한다. 사실 앉아서 교육 받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키 크고 잘 생겼는데 옷 매무새가 매끄럽지 않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느라 선생도 제자도 없었다.
17년 전 교육경력 20년차 시절, 영암 삼호서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이었을 때 8개월 정도 인연이 있었던 아이다. 옆 반 학생 이었다. 동급생 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행동거지가 반듯한 아이였다. 말씨도 거칠지 않았다. 그 아이는 1반이고 나는 2반 담임이었으므로 쉬는 시간이나 급식 시간에 자주 보았고 6학년 6개 반 선생님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아버지는 해군 사령부에 근무하시는 장교라고 했다. 경호는 그 해 10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을 했고, 이사를 고하러 오신 어머니는 일부러 내 반에 들러 고맙다는 인사와 예쁜 그릇을 선물하셨다. 아들에게 선생님 자랑 많이 들었다면서.
“기다리면서 내가 너에게 무슨 도움을 줬을까 생각했어. 칭찬은 많이 했겠지. 워낙이 모범생 이었으니까.”
“그때 선생님께서 반기문 유엔총장의 책을 선물하셨어요. 두 번이나 읽었어요. 너무 좋아서.”
<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이었을 것이다. 전학 간다고 미리 얘기해서 준비했었다.
“ 그래? 그러기도 했겠다. 워낙 네가 예뻤어야지. 하하.”
”그리고 딸이 있으면 너하고 결혼 시킬 텐데......, 하셨어요. “ 하며 싱긋 웃었다. 박 중위의 목소리는 군인답지 않게 조용했다.
“ 그러니 잊을 수가 없겠다야.” 흐흐
“ 그리고요. 10년 전 2014년에도 선생님 뵀어요.” 그 해 일반교사 마지막 1학기 때였나 보다. 얘기를 듣고 보니 제복을 입고 찾아왔던 것 같다. 서울에서 영암까지 내려오다니 참 대단한 학생이었다. 이젠 색이 바라는 기억을 조심해야겠다. 적자! 생존을 위해.
2007년, 그 때 13살 6학년 이었던 그 아인 서른이 되었고, 나는 그 배의 세월을 살아 낸 은퇴자이거니와 요즘 아이들과 선생님, 신병들 이야기로 순식간에 시간을 보냈다.
중위 연봉도 괜찮다며 한사코 식사비를 내 길래 나는 차를 사고 같이 방을 쓰는 장교랑 나눠 먹으라며 빵을 챙겨줬다. 사실 ‘송자르트’의 빵 맛은 소문이 났다. 기름기 흐르는 빵의 냄새는 또 어떠한가.
집 앞에서 내리는 나에게 ‘달팽이 화장품 세트’를 부끄러워하며 건넨다. 우리 둘째 아이가 군 복무할 때 나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군대 매점에서 취급하는 화장품이다. 나는 반색하며 다음엔 더 예뻐져서 만날 수 있겠다고 빈 장담을 늘어놓았다. 12월 파주 군부대 복귀 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차가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바라보았다.
마음 쓰는 양이 남다른 그 아이는 사람의 향기를 곱씹어보게 한다. 꽃과 같은 사물과 달리 사람의 향기는 그 사람이 없을 때, 떠난 후에 남겨지는 것이다 생각한다.
나만 점심시간을 맛나게 보낸 것이 미안하여 아파트 상가 커피 집에서 남편이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와 ‘쑥콩빵’ 하나를 샀다. 제자랑 같이 마신 커피나 싸서 보낸 빵 보다는 덜하지만 커피와 빵 냄새는 언제나 정답이다.
첫댓글 하하하, 저는 참 한결 같습니다. 제출 당일 날까지 전전 긍긍하다가 신데렐라가 신발을 놓칠 시각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칸트의 아침 산책 시간에 시계를 맞추던 사람들처럼 제 부끄러운 글은 새 날을 엽니다.
멀리서 찾아와준 제자와 뜻깊은 시간 보내셨군요.
달팽이 화장품 세트 부끄러워하며 건네는 군인
진한 사람 냄새가 납니다.
훌륭한 선생님의 그 제자 맞군요.
초등학생이 성인이 되어 스승님을 찾아뵙는 풍경
글이라도 참 보기 좋습니다.
권세도 재력도 없는 - 물론 가치 없는 것이지만- 선생들에게 제자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보물이랍니다. 그저 감사하지요. 하하
고맙습니다.
선배님은 오래 전부터 참 좋은 선생님이셨군요. 그 향기가 제게까지 전해집니다.
신데렐라가 신발 잃어버리고 집에 당도하고서도 한참 지나서 글 올리는 저도 있는 걸요. 하하.
그래서 저는 온전한 신발이 없나봐요. 크크
선생님의 향기가 진하게 전해져 오는 글입니다. 커피향까지요. 하하.
커피와 매번 절연하면서도 모른 척 가까이 하는 것은 그 왼수같은 향 때문이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매력에 빠질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황감합니다. 선생님 근무중이시죠? 저는 우아한 은퇴자 입니다. 이젠 가을 속으로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흐흐
배 아프지요?
'향기' 라는 주제로 글을 시작할 때와 달리 투박한 글을 마무리 하다 보니 향기와 냄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귀한 우리 말과 글 꼼꼼히 땨져보고 공부하며 사용하겠습니다.
옆 반 학생에게 책 선물도 하며 챙기신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하셨기에 지금껏 찾아 뵙겠지요. 보람 있으시겠습니다.
와, 옆반 제자와 그리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선생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제자들 문제에 있어선 제가 쫌 목에 깁스를 합니다만. 하하하
멀리서 제자가 잊지않고 찾아오는 복을 누리시는군요.
좋은 선생님이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