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3일에 한겨레신문 인터뷰 내용을 "조성택 교수에게 고함"으로 항의하자,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교수가 한번 만나는 인연을 갖자는 개인적인 메일과 함께 조계종포교원 연찬회에서 발표하였다며 보내온 불교평론 2006년 봄 호 권두언 내용입니다. 조성택 교수 자신은 다음부터는 말로하지 않고 글로만 하겠다는 말을 하였으나, 글로 쓴 불교평론 2006년 봄 호 권두언 내용 또한 아래 내용과 같이 말로 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불교와 불교성직자와 불교신도들을 능멸하였으며, 여러 회원님들의 요구가 있어서 그 내용을 공개 합니다! 밑줄 치거나 굵게 한 부분이 저의 의견과 다른 부분입니다. 저의 반론 내용은 함께 게재한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불교능멸발언 진상을 규명하라"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글을 올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아직도 조성택교수가 사과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성택교수가 끝까지 무반응으로 대응한다면, 조교수가 나에게 보낸 조교수의 일류대학교수로서는 너무나도 부족한 논문에 대한 반론과 개인적인 메일과 다른 분들의 비판내용 까지도 순차적으로 공개 할 것이며, 차원을 달리한 비판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불자들이 이 사실을 알 때 까지 조성택교수의 부당한 처사를 알린다는 사실을 미리 예고합니다!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가톨릭과 기독교가 생명윤리를 내세워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서양 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엄호사격과 함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전폭적 지원에 나섰던 한국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가 멈출 기미가 없다. 줄기세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외부세력 음모론’을 제기했던 불교계는 줄기세포 연구가 총체적 조작과 사기극으로 판명 났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고 외친다. ‘황우석 박사 지키기 재가불자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동산반야회 김재일 회장은 “황 박사의 연구 재개와 원천기술 재현을 위한 100억원 재단 설립 범국민운동본부 설립” 방침을 밝혔고, <법보신문>에 따르면 성금 기탁 의사를 밝힌 스님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의 내부 인사인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불교학 전공)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불교평론> 2006년 봄호 권두언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 중단”을 요구하며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겨레21>은 서울대 조사위의 발표에 대한 황 교수의 해명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인 1월12일 오후 조성택 교수를 만나 불교계 내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 이유를 물어봤다.
반론 방법 - 한겨례 신문에서 신승근 기자가 조성택 교수님에게 질문한 1~13 항목까지를 각항목별로, 조성택 교수님 발언의 밑줄 친 부분을 가, 나, 다, 순서로 구분하여 반론하였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시어서 본토론 제의의 진의를 파악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오탈자와 누락, 중복된 반론에 대하여 깊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토론이 시작되면 다시 중개하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신 분의 많은 교정을 바랍니다.
1. 2002년엔 나 혼자 황우석을 지지했다 곧 나올 <불교평론>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옹호 분위기,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황우석 지지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황우석씨에 대한 옹호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가톨릭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자신들의 종교적 생명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을 파악해 반대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는 유용성을 살리려는 나름의 노력의 결과로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가톨릭이 역사상 사회 문제에 관여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다. 하지만 불교계는 세속 문제에 대해 말하는 논리가 약하고 역사적 경험과 노하우도 적다. 근 현대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했다. 황우석 옹호는 종교 간 경쟁이 펼쳐진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 체제에서 불교계가 지닌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다.
반론 가. 한 종교의 교리와 그 종교가 사회문제에 관여하여 축적한 노하우가 반드시 동일하다고만은 할 수없습니다. 뒤에서 조성택 교수가 말하는바와 같이, 우리는 세계사적인 사실에서 여러 번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신론인 가톨릭은 100년 주기로 개최되는 공의회라는 공식기구가 있어서, 전례를 포함한 교리에 대한 자체검증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에서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이라는 큰 금액의 쾌척을 약속한 것은 조성택 교수님이 말하는 종교에서 가지는 가톨릭이 한국사회 문제에 대한 관여로 얻은 노하우와 같은 아주 작은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양 의학과 동양의학의 차이가 점점 좁아져 가고 있습니다만, 해부의학인 서양 의학적으로 줄기세포의 연구가 필요하기는 한데, 7항에서 말하는 내용과 같은 이유 등으로 인하여, 역사적인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체 줄기세포라는 가톨릭 나름대로의 유리한 교리적인 이론을 이미 도출하였으며, 이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변화되는 현상에 적응할려고 노력하는 가톨릭의 자체의 노력인 것이며, 그 근간이 바로 가톨릭의 교리인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은 교리의 자체 검증을 거쳤다고 생각함으로, 아무도 그런 사실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은 안하지만 오히려 역시 가톨릭 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하지만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닌 불교적 입장으로는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지만 토인비가 이단자라는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미래의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는 동양의 불교문화일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지금은 단두대행은 아니지만, 최소한 왕따 까지는 당할 줄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양의학 권에 속하는 불교문화는 비교적 정적인 정신문화에 가깝습니다. 마음 하나로 우주와 자기 자신을 찾으니까요. 따라서 새로운 과학의 출현이라 표현 할 수 있는 줄기세포에 대하여 종주국에서조차 불교 자체에서는 전혀 거론이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황우석 박사님과 같은 훌륭한 애국적인 과학자가 있어서 이번에 거론이 된 것이며, 그 현실에 대한 한국불교의 교리적인 정립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총무원장이신 지관 큰 스님꼐서 하시었습니다. 성직자인 한 스님으로서 이시거나, 대한불교조계종단의 총무원장 큰스님의 자격으로서 이거나,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변화를 매우 중요시하는 불교의 교리에 합당한 이론이며, 불교의 종주국에서도 아직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문화를 흡수한 불교만을 알고 있는 저로서도 총무원장이신 지관 큰스님께서 불교 교리에 대하여 매우 큰일을 하시려는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종교적인 큰 사업을 조성택 교수님은 세속문제에 노하우도 적고, 근 현대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하였으니 안 된다라는 뜻의 말을 하였습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번에 반드시 줄기세포에 대한 종교적인 입장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지관 총무원장 큰 스님의 말씀은 가장 합리적인 종교적인 입장임을 분명하게 먼저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조성택 교수님의 말은 뒤에 제가 말하는 내용들과 같이 소아병적인 가치관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나.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체제 라는게 무었입니까? 지구상에 종교의 원천이 그렇게 많습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보는 지구상의 종교의 원천은 조성택 교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종파와 이와 유사한 집합체가 많을 따름이지요. 크게는 유신론과 무신론과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종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보기로는 한국불교가 뒤에서 말씀드리는 역사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상당 기간동안을 선교와 교리발전 등의 내실화보다는 내부문제에 더 치중하여 생존 자체에만 급급 하는 우를 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저와 같이 새로운 불교신도 세력으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교리로 무장하고 개종 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불교로 개종한지가 일천한 제가 감히 조성택 교수님에게 불교 교리에 대하여 토론을 을 제기하게 된 것은, 불교 교리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실 생활에 대하여 큰 도움과 비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사실이 지금의 한국불교가 하고 있는 선교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줄기 세포연구에 관한 문제도 그러한 불교 자체의 변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조성택 교수님이 불교 공부를 할 때 보다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요? 그러함에도 "우리 뒤에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변화를 매우 중요시하는 불교의 기본이론을 심하게 모욕하고, 불교교리 알기를 등한시하는 조성택 교수님은 아직 ?n지 않았으니, 다른 과목을 전공하시는 것이, 불교와 조성택 교수님 자신을 위하여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강의 하시는 조성택 교수님 개인적인 자질 문제이지, 불교가 지닌 컴플렉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야를 넓혀서 보며, 불교신도들의 입장도 살펴보면서, 저의 반론에 대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다. 불교계 내부를 향하여 칼날을 세운 이유를 물었다는 질문을 하였는데, 이는 변화에 적응을 못 하는 조성택 교수님의 갈 길을 말한 것이지, 불교계에서는 조성택 교수님이 깨달음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지와 아만에 대하여 반응을 보일 가치가 없었으리라 봅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태풍의 핵심이 적막하고, 고요하듯, 조성택 교수님 스스로가 표현 한 것처럼 블랙홀이라고 느끼는 것이 사실 이라면, 지금 한국?け낫?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2. 구체적으로 어떤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인가.
=서구에서는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종교라며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황우석 감싸기는 한국 불교가 서양이 불교를 보는 이런 관점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우리 불교는 이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역할은 적다. 문화적으로 불교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근대 이후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고, 오히려 반사회적·반민주적·반민족적 행태를 보여 왔다. 이런 콤플렉스가 과학의 문제(황우석 사건)를 계기로 터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불교계의 호재였다. 무의식적으로 불교계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불교가 교리적 측면에서 이런 문제에 기독교보다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좋은 지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다루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일 수는 있지만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조성택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반론 가. 서구에서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말을 하니까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콤플렉스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줄기세포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 에서는 해부의학인 서양 의학상 필요에 의하여, 이미 이론적으로 교리정립을 가톨릭교리에 유리한 방향으로 하여 놓았으나, 동양이 원천지이어서 동양의학의 영향을 많이 받는 불교에서는 줄기세포에 대하여 불교종주국에서조차 아직 이론적인 정립이 되어있지 않았으며,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황우석 교수님의 줄기세포연구 현실화의 가시화로 인하여 줄기세포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정립하여야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한국불교가 새로운 과학 이론의 출현과 시대의 변화에 적응 할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고 저는 주장 합니다. 이런 큰일을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황우석 교수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조성택 교수님의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을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하여 종교로서는 새로운 교리의 정립을 반드시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불교학 교수로서 시야를 넓히기 바랍니다.
나. 종교의 사회에 대한 역할론에 대하여, 기독교가 한 역할에 비하여 불교의 역할이 적었고 오히려 반사회적, 반민주적, 반민족적형태를 보여 주었으며, 이런 콤플렉스를 황우석 교수님으로 인하여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고려이후 이조시대의 억불정책과, 일제 강점기의 고난을 겪었으며, 해방이후로는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계에서는 "법 란" 이라고 칭하는 또 다른 고난을 겪음으로, 어떤 학승들은 승복을 입고 다니시기가 매우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고 그 말씀을 하신 스님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후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한국불교계 스스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역사적인 국가의 불행에 속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반사회적, 반민주적이라는 말씀은 거기에 이유가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반민족적인 행태에 대하여서 그 내용이 일제 강점기의 일을 말한다면, 이는 조교수님의 소아병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반민족적인 행태는, 불교뿐만이 나니라 타 종교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종교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개성차이에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엄연한 세계 4대종교입니다. 한 스님이 외도라고 하여서 불교전체를 외도라고 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불교 교리를 너무 폄하 하시지 마십시오. 깨달음의 존재자체를 의심하는, 얼토당토 않는 조교수님의 즉흥적인 요구에 대하여, 이를 교리화 또는 전례화 하여 신도들에게 제시한다면, 이는 분명한 사이비종교 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불교가 사이비종교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 불교와 과학의 다루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호 보완적 일수는 있지만, 불교 자체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종교가 과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서 누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나 표현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감각(Sence), 지각(Perception), 느낌(Feeling), 인식(Recognigion), 표현(Expression), 소통(Communication), 변환(Transformation)등의 매우 다채롭게 일상적 사회생활을 통한 경험과, 수면 중의 꿈 등 비일상적 경험으로, 개인적으로 종교의 체험은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선 수행을 통하여 종교의 체험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의 어느 종교도 과학적인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에 있어서의 신의 존재는, 믿음으로서만이 인정이 가능한 것이지, 사실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입증이 되지 않아서, 가톨릭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믿지 않고서 유추해석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주의 생성 과정과, 인류의 발전과정들을 역사적인 사실들과 경전과를 비교함으로서 교리에 대하여 과학적인 접근이 타 종교에 비하여 용이하고, 그 부분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유추해석이 가능하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에 의하여 타 종교에 비하여 비교적 과학적이라는 발언들이, 조교수님이 알고 있는 유럽 학자들의 발언들이었던 것이지, 불교가 과학 그 자체이거나 과학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분명한 외도일 것입니다. 시야를 좀더 넓혀서 보시기 바랍니다.
3.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줄기세포 연구에서 서양 논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며 동양 논리를 강조했다. 과학적 연구에 유용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생명 개념 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하지 않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 다만 논의를 하되, 불교적 입장뿐 아니라 다른 세속적 사항, 과학과 윤리,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려를 생략한 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자기 입장을 먼저 개진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돌아가신 전임 총무원장 법장 스님도 (줄기세포 연구 지지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불교학계의 논의를 보면 찬반이 나뉘었다. 하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논외로 하고 이것이 가져다줄 요익중생, 즉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자비의 윤리가 더 크고 그게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이유였다. 반대 논리는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는 연장선에 있으므로 배아에 손대는 것은 ‘불살생’의 불교 윤리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불교학계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얘기한 2002년 <불교평론> 주최 생명윤리 세미나에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동국대 교수 등 나머지 분들은 전부 반대했다. 난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해 종교가 잘못 재단했듯 종교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문제는 다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찬성했다. 당시 동국대 김종욱 교수 등은 불교에서 생명은 연장의 개념이고, 배아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손대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난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더 깊이 연구해 2005년 춘계학술대회 때 반대자가 됐다. 그런데 2002년의 반대론자들은 이제 전부 찬성론으로 돌아섰다.
반론 가. 총무원장이신 지관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의 근원은 표현이 서양논리 라고 말씀을 하시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제내용은 유신론에 구애받지 말자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당연 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니니까요. 조성택 교수님 의견하고는 전혀 다르지요? 의학을 보더라도 같은 질병에 대하여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치료 방법이 다르지요? 그것은 질병에 대하여 접근하는 근원적인 방법이 다르기 때문 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신의 존재유무에 따라서 교리가 매우 상이하며, 신앙의 방법 또한 매우 상이하답니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서양논리라는 말씀을 하시었다 할지라는 그 내용은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불교의 교리를 말씀하시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주장한바와 같이 서양해부의학의 필요에 의하여 서양에서는 이미 줄기세포에 대한 교리가 가톨릭의 교리에 유리한 방향으로 성체세포라는 이름으로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일찌기 가톨릭에서 줄기세포를 새로운 과학으로 받아들인 것은, 과거 역사적으로 범하였던 수많은 과오를 재연하고 싶지 안 았으며, 이에 대한 사죄의 방법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동양이 발원지인 불교에서는 종주국에서도 아직 교리 상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은 동양의학의 논리의 특이성 때문이었을 것이며, 새로운 과학의 출현 자체가 없었음으로 인하여, 과오를 범하는 등의 교훈적 사건들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처음 출발한 줄기세포의 현실화에 대한 가시화에서 한국불교로서는 당연히 교리적인 정립을 하여야 하였다는 것이며, 불교신도인 황우석 교수님이 연구하심으로 불교 입장에서는 접근이 용이 하여서, 황우석 교수님이 연구를 계속하시기를 지원 하였으며, 또한 반드시 지원 하여야 하였으며, 그 정립을 한국불교가 먼저 하게 되어서 오히려 영광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인 것입니다.
나. 불교는 생명개념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 하지 않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가 가능하다는 표현에 대하여서는 너무나도 심한 말장난이며,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창조주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왜? 그런 엉터리 말로 한국지식인들을 지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하는지를 이해 할 수가 없군요! 또한 교수님께서 요익중생 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였는데, 대승불교의 중생제도를 표현 하는 듯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종교나 교리의 용어는 그 종교교리의 정식용어를 사용하여 주는 것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관례상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종교적인 교리상의단어를 조작하지 마십시요! 조계종을 비판하면서는 조계종 용어를 사용하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만 되어도 불교는 파리까지도 생명이 있다하여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중생으로 여기므로, 그만큼 지계의 범위도 넓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만큼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과학에 대하여 불교의 근원지인 동양적인 가치관으로 줄기세포에 대한 교리의 정립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교수님이 가톨릭의 코페르니쿠스의 치죄를 언급 하였듯이, 가톨릭은 오랜 세월동안을 신학과 교회(혹은 철학과 종교)로 나뉘어서 연구를 하였으며, 그 결과를 100년 주기마다 개최되는 공의회라는 공식 기구를 통하여 자체검증을 하였던 가톨릭도, 지구는 돈다는 과학적인 새로운 이론을 제기한 코페르니쿠스를 단두대에서 목을 자르는 실수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불교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하여, 지금 그 정립을 시작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불행으로 인한 불교의 수난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는 촌스럽다, 미숙하다, 반사회적이다, 반민주적이다, 반민족적이다, 생명개념자체를 중요시 않는다는 등의 얼토당토아니한 불교 폄하발언 뿐만이 아니라, 생명개념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 하지 않는다며, 교리자체를 조작함으로 불교 신도들을 매우 심하게 모욕하면서 모든 불교 신자들을 정신 이상자로 만들고 있으며, 조계종단을 공격하면서 조계종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요익중생이라는 괴상한 용어를 사용함으로, 마치 불교를 많이 알고 있는 교수님 같은 발언으로, 많은 한국의 지성인들과 불교 신도들을 혼란으로 빠뜨렸으며, 한국불교를 의식적으로 매우 심하게 폄하하고, 신도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모욕하는 목적이 무었인지 모르겠군요. 과연 블랙홀 이어서,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만 생각하십니까? 블랙홀이 사실이라면 한국불교가 지금 살아있다는 증거 일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수님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음으로, 저와의 토론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의 불교와 다른 종교의 교리비교, 각 종교가 교리를 정립 하는 방법, 각 종교의 종파, 각 종교의 제도, 각 종교의 운영 실태, 각 종교의 우리나라 사회에 대한 기여도에 대하여, 토론을 하여주실 것을 공개적으로 제의 합니다.
4. 전두환 보호와 황우석 보호의 차이 왜 그런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난 법장 스님의 원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우석이 불교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정말 모르겠다. 그게 이상했다. 또 지금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불교계가 기독교와 달리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면 그 연구를 지원해야지, 왜 특정 연구자를 지원하냐는 것이다. 그건 황우석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황씨 자신도 항상 염주를 두르고 다니지만, 불교계도 황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첨단과학에 종사하는 국민적 영웅인 황우석씨가 “나는 불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교인에게는 상당한 자긍심을 주었다. 그게 (황우석 지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거기에 법장 스님, 지관 스님 등 조계종 총무원장이 앞장선 것인데, 문제 있는 태도다. 가톨릭 주교나 추기경이 거느린 스태프의 전문성은 대단하다. 반면 조계종 총무원장이 갖는 전문성은 대단히 미약하다. 교육 과정에서 차이가 나고 신부들은 재가자(속세에 머문 교인)와 연대가 밀접한 데 반해, 조계종은 재가자의 개입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 한다. 불교계가 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노하우도 적다 보니 대응이 미숙하고, 이번 (황우석 교수 파문) 같은 현안에 대한 발언도 상당히 촌스럽다. 불교계가 최근 세사에서 일반 정서와 달리 행동한 게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번 경우도 흡사하다. 그런데 전두환 보호는 사실 종교의 역할이다. 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전두환을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정치 논리를 넘어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황우석 감싸기보다는 더 나은 사건이었다.
반론 가. 황우석 교수님이 불교신도가 아니셨다면 정말로 그랬을까? 라는 의심은 너무나도 비종교적이고,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불교교리의 정립과정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보기 바랍니다. 서양종교 동양종교로 생각하지 말고, 유신론과 무신론과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종교로 분류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의 말씀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는 황우석 교수님 개인으로 인하여 교리를 정립할 수 있는 변화의 시기를 확인한 것이며, 다행이 황우석 교수님이 불교신도 이어서 불교 측에서는 접근하기가 용이 하였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가톨릭 등 세계사적으로도 그러하여 왔으며, 아무도 그런 사실을 탓할 수가 없음은, 한국의 가톨릭도 자체적으로 유리한 방법으로 하고 있으니까 누가 연구를 하느냐는 사실만을 가지고는 시비까지는 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조성택 교수님은 오해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황우석 교수님이 불교의 교리를 확립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연구 하시어서, 2002년 월드컵이후로 대한민국의 브랜드가 눈에 보이게 업그레이드되었듯이, 다시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상승 시킬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를 쌓아 우리의 자손들이 "확실한 양질의 삶"을 누릴수 있게 되기를 기원 합니다.
나. 저도 염주를 두르고 다니지만, 제가 사용하고 있는 염주는 세 가지 입니다. 목에 두르는 염주와, 손에 들고 다니는 염주, 손목에 차고 다니는 염주인데, 영등포구신길7동 영길교회 라는 교회인근에 살고 있는데, 하루는 제가 없는 동안에 방에까지 무단 침입한 누군가가, 두고나간 손 염주는 줄을 끊어 버리고, 손목염주는 알을 깨어 버리는 일까지 당 하였으며, 경찰에 다른 여러 가지 사실들과 함께 이 사실을 신고 하였으나,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을 정도 입니다. 염주를 두르고 다니는 것은 불교학 교수인 조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죄가 아닙니다. 누구 보기 좋으라고 차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저는 다만 다른 사람은 평생에 한번당할까 말까 하는 불행을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부족할 정도로 많이 겪은 가슴속 깊은 상처 때문에 불교로 개종까지 하여서, 스스로의 신앙을 항상 확인하고, 예배함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함인데, 저의 주변에는 조성택 교수님처럼 그런 사실을 되 세기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러나 그런 부류의 대부분은 지성이 덜 갖춘 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다. 가톨릭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은 임기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간 같은 직책(추기경님과 주교님들을 감히 비교하는 것은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에 임하시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불교에서의 그 임기는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는 조금 짧은 듯 합니다. 거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완벽한 성직자이시니 유별나게 많은 지식인들의 조언을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한국불교의 웃어른이신 법전 종정성하와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의 재가신도와의 연대가 제한되었다고 하시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자기들끼리 한다는 말도 지나친 관여이고, 모욕입니다. 행여 일류대학에 재직 중이신 조성택 교수님을 빼고 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니지 생각하여보기 바랍니다. 블랙홀이 사실이라면 한국 불교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커다란 태풍일수록 그 중심은 항상 더 고요하고 더 적막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여 보지 않아서 모르는군요! 조성택 교수님은 재가자라는 발언만 하였지 재가신도라는 발언은 한번도하지 안하였습니다. 아무리 깨달은 분이라 하실지라도 대한민국 국민모두를 껴 안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커다란 태풍이 자나가는 사실조차 모르는 태풍의 핵심에 들어있는 사람인, 블랙홀에 들어있는 사람은 더더구나 더 그러하리라 봅니다. 또한 저로서는 지금과 같은 추세로 10년만 더 노력하여간다면, 한국불교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리라 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하여도 많은 관찰을 하여보기 바랍니다. 가톨릭이 철학과 종교(혹은 신학과 교회)로 분류되어 그 맥을 이어왔듯이 불교도 나름대로 각 나라마다 특징을 가지고 그 맥을 이어 왔음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라. 조교수님 같이 아만으로 꽉 찬 사람이, 불교계가 어떤 전문성이부족하고, 어떤 역사적인 노하우가 적고, 어떤 대응이 미숙하고, 황우석 교수님의 일에 대하여 어떤 촌스런 발언이 있었는지, 분명한 말씀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반드시 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막연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해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마. 같은 불교신자 이시지만, 황우석 교수님이 하시는 줄기세포 관련은 불교 종주국에서 보다도, 대한민국 에서 처음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의한 시대의 변화에 대한 불교 교리의 정립 절차이고, 전두환 전임 대통령님의 백담사 거주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용서와 화해라는 당시의 국민정서와 통치자의 뜻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며, 무었 보다도 중요한 것은 2002월드컵을 유치하신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지내신분 임으로 국가의 성장도 등을 고려하고, 큰 의미의 국가관으로, 불교 신자이신 전임 대통령에 대하여, 불교에서 그 정도의 예우는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불교계의 판단과 국민정서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황우석 교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한 개인이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젼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목이 쉬어라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그 꿈이 이루어져서 우리는 월드컵사상 처음으로 4강이라는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가 급상승함으로 우리국민들의 자존심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음을 우리국민 모두는 확인하고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내용은 확실하게 우리국민들에게 꿈을 안겨 주었습니다. 또한 그 가능성도 확인을 하였습니다.
지금 그 꿈은 조성택 교수님의 말씀처럼 무분별하다는 과학자 황우석 교수님을 감싸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은 앞서가는 실수를 범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조성택 교수님 같은 자들이 황우석 교수님을 범죄인처럼 만든 이후로도, 외국 언론에서는 특허가 가능 할 수도 있다는 보도를 하였으며, 한국은 자살골을 넣었다는 보도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저의생각으로는 그 가능성이 있는 특허도 받아내서 국민들에게 실익이 있게 하자는 것이며, 그 연구를 불교신도이신 황우석 교수님이 계속 하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한 불교교리의 재정립이라는 대한민국불교의 변화하는 모습이라고 저는 다시 한번 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줄기세포 연구는 불교입장에서는 불교신도이신 황우석 교수님이 계속 하시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는 있어도, 정치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전두환 전임 대통령님의 문제와는 다르다는 것이 본질인 것입니다.
5. 전두환을 받아들인 것보다 황우석을 두둔하고 감싸는 게 훨씬 나쁜 행동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황우석은 사실의 문제였다. 모든 사실이 종결된 다음에 과학자가 아니라 인간 황우석을 불교계가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모르겠는데, 과학이라는 사실의 문제, 이미 조작이라고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자꾸 감싸는 것은 문제가 있다. 좋게 보면 우직하고 의리파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불교계가 그렇게 무분별하게 과학자 황우석을 감싸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건 아니다.
반론 가. 조성택 교수님 답답합니다. 어느 누구 이던지 간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님과 황우석 교수님은 비교할 수가 없으며, 비교 하여서도 안 된다고 말 할 것입니다. 과학적인 사실을 정치적인 사실과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촌스러운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직하고 의리문제로 종교를 바라보신다니 참으로 답답하군요. 너무나도 소아병적인 종교관 이십니다. 종교는 어떤 판단에 있어서 시간이 필요함으로 우직하다는 표현은 할 수가 있을지 모르나, 의리문제로는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우직한 표현 입니다. 황우석 교수님 본인은 조작이라는 말씀을 한번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줄기세포 재연으로 사실을 입증하고 싶다고 하시었습니다. 불교교리의 중요한 변화의 길목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꿈의 실현을 안겨 줄 수도 있는 길목에서, 후손들에게 번영을 안겨줄 수도 있는 희망적인 현실에 대하여, 불교는 당연히 주장을 하여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조성택 교수님과 같이 무조건 반대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양식이 있는 애국국민이나, 종교단체, 회사, 특히나 불교에서는 황우석 교수님을 지원하여서 연구를 계속 하시게 하는 일이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한 불교교리정립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정부로서도 국가 브랜드가 업그레이드되고, 후손들에게 번영을 보장 할 수 있는, 엄청난 부가이익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과감하게 추진을 하여야 할 것이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하고 있으니, 불교에서 당연히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앞서 말하였고, 뒤에서 말 하는 것과 같이, 어떻게 이런 큰일을 우직하고 의리파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일 인양 표현함으로, 불교를 폄하 할 수가 있습니까? 너무하십니다. 그 정도의 이론은 중학교 3학년도 표현 할 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저의 학창시절에는 대학에서 영어 표현을 모두 할 수 있으면 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학교 3학년이면 영어로 모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 한의사를 하고 있는 제 딸은 중학교 3학년 때 English Speaking을 master하였습니다. 우주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에 거스르지 마시고, 순응하시기 바랍니다.
나. 당시로서는 통치자의 생각과 국민정서와 선진국으로 향하는 안정된 대한민국이라는 대의적인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전두환 전임 대통령님을 받아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은 이미 현실적으로 검증을 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황우석 교수님은 현재 진행 중이며,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조금 앞서가는 실수는 하였으나, 외국 언론에서는 자살골을 넣었다, 특허는 가능 할 수도 있다는 등의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조교수님 개인의 일 같으면 지금 그런 연구를 포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용이라는 것은 투자에 불과 합니다. 충분한 이익이 보장되는 일에 대하여, 그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여서,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하여서 포기하는 것은 졸장부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 까지 꿈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그 꿈이 이루어질 것 이다. 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불교교리인 윤회에서 다시 인간으로 환생이 가능하리라고 확신 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비젼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6. 그럼에도 지관 스님이 황우석을 옹호하는 태도를 바꿨다는 기미는 없다. 혹시 불교계 전반이 황우석 옹호에 공감한 것 아닌가.
=불교계의 말없는 다수는 오히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찬반이 쪼개진 상황에서 이미 돌팔매 맞고 있는 사람에게 돌 하나 더 던질 수 없어 침묵할 뿐이다.
반론 교수님의 말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하겠습니다만, 저의 좁은 소견으로서는 말없는 다수의 의견은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결과가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며, 외국 언론의 보도로는 특허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하여주고, 줄기세포 재연까지는, 국가에서 지원하여 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우세함을 어느 개인택시 기사님이 자기가 알아본 여론조사 결과라며 저에게 귀뜸 하여 준바가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상승세를 타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지와 우리 국민들의 자존심이 업그레이드되는 기회가 상실되고,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상당수준 상승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함으로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다수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교수님이 말하는 불교계의 말없는 다수중의 몇 분 스님들의 명단이 이미 언론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하여 불교계의 다수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큰 오산임을 알기 바랍니다. 한국역사의 불행으로 인하여 불교계는 오랜 세월동안 그 할일을 다하지 못 한 사실들을 그분들은 망각한 것이며, 그 기간동안에 불교계가 받았던 큰 상처를 조교수님이 지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계는 하여야할 일이 다른 종교에 비하여 너무나도 많습니다. 조교수님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너무나도 안하무인격 입니다. 우리 서로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물론 ?틈事슴? 대하여는 제가 조금은 앞선듯합니다만, 토론 시에는 저처럼 조금은 점잔을 떨면서 공격을 하도록 하지요?
=말이 안 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도 하나의 단체고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공익적 연구에 민간기업의 돈이 투여되는 것을 우려한다. 100억원의 모금 주장은 황우석과 친한 특정 단체나 기업에서 황우석에게 100억원을 주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또 황우석의 연구 결과가 정말로 요익중생을 실현할 정도인가. 갈 길이 엄청나게 먼데, 100억원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100억원 지원설은 그간의 지원을 볼 때 불교계의 스타 만들기 차원이지 진정으로 국익이나 요익중생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관 스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서양 윤리라고 무조건 황우석 연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체 줄기세포 연구 지원이라는 나름의 대안도 내놓았고, 개신교의 어른인 강원룡 목사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입장을 제기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배아가 생명이라고 해서 당장 연구 성과가 나오는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불교계도 그렇게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우린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공격받는 황우석 교수를 엄호사격하며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지난해 12월10일 병원에 입원한 황 교수를 방문한 지관 스님. (사진/ 연합)
반론 가. 불교계에서 황우석 교수님에게 원천기술 재연의 기회를 주자며 100억원의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저는 조성택 교수님과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도, 한 개인도 비젼이 있어야하며, 그 비젼의 실천 가능성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불교도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주장입니다. 다른 종교의 유신론이 신의존재 자체의 입증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하여, 불교교리에 대하여는 유추해석을 할수 있다는 사실의 입증이라는, 커다란 불교 교리적인 의미와,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키워줄 수 있는 가능성과, 국민들의 다수에게 대량의 지속적인 경제적 이익을 키워 줄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소 출혈이 되더라도 미래의 후손들의 번영을 위하여 국가 기관이던지, 종교단체이던지, 회사이던지, 개인 이던지 간에 투자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 꿈이 실현 되도록 투자하고,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더 더구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그 노력이 바로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며, 교수님이 말하는 요익중생을 위함이며, 대승불교에서 요구하는 중생제도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더 큰 차원의 국익을 위한 일이며, 가장 올바른 판단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사회는 공익적 연구에 민간 기업의 돈이 들어가는 것을 우려 한다고 말한 사실은 대학교수의 발언으로서는 너무나도 소아병적인 황당한 착상이라고 주장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두 번이나 하여서 대단한 성공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세계 모든 나라들로부터 엄청난 부러움을 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지난 금 모으기 운동에 조성택 교수님은 참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황당한 착상이 나 올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와 같이 유추해석이 가능한 불교교리이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불교를 과학과 가깝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나. 100억원은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톨릭 에서는 이미 그 모금의 실행에 들어갔다는 보도에 접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의 출현이라고 여기는 줄기세포를 성체세포라는 가톨릭 교리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실현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있다고 봅니다. 조교수님이 가톨릭은 유용성을 살리려고 지원하였다고 매우협소한 길을 말 하였지만, 그길 또한 엄청나게 멀고도 멀기만 합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500여년 동안을 변화에 적응하여 왔는데, 단 몇 년의 변화에는 당연히 적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교리정립을 위하여 지원하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조교수님은 불교계의 스타 만들기 차원이다, 진정으로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요익중생(요익중생이라는 단어가 어데서 나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승불교의 중생제도라는 말로 해석하였음=교리의 중추단어는 공식외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은 세계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공통된 관례임을 참고 하기 바랍니다)차원이 아니다, 라는 등으로 말로서 불교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황당하여 글로서 표현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일은 스타 만들기가 아니라, 불교에서 반드시 성취하여야할 인류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한 불교교리 정립의 과제이며, 유신론과 서양 해부의학을 의학적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교리가 성체줄기세포로 정립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범불교적인 교리정립이라는 큰일을 대한민국에서 정립할 수 있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여 주시었으면 좋겠습니다.
다. 조성택 교수님은 개신교의 어른인 강원룡 목사님께서는 배아줄기 세포연구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수님은 가톨릭과 개신교와 불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어떤 종교 입니까? 교수님의 주장의 교리대로 해석을 한다면,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개신교 교리가 촌스럽고, 설득력이 없고, 이단 집단으로 여기려고 할 것입니다(현실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개신교의 교리와 가톨릭의 교리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한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서 가톨릭 에서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신학과 교회(또는 철학과 종교)로 분류되어 많은 연구를 하여 왔으며, 그 결과를100년 주기로 개최되는 공의회라는 공식 기구를 통하여 전례화 하였기 때문에, 교리를 자체검증과정을 거쳤다고 말 할 수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하여 조교수님이 말하는 서양의학에서 연구한 성체줄기세포와 배아 줄기세포의 구분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성체줄기세포로 교리상의 정립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아무도 그 이론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 하지 않는 것은 가톨릭의 자체 검증이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라. 그러나 불교와 개신교의 입장은 다릅니다. 개신교는 역사도 일천할 뿐만이 아니라, 교리를 연구하는 기관이 있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지만, 교리자체가 한 시대의 사류에 의한 필연성이라는 명분 하에 상당한 자체 연구기간과, 자체 검증과정 없이 조교수님이 말하는, 그야말로 불노소득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개신교 교리인 것이며, 특히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의 개신교보다도 그 종파가 많이 있으며, 이는 개신교 자체의 내부문제 일뿐임에도, 종파 상호간의 분쟁으로 인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현실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사회지도계층에 속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군대에 안 간다는 이유로 교도소 공부를 먼저 시킴으로서, 우리나라 사회기반의 분위기를 열악한 방향으로 악순환 되도록 유도 하고 있으며, 종파 상호간, 국민과 국민 간, 그리고 국가기관 간에 분란을 일으켜서 건강한 사회보다는 혼돈과 혼란스런 사회로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타 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신교 내부의 문제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개신교 교리내부에 심각한 많은 문제와 갈등이 내제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전례상의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무나도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자만심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음에도,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과는 달리, 타종교 신도들을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타종교 신도들이 개신교 신자들을 측은하게 까지 바라볼 정도입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분명히 다릅니다. 줄기세포연구 등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하여도 개신교는 아직 아무런 이론적인 정립의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끌어 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가만히 있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마.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가톨릭과 개신교와는 교리적 측면에서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불교교리는 이조 500년의 억불시대와 일제 36년의 강점기라는 불교자체의 내부문제가 아닌 타의에 의한 수난기를 겪었으며, 해방 이후로는, 혹자는 재산 싸움을 하였다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법 란" 이라는 어려운 역사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교세의 확장이나, 교리의 검증 보다는, 생존자체에 많은 중심을 두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는 매우 다른 환경에 처해 있으며, 수많은 학승들이 이러한 역사적인 과오를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그 스님들은 자기들의 저서를 통하여 그러한 부끄러운 사실들을 사과 하였으며, 이의 시정을 위하여 보조국사와 뜻을 같이 하였던 스님들이 결성하였던 정혜결사와 비슷한 단체인 "신 정혜결사" 라는 조직을 결성하는 등의 부단한 노력을 한 결과로, 조계종단에서도 교리적인 자체검증을 위한 노력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각 종단은 종단 나름대로 다방면의 통합노력을 기울이고 선교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로, 저와 같이 교리로 무장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불교신도 세력들이 불교를 빠르게 알 수 있게 되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신도세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미래에는 더 많은 변화가 자체 연구결과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런 차원에서 받아 드리고 있으며, 이는 불교가 스스로 정화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는 노력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 봅니다.
8. 지율의 위험한 독선주의와 폭력 불교계에서는 그런 비판적 의견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말없는 다수가 있다. 지관 스님이 얘기한 것에 대해 동국대 교수 등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현안 분석과 전문가적 안목이 필요한데, 그런 싱크탱크도 없이 그냥 총무원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발언을 막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다. 불교도 세속 문제에 전문가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전문성 없이 자꾸 불교적 논리만 갖다대니 항상 각론에서 논리가 달리고 밀리는 것이다.
반론 정치도 아닌 종교적 가치관에서 싱크 탱크의 중요성이 과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판단으로는 종교에서의 진실성, 진리성은 그 비중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돌팔매 맞고 있는 사람에게 돌 하나 더 던지지 못하여 침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조교수님과 같이 불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단자랄지, 혹은 목소리만 큰사람 이라고 표현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만, 언론에서 발언권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산반야회 관계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었다면, 최소한 조교수님 정도의 무자비한 자만의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대한 불교교리의 진리성에 대한 입증을 하기위하여 노력하는 자세로, 줄기세포는 반드시 황우석 교수님에 의하여 재연 되어야 하고, 그와 함께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개성이 들어나는 막하는 말씀이 아닌, 성직자 본연의 위치에서 정직하게 진실을 진실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드리자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불교 교리정립을 주장 하신 것이었으며, 이의 재연으로 검증을 하자는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직자로서 당연히 주장 할 수 있으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는 저의 주장입니다. 교리에 대하여만은 최소한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께서 조성택 불교학과 교수님보다는 깊이가 더 있으시리라고 저는 교수님의 글을 통하여 확신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며, 고려대학교 사이트를 통한 토론을 다시 한번 제의 합니다.
9. 어떻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가.
=출가자와 재가자가 좀더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출가자만의 집단,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 깨달음만 추구하는 조계종 중심의 출가자 집단이 아니라 일반 불교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치·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거의 무임 승차해왔다. 만해 한용운의 경우도 조계종단에서는 결코 띄우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결혼도 했고, 대처를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 정치·사상·문학에서 드문 스타고 그를 통해 불교가 가지는 사회적 이미지도 좋아지기 때문에 못 놓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자꾸 황우석씨를 붙잡아두려는 것 같다.
반론 가. 가톨릭에서는 신부님과 수사님이라는 칭호로 구분되는 성직자가 있습니다. 두 분야 모두가 성직자이긴 합니다만, 신학과 교회(혹은 철학과 종교)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불교에도 출가하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의 전파 경로에 따라 나라마다 그 표현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불교에도 그런 구분이 존재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구분이 조금은 애매하긴 하지만, 존재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위 말하는 학승이라는 칭호가 그래서 생겨난 것이며, 그런 스님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저는 스스로를 다시 발견함으로, 불교로의 개종에 속도를 가하였던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재가신도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제가 불교 안에서 무었을 하여야 할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지금까지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교수님께서는 욕심이 너무나 많던지, 아니면 대승적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조계종 중심의 출가자뿐만이 아니라, 신, 해, 오, 수, 증, 화의 과정에서 모든 중생이 추구하여야할 근본과정인 것입니다. 또한 일반 신도들의 역할은 각 사찰별로 신도회가 있고, 중앙 불교신도회가 있습니다. 두 단체 중 한 단체만 열심히 나다니면, 얼마든지 인터넷이나 모임 시에 발언할 기회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인터넷 단체의 모임에 참석하여서 발언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 또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며, 현직시에는 어느 분야에 대하여서는 대한민국최고의 기술수준에 있다고 자부를 하였던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불교신도이시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불교를 막가게 폄하 하시면 새로운 불교신도세력들의 엄청난 반격을 받을 것이며, 저도 지금처럼 점잔한 말로만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정중하게 충고 합니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조계종에 대한 무지한 언급은 삼가 하여 주시기 바라며, 불교종파간의 이간질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나. 출가자만의 집단과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가톨릭에서는 출가자만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 혹은 수녀원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출가자만의 집단인 것입니다. 그들의 가톨릭 안에서의 역할이 매우 크며, 세계역사에 공헌공로가 매우 크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도 가능하다면 별도의 출가자만의집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른 종교에 있을 때 저는 불교신도들은 무식하고, 미신만을 숭배하는 집단쯤으로 여겼습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그 심오한 진리가 아무리 공부하여도 가슴에 꽉 차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기본적인 서적에 매달렸으며, 그러는 가운데 불교 경전을 근본적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정신적인 배경이 형성 되었으며, 삼귀의라는 말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는 법회입니다. 그 법회시마다 우리는 삼귀의라는 기도문을 독송합니다. 한문으로 표현하면 귀의불양족존, 귀의법이욕존, 귀의승중욕존 이며, 우리말로하면 거룩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교리에 의하여 법회 시에는 스님들이 사자좌에 앉아서 법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뒷사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불교의 핵심교리이며, 방법은 다르지만 이런 전례는 어느 종교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성택 교수님은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이래로 맥을 이어온 전통을 거부하는 이단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며, 이런 자는 불교계안에서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불교는 무임승차 해 왔다는 말에 대하여는 불교계가 해방 후의 시대적 과오를 범하였음을 이미 많은 훌륭하신 스님들이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로서 지금처럼 변화를 수용함으로서 커다란 획을 그었으나, 교수님처럼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 신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불교신도들을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신도와 구태의연함을 주장하는 구 신도로 분류 할 수 있다면, 교수님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신도 그룹에 속하거나, 출가자 우위를 부정하는 이단자라는 것이지요. 교수님이 만약 불교 신도 라면, 이부분이 교수님의 훌륭한 지식을 오류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 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충분히 토론이 가능한 제목이라고 생각 합니다. 토론 시 많은 자료가 필요하리라 믿습니다.
라. 만해 한용운 스님은 선생이라고 불리우 시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그분의 이미지에 대하여는 대한민국의 지식인 이라면 거의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을 어떻게 조계종에서 놓는다, 못 놓는다는 표현으로 비판 할 수가 있습니까? 놓으면 다른 종파에서 가져갑니까? 또한 그분은 불교의 종파가 지금처럼 구분되기 전의 승려이시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파가 나누어지기 전의 훌륭하신 분에 대하여서는 어느 종파에서도 그분의 업적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평가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인 관례인 것이며, 아무도 그런 사실에 대하여 비판할 수가 없으리라 봅니다. 종파 간에 이간질을 하지 마십시요! 그런 사실을 비판 한다는 사실 자체가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연구를 많이 하시어서 좀더 긍정적이고 수용할 수 있는 비판을 하시기 바랍니다.
10. 지율 스님의 계속되는 단식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환경 문제는 사실의 문제다. 얼마나 훼손하는지, 개발하지 않는다고 다 보호되는지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간과한 채 자기 가치관의 심증적인 문제만 갖고 덤벼드는 게 있다. 환경과 과학 문제는 한국 불교계가 먼저 선점했다고 자부하는 분야다. 환경 문제는 더욱 그렇다. 환경이 근대화 이후에 빚어진 여러 문제를 다룬 것인 만큼 전통 종교들이 거기에 목소리 낼 지분이 있다. 실제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 지율의 단식 등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숨 건 단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대중과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또 환경단체와 달리 종교인의 환경운동은 다른 지점이 있어야 한다. 새만금 사건 때 당진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했는데, 종교인은 내 뜻을 이루겠다고 이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삼보일배도 내 뜻을 이루는 게 목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신까지 부정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수행 과정이라야 한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환경운동가들의 시위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부분이 전혀 구분 없이 이뤄지고,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한 일이 없고 사회적 지분이 없다고 하는 나름의 자책감,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론 가. 저는 환경론자는 아닙니다. 지율스님이 처음단식을 하실 때만 해도, 여러 비구니 스님들이 함께 수행을 위한 기거를 하신다면 개인적인 그런 행동이 어느 정도 자제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까지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까지 지율스님을 찾아가시어서 한 비구니 스님의 단식의 중단을 권유한 사실에 대하여 우리나라 인권의 수준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부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그분이 측은한 느낌까지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중도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글을 쓰는 이 시간(2006.1.30.오전)에 지율스님의 건강이 회복가능하다는 뉴스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그분이 순진하다는 생각까지는 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교리에 충실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행동은 지계인 것이며, 아무도 그분을 탓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종교를 가진 신앙인이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는 불문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무총리님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서 찾아가시었을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와 지율스님의 단식과는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율 스님의 경우에는 불교 계율의 실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황우석 교수님의 경우는 부처님시대에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변화를 중요시하는 불교 교리적으로 새로운 과학의 출현, 즉 줄기세포라는 현대의학의 변화에 따라 교리의 정립이 필요 하였을 것이며, 동양의학을 중요시하는 불교문화의 특성상 가톨릭과는 달리, 아직 줄기세포에 대한 교리적 측면의 이론적인 정립이 불교 종주국에서조차 없었음으로, 대한민국 불교에서 이를 정립 할 수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현실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교리의 정립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또한 불교 성직자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 큰 업적을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같다고 말씀 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조성택 교수님은 모든 불자들에게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우석 교수님문제는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불교 입장에서는 반드시 황우석 교수님을 지원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 교리를 정립하는 데는 불교 신도가 더 용이 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의학도 지금은 머리에다 젓가락만큼 커다란 침을 놓는 한의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과학은 아닙니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의 탄생은 종교에서는 새로운 교리의 정립을 필요로 함은 정통종교의 기본 이라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 단두대 사건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가톨릭보다 그 시기가 ?n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 4대종교에 속하는 불교를 너무 속되고 저속한 정치적인 불한당들과 같은 방법으로 폄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환경과 과학문제는 한국불교가 선점하였다는 말씀에 대하여 저로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 스스로도 쿠페르니쿠스의 단죄를 말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무슨 죄로 그 무서운 단두대에서 단죄를 받았습니까? 그건 과학 때문이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목을 잘리면서까지 진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변화의 적응에 뒤지는 제도상의 문제점으로, 가톨릭에서는 코페르니쿠스를 단죄한 후에 후회하였음은 교수님도 너무나도 잘 알리라 봅니다. 또한 한국 가톨릭에서도 성체 줄기세포에 대하여 이미 교황청 또는 세계가톨릭의 조직을 통하여 자문을 받았을 것이며, 이를 가톨릭의과대학을 통하여 연구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이는 조성택 교수님 생각과 같이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4대종교에 속하는 종교를 우습게보고 장난하지 마십시요!
다. 삼보일배도 그렇습니다. 삼보일배 환경운동 행사는 환경단체 연합의 행사이었지 불교계 단독의 행사는 아니었다고 저는 기억 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조교수님은 환경과 과학 문제에 대하여는 불교계가 먼저 선점하였다는 말씀을 언론을 통하여 오도함으로 인하여 마치 불교계가 무슨 반국가적인 행사를 지휘하는 본부인양, 반사회적,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를 보여 왔다고, 한국의 지식사회를 혼란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모하고, 비상식적이며, 치사한 보도입니까? 우리나라 근대사를 다시 한번 조명하여 보던지, 아니면 학생들에게 우리 근대사에 대하여 종교의 역할에 대하여 물어보고, 모든 불자들에게 사과하기 바랍니다. 위와 같이 환경문제도 과학문제도 한국불교가 먼저 선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안타까웁게도 개인으로서 한 바구니스님의 지계의 실천을 강행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그 비구니스님께서도 중도의 뜻을 터득 하시리라 믿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일들은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없다는 보장은 아무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어느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이며, 한 개인으로서도 있을 수 있는 문제이며, 현재까지 그래왔으며, 한국사회의 전체의 문제인 것이며,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완숙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저는 표현 하고 싶습니다.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시기 바랍니다.
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여서 달라지는 것이 무었입니까? 환경 단체연합이 결행한 행위들을 가지고, 불교계 독단으로 행동한 것인 양,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별로 한 일이 없는 불교계가 자책감과 컴프렉스로 인하여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말씀 하신사실에 대하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소아병적인 발상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우리나라의근대사에서 종교계, 특히 불교계가 한일에 대하여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1. 지율 스님의 단식이 환경과 생명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운 긍정적 측면도 있지 않는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내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도롱뇽이, 배아가 생명이다 어쩌다 할 정도로 고도의 생명윤리를 가졌다면 육식 문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도롱뇽이 아파요”라고 말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간과하는 식육 고기의 도축 과정에 대해 불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건 자기 모순이다. 또 불교 사찰 내에서 벌어지는 비환경적인 재건축 등 엉망진창인 일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놔두면서 천성산만 가지고 그러는데, 정말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반 환경단체 활동가라면 그냥 자기 목표가 ‘천성산 지키기’고 그것만 하면 된다. 하지만 종교인이기 때문에 자기 입장도 한번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종교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인데, 그런 점에서 (지율 스님은) 차별성이 없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독선주의고 엘리트주의다. 나 하나 죽어서 된다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냐.
반론 가.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제도를 궁극적인 구현 과제로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중생에는 파리모기 뿐만이 아니라, 풀 한포기 까지도 포함되며, 큰 스님들이 총체를 들고 다니시는 것은 파리와 모기 등 곤충 한 마리의 살생이라도 하지 않기 위한다는 상징적의미로 가지고 다니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풀 한포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중국의 고승들이 스스로의 생명까지도 포기하면서까지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는 저보다도 더 많이 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밀교라는 종파에서는 미생물의 살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체로 수도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타종교에 비하여 중생이라는 넓은 범위로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그만큼 지계의 범위가 넓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도축과정에 대하여 불교가 관심을 가지지 안한다는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그 관심이라는 뜻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축산 산업은 많은 발전을 하였습니다. 도축에 대하여도 위생적인 방법으로나, 맛을 내는 방법으로나 많은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축산행정의 표본이 돼지고기 껍질 벗기기입니다. 위생적인 면에서나 맛의 면에서 축산 정책은 시행과 검사가 수정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 축산행정은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도 도축장에서 소를 도살하는 사람을 받아드린 사실에 대하여도 저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한 교리적인 충분한 검증이 된 사실에 대하여, 한국불교계가 도축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 사실에 대하여 저로서는 인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구요? 그 정도의 모순 이라는 것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교수님을 소아병적 사고방식이라고 자주 말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술 먹으니까 교회 안 나간다는 사람이나 별다름이 없습니다. 목사는 한 개인인 성직자일 뿐이지 종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이론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로다. 술과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쾌락을 위하여 급증하여가는 약물복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자를 디딤돌로 하여 치부하는 재력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자기를 합리화 하기위하여 범죄로 인하여 얻은 재산의 일부를 종교단체에 내놓는 사람까지 있다는 사실도 알리라 봅니다. 또한 개신교의 재벌 화에 대하는 말로서, 요즈음은 성직자는 교통정리를 잘하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사실과 같이 지금 일부 개신교를 제외한 양식 있는 종교계는 변화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 사찰에서 유지보수를 위하여, 혹은 일부 증축을 위하여 허가 없이 사찰 내 건축물의 일부를 건축하는 행위에 대하여 시비를 거시었습니다. 건설 기술자인 저로서는 타종교를 믿고 있는 현직에 종사하는 기간동안에 그런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시비를 걸지를 아니하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묵인을 하였습니다. 법적으로 그 시비를 가려야할 입장에 있었어도, 그 사실행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가급적이면 신앙으로 해결 할려고 많은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노력을 하였지요. 저는 신앙인은 가톨릭이던, 개신교이던, 회교도이던, 불교도 이던지 간에 거의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자체적으로 그런 작은 문제도 해결 하지 못하면서 천성산 지키기 등의 더 큰 환경문제에 관여 한다는 말씀에 접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우리 조성택 교수님은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보다 더 큰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너무나 단순논리로만 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그 일마다 마다에 따라 나름대로의 잣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말은 지율스님의 혼수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고행이 사회적 측면에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측면에서 옳지 않다고 하여서 독선적이고 에리트 주의이며, 폭력적이지는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생을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발언으로 불교를 폄하 하시는 교수님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2006.1.30.오후) 방송되는 내용처럼 지율스님이 음식을 드신다고 하니 지율스님께 중도를 실천하심에 고맙다는 말로서밖에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군요!
12. 아줌마 보살들만 있으면 다다? 불교계를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불교계 안에서 생존이 가능한가.
=난 너무 궁금한 게 있다. 나는 황우석, 지율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불교가 깨달음이 아니라 행복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조계종의 본질적 문제에 바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런 블랙홀 같은 분위기가 기괴하고 음산하다. 아는 스님들에게 여쭈면 그냥 웃고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요”라고 답한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란 의문이 가능하고, 조계종의 화두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건너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조계종 존립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인데도 그냥 가만히 있다. 달라이라마가 히트를 치는 것 등은 한국 사회가 불교에 대해 다른 방식의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 하는데도, 조계종은 거기에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블랙홀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반론 가. 제가 보기에 조성택 교수님은 "깨달음" 등 불교를 너무나 모릅니다. 또한 "삼귀의" 등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서도 너무나도 모릅니다. "선" 등 불교 수행에 대하여서도 아는 게 적습니다. 깨달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깨달은 자와 깨달지 못 한자의 차이는 지금 조성택 교수님과 인간 노한후와의 차이와 같습니다. 삼처전심이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어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의 무언의 부처님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랑 하는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깨달음의 결과를 과시하는 자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런 깨달음이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틈事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최소한 조성택 교수님같이 아만에 빠지지는 아니할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변화원리에의 적응에 매우 쉽게 접근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에 블랙홀에 빠져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론을 알 수 있는 길도 전혀 모르시고, 우주의 커다란 변화에 적응도 못하는 조성택 교수님을 어느 스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깨달음이 무었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까? 깨달음이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님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조성택 교수님의 문제 제기라는 것이 문제 제기가 아니라, 불교 교리를 너무나도 모르는 소아병적인 작태임을 스스로 알 때 까지 불교학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숙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나. 기본적으로 ?틈事습?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가" 목에서 잠간 말을 하였지만, 깨달음이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신, 해, 오, 수, 증, 화, 가 불교수행의 모두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불교는 먼저 믿어야 되고, 다음에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함이나, 알기만하고 믿지 않음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이론입니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갈고 닦아야하고, 닦아서 더 증하면 결국에는 중생제도에 이르는 화에 이른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조교수님은 이중 ?R 번째부터 갖추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불교수행에 대하여 너무나도 문외한이기 때문 입니다. 저로서는 조교수님을 불교 신도로서도, 불교학자로서도 인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로서도 저의 ?틈事습? 증명 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생활에서 깨달음을 유추해석은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정도에 이르르면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겠구나? 생활 중에도 갑자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이 필요하고, 다음에 해가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의 깨달음이란 아주 작은 부분의 일상생활에서의 깨달음 일뿐임으로 큰스님들의 종교적인 깨달음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깨달음 자체를 의심 하는 교수님은 아직 초보단계에도 이르르지도 못 하신분임에도 불교학을 강의 하신다고 하니 심히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수행을 더 많이 하면서 중생을 상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의 성취과정입니다. 최소한도 그런 눈이라도 뜨여야 불교에 대하여 말을 할 수가 있다고 저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수님의 눈처럼,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가 미친 사람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무모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부처님도 미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 점이 큰 의미에서 깨달은 자와 깨달지 못 한자와의 다른 점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 정도의 수준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계종단에서 발행한 불교입문과 불교교리 두 권(약 일 만원 정도 소요됨)정도만 구입하여 읽으면, 저 정도 까지는 따라 올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교수님을 무시하여 이 책 두 권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틈事? 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교수님이 너무나도 답답하게 보여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직접 서점에서 구입하기가 거북하면, 가난하지만 저의 작은 생활비 에서 쪼개어 구입하여 우편으로 보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 정도의 수준까지만 오게 되면 다른 많은 서적들을 읽고 싶은 의욕이 생길 것이고, 그 책들을 읽으면, 깨달음의 현존에 대하여 느끼는게 있을 것이며, 그러면 더 많은 수행을 통하여 앉아서 입적 할 수도 있다는 자신과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조계종의 화두 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 건너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반야 바라밀다"를 말하는 것인지, 개울을 건너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조교수님이 오해를 많이 하고 있군요. 화두선 이라는 것이 무었 입니까? 선의 종류는 또 몇 가지나 있습니까? 각종파의 선마다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하면 화두선에 대하여 토론이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은, 선 그 자체로서의 수행의 방법이며, 종교의 체험 방식일 따름이지, 깨달음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법에 있어서 교수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서 물 건너갔다(반야 바라밀다를 제가 오해 하였다면 미안할일이지만)고 하시는 것은 소아병적인 사고방식 이라는 것입니다. 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시는 분이라면 그런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생활이 곧 "선"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교수님의 말이 불자로서 매우 불쾌한 말 이지만, 저는 참기 위하여 매우 힘든 고통을 감수하고 있음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라. "조계종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인데도 그냥 가만히 있다"라는 말에 대하여, 화두선이 물 건너갔다고 말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무지에서 온 편견일 따름입니다.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수가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으로 인한 중생제도입니다. 선은 그 한 방법으로서 과정일 따름이며, 종교의 체험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의 체험은 불교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종교의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종교의 종류나 종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조성택 교수님이 얼마나 유치한 수준에 있는지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런 유치한 수준으로 존립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을 하였다고 보도한 언론도 같이 유치합니다. 그 유치한 아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조금은 수행을 더 하시기 바랍니다. 선의 수행에 있어서, 그 방법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조교수님에게는 제가 지금 여기서 더 설명하기가 매우 힘이 들것입니다. 우선 제가 권하여드린 두 권의 책을 읽어보신 후에 어떤 책을 보아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우면, 제가 약간의 도움은 줄 수가 있습니다. 종교 가지고 말장난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비양심적이고, 종교부정적인 일에는 항상 스스로의 양심적인 후환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마. 불교를 이해하려면 달라이 라마 성하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라이라마 성하께서는 불교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선택되시는 달라이 라마성하께서는 망명중이십니다. 조교수님의 발언에 대하여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티벳 불교는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수행위주의 불교라는 사실이 신도들의 승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다르답니다. 또한 많은 불자들은 티벳을 불교의 종주국쯤으로 여기고 있지요. 최소한 성직자에 대하여만은 그러는 것 같습니다. 나라간의 불교에 대하여 이간질 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계의 어느 종교나 전파당시의 그 나라 환경에 따라 각 나라마다의 독특한 문화를 흡수하였음으로, 어느 종교나 나라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달라이라마성하와 우리나라의 법전 종정 성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소아병적인 사고방식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 되어왔지만, 우리나라 나름대로 통일신라시대로부터 독특한 맥이 이어져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의한 종교의 전례를 포함한 교리에 대한 물음과 답변의 정립은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교수님은 그런 작업에 참여 하여 보지 않은 분이어서 그런 어려운 일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조교수님의 욕심처럼 지금 어떤 결함이 발견되었다고 하여서 당장에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개신교와는 달리, 가톨릭의 교리(의전포함)가 그러 하였고, 불교의 경전과 교리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특히 후대에 제자 아난에게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표현으로 재현 되었습니다. 조교수님이 깨달음과 화두선에 대하여 그런 비판을 하였다고 하여서 어느 종단에서 곧바로 수정하는 등의 반응이 있었다면 그 종단은 사이비 종교 일 것입니다. 종교의 체험방법과 수행방법도 교리(전례)에 속하는데 조교수님이 비판한다고 하여서 당대에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발언 자체가 "선"을 모르기 때문에 "깨달음"을 의심하는 것이며, 조성택 교수님의 발언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성인이면서도 깨달음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으며, 선의 의미와 종류에 대한 앎이 부족하고, 종교체험을 하여보지 못 하였는데, 그런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어떻게 대학교에서 불교관련 교수님이 되었는지가 의심스러울 뿐 입니다. 말하자면 불교에 대한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 하였다는 것이 확실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성직자라면, 또한 신앙이 깊은 한국불교 신도라면 최소한 위의3가지 사항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 자기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는 말은, 저와 같은 많은 새로운 신도가 불교에 입문함으로서 불교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앞에서 말한 그런 엄청난 변화가 불교 내부에 일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조교수님이 정체 되어 있으며,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블랙홀이 아니라 스스로가 무지하기 때문에 상대를 안 하여 준다는 눈치 체기 바라며, 조교수님이 블랙홀에 빠져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불교는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태풍이 지나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13. 왜 그런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반론 조성택 교수님이 불교신자라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혹은 불교문화를 사랑하기만 한다하여도 그렇게 까지는 말 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말은 불교 신도로서 듣기가 매우 거북 합니다. 폄하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불교 자체를 무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한국불교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린 것입니다. 그건 지금 현재 불교의 모든 문제들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할 것 입니다! 그건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는 남자 신도들이 부족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너무나도 부족한 실정이라는 것이 현실 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자체나, 조계종 종단만의 탓만은 아니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앞에서 말 하였지만, 책임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불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 하여야 하였으며, 한국사에서 여러 가지형태로 정치에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로인하여 불교는 교리가 타 종교에 비하여 과학적이고 그 우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종교라는 비판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블랙홀이 아니라 무지로 인하여 상대를 하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한 불교는 저와 같이 이론으로 무장 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신도세력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은 불교가 정체 되지 않았으며,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력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제안 : 불교에 입문한지가 너무 일천하면서도 조성택 교수님의 발언이 너무나도 황당하여 감히 제안을 합니다. 조성택 교수님과 정식으로 고려대 사이트나, 다른 언론을 통하는 방법으로 토론을 제의합니다. 저는 솔로이니 항상 시간이 많습니다. 시간에 구애 받지 마시고 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큰 흐름을 보기 까지도 못하면서도 불교에 대하여 필요이상으로 폄하하고 무시하면서, 부족한 불교 이론으로 국민들의 지성을 혼동으로 몰아넣는 행위와 불교신도들에게 매우 큰 실망과 분노를 주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고,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께 사과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으로 조성택 교수님의 변화에 대한 적응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저와 한국불교의 새로운 신도세력들은 계속하여 교수님을 관찰 할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고, 빠진 것, 중복된 것, 오탈자가 많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월23일 한겨례 신문 인터넷판과의 인터뷰에서 첨부한 "조성택 교수 에게 고함"의 내용과 같이, 불교와 불교성직자와 불교 신도들을 능멸하고 폄하하는 발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던바, 저 개인에 대한 답변만이 있어서, 지난 2월3일까지 지관총무원장 큰스님에게 직접 사과 하던지, 조계종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다음의 18개 요구사항들에 대하여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불교학전공 교수는 진상을 규명 하고 공개 사과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끝 까지 읽어 보시고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1. 가톨릭이 성체줄기세포연구에 지원 약속한 100억원은 역사상 사회문제에 관여한 노하우이고, 불교계의 100억원 지원운동은 세속문제에 대한 논리가 약하고, 역사적인 경험과 노하우가 적고, 근 현대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했고, 황우석 옹호는 종교간 경쟁이 펼쳐진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체제에서 불교계가 지닌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라고, 발언하여, 종교 간에 이간질을 하면서 불교를 능멸하고 폄하한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2. 서구에서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로 많은 관심을 가진다며, 한국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 까지 하면서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종교다" 라고 내세우려한다는 발언으로, 종교간 이간질하는 발언의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3. 근대이후 현재까지 한국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한 역할은 적다며,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하였고, 오히려 반사회적, 반민주적, 반민족적형태를 보여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사과 하라!
4. 새로운 과학의 출현으로 인한 불교교리정립차원의 불교신자인 황우석 교수 지원 사업을, 불교 컴플렉스 해소를 위한 호재여서 지원하였다는 발언으로 불교교리자체를 능멸한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불교학 전공교수는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5. 불교 교리정립을 위한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의 말씀을, 불교적 입장뿐만이 아니라 다른 세속적 사항, 과학과 윤리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함에도, 자기 입장을 먼저 개진한 것이라고 폄하함으로서 지관총무원장 큰스님과, 불교 교리와, 불교신자들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한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6. 가톨릭신부들은 재가자와의 연대가 밀접한데 반해, 조계종은 제가신도의 개입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만 하며, 불교계가 사회현안에 대하여 전문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노하우도 적어서 대응이 미숙하며, 황우석 파문 현안에 대한 발언도 상당히 촌스럽다고 발언한 내용의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7.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을 받아드린 사건과 황우석 지원 사건이 흡사한데, 전두환 전임대통령 보호사건은 종교적 차원으로서, 무변별한 이번 황우석 감싸기 사건보다 더 나은 사건이라고 발언하여, 새로운 과학의 출현으로 인한 종교적인 교리 정립을 위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정치사건화 할려는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사과 하라!
8. 가톨릭과 기독교만 신학적 입장이 있고, 불교의 신학적 입장정립은 교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고 단정한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사과 하라!
9.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과는 동국대 교수 등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얘기 할 수도 없는 분위기 이며, 전문가적인 안목이 필요한데 그런 싱크 탱크도 없이 그냥 총무원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발언을 막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라는 발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총무원장이신 지관 큰스님에게 사과하고 그 발언의 진상을 규명하라!
10. 불교도 세속문제에 전문가적 안목을 갖추어야 하는데, 전문성이 없이 자꾸 불교적인 논리만 갖다대니 항상 각론에서 논리가 달리고 밀리는 것이라는 발언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11.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치, 교육, 문화 등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지만, 불교계에서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으며, 거의 무임승차하였다는 발언의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12.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으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발언하여 불교신도들을 폄하한 사실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사과 하라!
13. 불교계가 근대화 과정에서 한 일이 없고, 사회적 지분이 없다는 자책감과 콤플렉스로, 지율과 황우석을 지지한다며, 불교를 폄하한 사실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 하라!
14. 부처님께서도 "전다라(백정)"에게 살생이 문제가 아니라, 성품을 보아 의혹을 활짝 없애면 도축을 하는 업을 짓더라도 미혹한 사람과는 달리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시고 제자로 받아 드리셨는데, "도룡뇽이 아파요" 라는 말보다는 도축과정에 대하여 불교계가 관심을 가지라는 발언으로 불교를 폄하 한바, 대안을 제시 할 것이며,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15.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의 평안은 자연히 이루어지므로, 마음의 평안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깨달음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는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16.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의 제기가 가능하다"며, 불교의 교리를 능멸한 진실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17. "조계종의 화두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 건너 간 것 이라는 비판도 많다"는 발언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사과 하라!
18. 위와 같은 유치한 발언들을 하면서도 "조계종에 칼을 대고 존립의 근거를 흔드는 발언"을 하였다는 등으로 불교를 능멸하고 폄하하는 발언을 의식적으로 한 진상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위 사실들에 대하여 저 개인에 대한 귀하의 답변을 이메일로 받고서, 지성인으로서 충분한 양식으로 고민 고민 끝에, 귀하에게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던지, 아니면 조계종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2월 3일까지 공개사과 하는 방법을 제시 하고 기다렸으나, 귀하는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 보이기에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귀하는 주장하지만, 저로서는 근본적으로 귀하가 불교인 인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서, 귀하의 발언에 대하여 울분 하는 모든 불교신도들을 대표하여 본 요구사항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귀하의 공개사과가 없는 한, 어떤 유치한 방법으로, 마치 합당한 사실인양 귀하가 언행을 한다 하여도, 저는 귀하가 진실을 규명하고 공개 사과 할 때 까지, 이 사실들을 이세상의 모든 불자들이 아실 때 까지 계속하여 주장할 것임을 양지하기 바랍니다.
불교평론 2006년 봄 호 권두언 조 성택(주간, 고려대 철학과 교수) ‘황 우석 사태’의 본질은 연구의 진실성 여부이다. 그 진실성은 연구자의 심정적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의 문제이며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세력 음모론’이 등장하고 있다. 일단 음모론이 등장하게 되면 공공적 합의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실이 아닌 주장만 난무하게 되는 상황이다. 식민지, 6.25전쟁, 그리고 혁명과 민주화 운동 등 근세사의 숱한 질곡을 겪으면서 성장해온 한국인들에게 음모론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리고 때로 그 음모론이 ‘숨겨진 진실’을 드러냈던 역사적 경험도 있기 때문에 음모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연구의 진실성을 회의하면서도 소위 ‘원천기술의 존재’와 그에 따른 ‘국익’을 거론하면서 황 교수에게 ‘재연’의 기회를 주자고하는 여론도 있다. 황 교수 스스로도 “6개월만 주면 원천 기술을 재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천 기술의 유무 또한 과학적 검증에 의해 밝혀질 터이지만 설사 그 원천 기술이 있다 해도 황 교수에게 입증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는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간 황 교수에게는 많은 시간과 인력과 재원이 있었다. 스스로 시인한 실험 데이터의 조작과 날조 이후에도 황 교수는 그가 지금 요구하고 있는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 더구나 그 동안의 지원이 국가 예산에서 나온 재원이었음을 생각하면 황 교수에게 또 다시 국가 예산을 지원한다는 것은 이치상으로나 다른 연구자와의 형평성 문제로나 가당치 않는 일이다. 그간 우리가 황 교수의 연구에 전적으로 지원하고 박수를 보낸 것은 그가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배양에 세계 최초로 성공을 하였다고 믿고 있었고 그 성공이 가져다 줄 무한한 의학적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 지원과 박수의 원천이 조작되고 날조되었음이 밝혀졌는데 이제 또 다시 황 교수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황 교수의 연구 결과 조작으로 인해 당장 유무형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한국의 다른 동료 과학자들을 생각한다면 황 교수의 ‘재연 요구’는 직업 윤리적 측면에서나 도의적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 일각에서 황 교수에게 보내고 있는 지지와 믿음은 의아하다 못해 기이한 현상이다. 불교계 일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인사 혹은 단체들이 한국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한국 불교계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한국 불교계의 중심에 있는 인사들이며 중요한 단체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의견 표명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불교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공식직함을 가진 ‘어른’이 어떤 입장을 개진하는 것은 불교계 내외의 세인들에게는 당연히 불교계의 공식입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확인 되지 않은 ‘외부세력 음모론’을 한편으로 제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거의 무망한 조작된 연구 성과가 가져다 줄 ‘요익중생’의 미명으로 황 우석 박사에 대한 불교계의 “변함없는 지지 입장” 표명은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불교인들을 오도할 수 있다. 더구나 황 교수에 대한 지지의 이유로 “일단 황 박사는 한국국민이며, 한국국민이 어떤 분야이든 남보다 앞서나간다면 박수를 쳐줘야 한다”든지 또 “어떤 종교에서는 성체줄기세포는 괜찮고 황 교수 연구는 안 된다고 반대를 하는데, 서양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는 등의 발언은 듣기에 따라서는 많은 오해와 곡해를 낳을 수 있는 발언들이다. “앞서 나가는 한국인에 대한 지지”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을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지만 듣기에 따라 그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생명과학을 둘러싼 윤리문제의 제기가 반드시 기독교나 서양의 입장만도 아니고, 배아 줄기 세포를 중심한 황 교수의 연구 방식이 반드시 불교적으로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발언이 어떤 점에서는 서양 윤리(혹은 기독교 윤리)와 구별 되는 불교만의 ‘독특한 윤리’가 있다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불교 윤리의 보편성이지 불교만의 독특함이나 특수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배아’냐 ‘성체’냐의 연구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의 성과가 사실이냐 조작된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내용상으로도 타당한 발언이라 하기 어렵다. 연구의 진실성 여부가 객관적인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밝혀지기를 좀 더 기다려도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위 ‘원천기술’의 존재 유무를 떠나 연구 성과의 조작과 날조가 드러난 이 후에도 촛불 시위와 삼보일배, 크고 작은 사찰에서의 지지 법회, 그리고 일부 재가불교단체의 지지 운동과 성명 발표 등 불교계의 황 교수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은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불교 종립 대학인 동국대에서 황 교수의 연구를 지원해야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들도 불교계 인터넷 사이트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황 우석 사태’에 대한 조사과정을 지켜보면서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 불교인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불교의 수행에서 ‘바름’이란 대단히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正道)에서 ‘바름’(正)이란 부사어이기도 하며 수행의 내용을 말하는 명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바른 생각’(正思)이란 올바르게 생각할 뿐 아니라 올바른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점이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는 점이다. 진심을 다해 믿지만 그 믿는 내용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삿된 것을 믿더라도 진심으로 믿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바른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본지 2004년 가을호 (통권 제 20호) 권두언에서 필자는 생명공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는 과학적 진보를 제한 할 수 없다”는 제하(題下)에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또한 과학의 발전과 진보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돌이키지 못한다. 과거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흔히 있어 왔던 것처럼 진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 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종교의 역할은 이 러한 진보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있지, 진보 그 자체를 거 부할 수 없다. 약간의 비약을 허용한다면, 사회가 비약을 허용한다면, 사회가 종교 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에 봉사해야하며, 이런 관점에서 계속 진보해온 사회에 비하면 종교는 정체되어온 감이 있다.
한편 현대사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과정을 신화화하지 않고 않고서 도 그 교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의미는 ‘붓다’라 고 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인도 사회의 브라흐 마니즘에 기초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화적 이해를 깨뜨리고 인간의 자율성에 기 초한 도덕관을 세웠다는 점에 있다.
(배아) 복제문제에 관한 여러 쟁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을 신뢰하 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불교는 복제문제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지 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는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둘러싼 생명윤리문제가 종교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가톨릭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배아를 이용한 연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였다. 필자는 가톨릭에서 반대의 이유로 내세운 ‘생명의 존엄성’은 일종의 수사(修辭)이며 그 내면에는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영역인 ‘생명 창조’에 개입하는데 대한 어떤 종교적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배아복제 등의 과학의 문제에 관해 특정 종교의 교리를 이유로 과학적 진보를 제한 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불교적 윤리관은 생명공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모든 교리가 배아줄기세포연구를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 내에서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반대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명공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윤리의 문제는 특정 종교의 교리로 찬반이 정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며, 결국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조작’ 등에 관해 원천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열린 입장에서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간적 입장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최근 황 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불교인들의 경우를 보면 “우리 불교는 기독교와 다르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요익중생’ 등의 불교 교리를 내세워 찬성의 근거로 삼고 있으나 그러한 입장은 보편적 설득력은 물론 불교 내에서의 설득력도 얻기 어렵다고 본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반대가 곧 불교의 찬성이어서는 곤란하다. 교리를 절대적 근거로 반대하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불교의 어떤 특정교리를 찬성의 절대적 근거로 삼는 것 또한 곤란할 것이다. 생명과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람직한 불교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고려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불교적 입장은 일단 어떤 논의도 가능하다. 둘째, 그러한 열린 지평위에서 ‘절대 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고려가 아닌 인류의 역사, 과학의 발전과 진보와 같은 보편적 인문학적 고민을 바탕으로 배아줄기세포 등 생명과학이 함의하는 여러 윤리문제를 고려해야한다. 셋째, 그 결과 관점과 고려의 우선순위에 따라 찬성의 입장도 반대의 입장도 다 가 능하다고 본다. 단 하나의 불교적 입장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 교적 이지도 않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비로소 찬성의 주장이건 반대의 주장이건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불교 연기론에 근거하여 ‘찬성’이 불교적 입장이라든지 혹은 불살생의 원칙을 근거로 ‘반대’가 불교적 입장이라든지 하는 주장은 일반적 설득력은 고사하고 교조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 교리는 이 문제와 관련할 때 하나의 고려 사항일 뿐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신(神)을 상정하지 않는 불교는 상대적으로 배아줄기세포를 비롯하여 생명과학의 문제에 관해 기독교에 비해 훨씬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첨단 생명과학 연구에 대해 불교인들이 타 종교인들에 비해 전향적이고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며 종교와 현대 과학의 조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과학적 연구에 대한 그러한 전향적인 입장이 특정 연구자에 대한 지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불교계의 지지 입장은 ‘과학적 연구’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거의 전적으로 황 우석 교수 개인에 대한 지지라는 느낌이다. 황 교수가 그 분야의 선도적 연구자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줄기세포연구가 황 교수만의 독점적 영역도 아니라는 점에서 황 교수에 대한 불교계의 ‘무조건적’ 지지 입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기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불교계의 황 교수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의 이면에는 그가 불교인이라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만약 황 교수가 불교인인 아니었다면 불교계의 지금과 같은 “변함없는 지지”가 있었을까? 한국의 불교인들이 그토록 시달려온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불교인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경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네 가지 준칙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는 준칙은 이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 연구에 대한 지지와 특정 연구자에 대한 지지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연구자로서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연구 윤리와 정직성을 무시한 연구자를 같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감싸고 비호하는 것은 명분도 없을뿐더러 종교적으로도 옳지 못한 것이다.
필자 또한 같은 불교인으로서 황 우석 교수가 처한 곤경이 정말 안타깝고 아쉽다. 한 때 많은 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어린이들에게는 훌륭한 과학자의 모델이 되었던 그가 이제 마치 황당한 ‘사기극’의 총 연출자인 것처럼 언론에 비춰지고 있다. 황 교수의 연구 성과가 한 때 과장되었던 것처럼 지금 그의 실수나 잘못도 턱 없이 과장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불교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황 박사의 말에 우리 불교인들이 안도하고 자랑스러워했던 만큼 그 말이 허언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우리는 그에게서 말할 수 없이 큰 실망을 느끼고 있다. 한때 그에게 환호를 보내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를 ‘사기꾼’이라 매도하면서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그런 황 교수에게 또 다른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세상인심이 그렇고 그런 것이라 자위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일정부분 져야할 책임을 황 교수 개인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 때문이다. 비록 황 교수 본인의 과도한 성취욕 그리고 그의 연구에 대한 지나친 사회적 기대감으로부터 받은 유무형의 강박감으로 적절한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급기야는 실험 데이터의 조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황 교수는 사실 누구보다도 성실한 연구자의 모습을 보여 왔다. 여론의 주목을 받기 이전부터 그는 새벽 5시면 연구실에 도착하였고 자정에 가까워야 연구실을 나서는 일상을 주말도 없이 계속해 왔던 연구자였다. 또한 그는 “과학에 국경은 없어도 과학자에게 조국은 있다”는 구절의 의미를 다시금 우리에게 새겨주었던 남다른 열정의 소유자였다. 실험 데이터의 조작이라는 결과만을 놓고 황 교수의 연구자로서의 성실성과 열정마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모두 차분히 자신을 돌아 볼 때가 아닌가 한다. 드러난 잘못이 명백한데도 원칙 없이 감싸는 것은 옳은 종교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무분별한 돌팔매질도 이제 그만해야한다. 그리고 황 교수도 자신의 잘못을 “인위적 실수”라든지 “원천 기술”이라든지 하는 말로 호도하기보다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불교인으로서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 다음에라야 ‘과학자 황 우석’이 아닌 ‘인간 황 우석’에 대한 불교계의 변함없는 믿음과 애정이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인과의 법칙이 역력하기에 꼭 잘 되시길 기도 동참합니다.
녜~ 인과법칙/금빛진리를 품어안고 숨쉬기를 서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