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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휴머니즘이 갈 수 있을까? 과연 이 둘이 양립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을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반종교 사상가들, 세속주의자(secularist)들은 결코 같이 갈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종교의 핵심인 영성은 휴머니즘과 같이 갈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제도와 틀, 신자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교리와 사상과 의례를 갖추고 성직자와 일반 신도를 구별할 수밖에 없는 종교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휴머니즘의 정신과 같이 가기 어렵다는 것이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보수’기독교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는 다른 이유로 세속주의와는 길을 달리한다.
삶과 인생의 무상을 강조하는 불교나, 역사의 세계와 욕망이 지배하는 현상계를 환상(幻想, illusion)으로 간주하는 불이론적 베단타(Advaita Vedanta) 철학이 - 그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i)의 사상도 이 부류에 속한다 - 세계와 역사를 긍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 속에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존의 잘못된 사회질서를 혁명을 무릅쓰고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기는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불교나 불이론적 베단타 사상은 세상을 변혁하려는 열정과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행복에 반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교나 베단타 사상 모두 사회변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초월적 세계를 동경하고 약속하는 종교는 인간을 환상적인 행복으로 오도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표현대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특히 불교를 포함하여 종교들은 모두 사회악보다는 개인의 무지와 욕망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휴머니즘과 같이 가기가 어렵다고 본다. 마르크시즘의 눈에는 종교는 처음부터 문제를 잘 못 집었다. 문제의 본질은 왜곡된 사회질서와 체제에 있지, 개인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제 마르크시즘을 넘어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의 일반적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종교, 가령 불교나 기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덕목이 지나치게 어렵고 불필요하다. 세상, 세속을 무상하고 허망하다고 하여 소극적으로 살거나 도피주의적 인생관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려면 신과 인간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불교와 동양 종교들은 대체로 전자의 문제는 심각하지 않지만, 후자의 문제는 확실히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초자연주의적인(supernaturalistic)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에서 심각한 것이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불교와 달리 세계를 허망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세계는 창조주 하느님처럼 영원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사람은 죽으면 각자 자기 삶에 대해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고 하느님의 최후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슬람처럼 역사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종말론적 신앙과 사후세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실재한다(real)고 보는 마르크시즘의 눈에는 세계가 환상이 아니라 종교가 환상이다.
세속주의와 종교들의 현격한 차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보는 인간관에 있다. 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인간에게도 영적 자아, ‘참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이라고 세속주의는 주장한다. 이것이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점이며 만약 불교가 무아를 주장한다면, 불교는 당연히 영적 휴머니즘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점에서는 불교는 세속주의에 더 가깝다. 실제로 대다수 불교학자는 붇다가 힌두교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원한 자아 혹은 참 나인 아트만(Atman)과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기를 거듭하는 힌두교의 여러 신들(Visnu, Siva, Brahma 혹은 브라만 Brahman, 즉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을 부정하거나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나는 붇다가 설한 무아설이 사실은 비아설이라고 믿기 때문에 불교를 영적 휴머니즘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붇다가 설한 무아설이 참으로 인간의 형이상학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견해도 오해라고 본다. 내가 이 오래된 문제를 새삼 다시 한번 거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나의 종교관 전체에 관계된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불가피한 의문이다. 차제에 나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만약 신에 대한 개념이 어떠하든, 불교가 정말로 힌두교 베단타 철학의 아트만 개념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붇다를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로 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불교는 실로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붇다의 가르침을 볼 때, 나는 그를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간주하는 데는 전혀 이의를 제기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신의 존재와 영적 인간관을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붇다가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며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을 부정한 무아론자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에게 붇다의 매력은 신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참 나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였고 말씀을 아꼈다는 데 있다. 다른 용어로 하면, 그의 접근법은 신학적으로는 일종의 부정의 길(via negativa)이었고 불교 용어로는 차전(遮詮)적 담론, 파사가 곧 현정(破邪顯正)이라는 정신에 충실한 분이었다.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논하고자 한다.
우선, 유명한 19세기 인도의 현자이자 베단타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i)의 사상에 대한 아래의 간단한 설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한 저명한 인도철학의 대가는 마하르시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적이 있다:
스리 라마나의 철학은 불이론적 베단타와 동일하게 참 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 철학이 가르치는
중심 되는 길은 자아의 본성에 대한 탐구, ‘나’라는 관념의 내용에 대한 탐구다. 일상적으로 ‘나’라는
영역은 변하며 다수의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참 ‘나’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질로 된 신체를 ‘나’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올바른 말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부처님 자신의 설법, 특히 무아상경(無我相經)에 나오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즉 色受想行識)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부처님은 라마나 마하르시처럼, 아니 라마나 마하르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인간의 참 자아인 아트만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마하르시가 베단타 전통에 따라 아트만을 모든 사람의 참 자아로 알기 위해서는 결코 우리의 몸뚱어리(오온 가운데 첫째 요소, 즉 色, 신체)를 ‘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는 반면, 부처님은 <무아상경>을 비롯하여 많은 설법 곳곳에서 오온의 하나하나를 들면서 어느 하나도 자아로 간주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이를 가리켜서 전통적인 불교학자들은 붇다가 아트만 자체의 실재성을 부정하신 것이라고 학대 해석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우파니샤드의 브라만(Brahman) 즉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실재 자체의 실재성을 부정했다고 잘못 해석한다. 한마디로 해서, 붇다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비아(非我)를 설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적 휴머니즘은 붇다의 교설에 반대할 이유가 없고, 불교도 영적 휴머니즘에서 배제할 이유가 없다.
자기 몸을 두고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말할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붇다는 그런 그릇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누누이 경계한 것이다. 오온 가운데 어느 법(法, dhamma, 현상)도 우리의 자아, 참 나가 아니며, 만약 자아로 잘못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데 마하르시와 붇다는 완전히 견해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온 말고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어떤 영적 본성인 아트만이 따로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밧차고타(Vaccagotta)라는 한 유행승이 부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아트만이 존재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부처님의 대답은 다소 애매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는 그 이유를 밝히기를, 아트만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집착을 일으킬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이미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이 전에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하면서 더욱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문제를 두고 불교학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붇다가 경전 어디에서도 오온 이외에 우리의 참 자아가 있다,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단타 사상의 아트만은 인류의 보편적 자아(universal self)라는 사실이다. 결코 우리의 이기심을 부추기거나 그 대상이 되는 좁은 개인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민이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아상(我相)과는 무관하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나 영적 휴머니즘의 대가들은 모두 아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분들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교리, 즉 부처님의 무아론과 무신론을 명시적으로 옹호한 사람으로, 스리랑카 출신의 비구 스님 Walpola Rahula와 그의 명저 <붇다의 가르침>(What the Buddha taught)이 참고할 만하다. 그는 거기서 소승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즉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가운데서 특별히 마지막 구절((Sabbedhamma anatta)을 중시하면서, 제법의 ‘제법’(모든 법)에는 행법(즉 有爲法, samskrta-dharma)의 범위를 넘어 무위법(無爲法) 즉 열반(nirvana. nibbana)까지,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무아(dharma-nairatmya)를 넘어 인무아(pudgala-nairatmya)까지 전부 포함한다고 강조한다. 과연 그럴까? 상좌불교(Theravada)의 교학과 논서들(abhidharma)에 따르면, 열반은 분명히 오온과는 달리 무위법(asamskrta dharma), 즉 영원하고 절대적인 실재다. Rahula 스님도 이를 인정하듯이, 열반을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혹은 ‘궁극적 진리’(Ultimate Truth)라고 부른다.열반이 형이상학적 실재 혹은 진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붇다가 허무주의자(nihilist)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불자들이 열반을 단지 우리의 생이 더 이상 환생이 없는 ‘절대적 죽음’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부단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그 어려운 수행을 하는 목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의 무엇이 우리에게 이 어려운 자기부정의 길을 가도록 부추기는가? 우리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높은 자아(Atman)가 있지 않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아트만과 오온은 질적으로 다르다. 오온의 거짓 자아를 거부하도록 충동하는 아트만은 오온이 아님은 명백하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그것이 불성, 여래장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다. 곧 우리의 참 나(眞我)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불교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비록 이 참 나를 가리키는 용어들이 상이하지만 하나 같이 그런 영원한 실재를 인정한다. 이것이 영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이다. 불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결코 무신론적인 ‘종교 아닌 종교’가 아니다. 나에게 불교의 매력은 이 절대적 실재인 신 혹은 인간의 참 자아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데 있다. 부정의 길을 강조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 길을 파사현정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내가 무아와 비아를 구별하는 주된 이유다. 불자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붇다가 우리에게 단적인 죽음을 동경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라고 가르쳤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아와 부정의 대상이 되는 오온으로 구성된 자기(이것도 ‘self’라고 번역하지만)는 분명히 다르다. 테라바다(上座部) 교학은 이 점을 분명히 의식했다. 열반은 영생이나 천국과 같은 집착의 대상은 아니지만, 결코 무아의 경지도 아니다. 베단타 사상이 말하는 아트만은 결코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원천이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결코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붇다를 인도의 아들로 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비록 신관이 서로 다를지라도, 비록 인간관이 세부적으로 상이하다 해도,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교도 결코 이에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모두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 본성이 없다면 열반이나 수행을 향한 열정이 과연 어디서 오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미 고사 상태에 빠진 종교는 물론이고, 힘을 잃어가고 공허한 구호만 남발하고 있는 현대의 세속적 휴머니즘도 힘을 되찾아, 현대 세계와 문명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쌍두마차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이 영적 휴머니즘과 세속적 휴머니즘은 결코 상반된 이념이 아니고 오히려 상보적이다. 어떤 형태의 휴머니즘이든 대전제는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평등하고 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도 인간에 대한 각종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사상과 제도가 수많은 사람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편견을 조장하는 각종 차별적 요소들 - 가령 성별의 차이나 신분의 고하, 빈부의 격차, 나이의 차이나 직업의 귀천, 학연, 지연, 혹은 생김새의 차이 같은 것들 – 은 인간의 참다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우연적인 차이에 불과하다고 휴머니스트들은 말한다.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 이 두 휴머니즘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추상적 인간관이 모든 휴머니즘의 대전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종교가 이런 휴머니즘에 못 미치고 방해가 된다면, 나는 종교를 바로 떠나고 말 것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든 세속적 휴머니즘이든, 추상적인 ‘보편인’(universal man)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기는 마찬가지다. 차이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편인의 이름으로 만인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와 법적 장치를 통해 보장하고 보호하는 제도의 수립에 힘을 기울여 왔다면, 영적 휴머니즘은 그러한 노력에 배치되지는 않지만, 과거 전통 사회와 종교문화에 얽혀서 그러한 노력을 비교적 소홀히 해 왔다는 사실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처럼 사회발전에 앞장서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주로 인간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것이 종교의 의무에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오늘의 영적 휴머니즘은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속적 휴머니즘을 맹목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진정한 영적 휴머니즘을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종교 전통들에 영적 휴머니즘의 요소가 없었다면, 종교는 벌써 현대인들의 외면을 받아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종교 전통들은 영적 휴머니즘을 땅속 깊이 묻힌 - 혹은 보기에 따라, 깊은 늪에 빠져 버린 - 보화처럼, 예로부터 이 보화를 알아보는 영안의 소유자들을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배출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이 숨겨진 보화를 캐내기 위해 거친 종교의 밭을 열심히 갈고 있다. 이 보화를 일찍부터 알아보고 발굴하는 일에 애를 쓴 인류의 영적 스승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적 휴머니즘의 보화는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현대문명이 아무리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영적 휴머니즘은 현대식 교육을 받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의 의식과 생각을 서서히 바꾸어 가고 있다.
우리는 이 교육의 이념과 정신을 ‘세속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현대종교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지성을 지속해서 계발해 나가야 한다. 현대종교는 더는 과거의 무지와 권위주의에 기댈 수 없다. 한국 종교계는 근대식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숱한 사람들을 계몽하고 합리적 사고를 하도록 이끄는 건전한 세속적 휴머니즘과 손을 잡고 같이 가야만 한다. 불교가 아무리 ‘종교 아닌 종교’를 자처한다 해도, 세속적 휴머니즘의 정신을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혹은 불교든, 아직도 한국 종교계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시대착오적이고 편협한 사상에 갇힌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무지가 무지인 줄도 모르고 맹목적인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영위하고 있는 신자들로 우리나라 종교계는 차고 넘친다.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이바지한 엄청난 성과를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사실, 세인들의 상식과는 다를지 몰라도, 세속적 휴머니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영적 휴머니즘은 몇몇 종교의 선각자들만 아는 숨겨진 보물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역설적이지만, 종교라는 거친 땅에 묻혀 있던 영적 보화를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아는 데는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성을 일깨워 준 세속적 휴머니즘과 내노라하는 세속주의 사상가들 –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같은 - 이 외친 종교비판과 고발의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가령 19세기에 기독교 신학을 풍미하다시피 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과 이에 반발하고 나선 신정통주의 기독교 신학도, 그리고 현대 신학계에 유행하는 도그마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 예수, 역사적 인물 예수의 발견과 연구는 세속적 지성의 사고와 정신을 떠나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반종교적인 세속주의자들의 종교비판과 자극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계가 보이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신학적 움직임들이 가능했을지 극히 의문이다. 불교도 이러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나 그 과격한 형태인 세속주의 사상에 진 과거의 빚을 영적 휴머니즘이 갚아 줄 때가 되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불교는 공부해 본적도 없지만 참 어려운것 같습니다.
'공', '중도' '일체개고 제법무상, 제법무아'이런 몇 글자에 모든 이치가 녹아있어 더 어렵습니다.
'무아', '비아'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일단저는해 '무아'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무아'라면 주장할 내가(실체) 없으므로 '무아론'이 성립되지 않고, '무아론'을 주장하면 주장하는 내(그)가 있는 것을 전제하기에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불교(힌두교)의 현상계에 관점은 선생님의 위 글에도 있지만 "제법무상"즉 '모든것은 변화하므로 완전하지 않다'는 정도로으 이해하고 있고 '나 '역시 변화하는 것이므로 실체가 없다(제법무아)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건 선생님의 글 중 "불교와 힌두교 모두 현상계를 환상으로 간주한다"고한 부분입니다.
현상계를 환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을 드립니다.
매번 깊은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