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 경주를 고증하듯 시가지 중심지역 곳곳에 경주읍성의 잔재가 흩어져 남아 있다. 경주읍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시대에 축성되었고 조선시대까지 개축되었으며 전쟁으로 허물어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훼손이 가장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성벽을 허물고 성 안의 건물들을 철거했다. 읍성의 남문도 철거하고 객사에 연접해 있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역사적 유적들이 많이 사라졌다.
경주읍성을 쌓으면서 신라시대 궁궐터인 월성에서 많은 석재들이 옮겨져 재사용됐다. 신라 궁궐을 허물어 지방도시 경주의 읍성을 쌓았던 안타까운 역사인 것이다. 발굴 복원하는 현장에서 신라 월성의 석재들이 흔하게 발견되면서 짐작되는 부분이다.
경주읍성이 자리잡고 있던 곳에는 경주문화원을 비롯해 경주경찰서, 경주여중, 계림초등학교, 대구지법 경주지원 등의 공공건물이 많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석재가 상당수 남아 있다. 경주읍성에서 출토된 불상이 새겨진 석탑의 몸돌, 신라시대 가장 규모가 큰 석등, 원숭이 얼굴모습의 달리는 석상 등등의 유물들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경주시는 고증을 거쳐 경주읍성의 흔적을 따라 발굴정비복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17년이면 읍성의 동쪽성벽과 동문이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장기적으로 북쪽 성벽과 북문도 복원되고 역사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로 가득한 경주에 고려와 조선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새로운 역사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시가지 도심지역 깊숙이 자리한 경주읍성 구역을 걸어 다니며 오래된 시간을 추적해보는 것도 역사기행의 별미일 것이다.
◆경주읍성의 조성과 붕괴
경주읍성 축성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에 ‘현종 3년 경주와 장성, 금양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1012년 경주방어사를 두면서 읍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경잡기에 ‘장마철이 되면 자주 범람해 고을에 피해가 커 현종 연간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 수해를 방지했다’는 기록으로 경주읍성의 일부가 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동경통지에 ‘읍성은 시축연대는 불명이고 고려 우왕 1378년에 개축했다. 둘레가 4천75척이고 높이가 12척7촌으로 돌로 축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읍성의 규모와 돌로 성을 쌓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남문은 징례문, 동문은 항일문, 서문은 망미문, 그리고 북문은 공신문이다. 징례문 밖에 구릉이 있고 고목이 울연한데 올라가 성내를 바라보니 이를 봉황대라 부른다’는 기록으로 동서남북으로 성문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읍성 축조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경주읍성에 대한 개축공사도 다양하게 진행됐다. 문종 당시 경주읍성은 둘레 4천75척, 높이 11척6촌, 적대 26개소, 문 3개소, 여장 1천155첩, 우물 83개소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주읍성에 지금은 해자의 모습이 없지만 해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종실록에는 아직 해자를 개착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실록에 경주 북천의 물길이 읍성을 향하여 곧바로 흘러 성 아래 해자가 모두 메워지고 막혀 제방과 해자를 수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이에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해자는 문종원년에서 세조 12년 사이, 1451년에서 1467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임진왜란 등의 전란이 있을 때마다 파손되고 개축되었다. 문종실록과 경주읍지 등에 무오개축, 문종원년에서 세조 12년 간의 개축, 숭정임신(1632년)의 중수와 영조 연간 개축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주읍성은 크게 파손됐다.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때보다 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동경잡기는 임진난 때 불타 숭정 임신년에 부윤 전식이 남문과 북문, 동문, 서문을 중수했다는 것과 서북에 위치한 삼문을 차례로 보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선생안(府先生案)의 기록으로 보면 영조 때에 여러 차례 경주부성을 개축하고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는 내용들이 드러난다. 1천300m의 성을 영조 22년(1746년) 2천300m 규모로 크게 확대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본인 학자 관야정은 1902년 경주읍성의 현황을 기록하면서 곡성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과 남문루 사진 등을 실어 그때까지 성벽이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12년 일본의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석굴암을 순시할 당시 남문을 철거하고, 노동과 노서를 구분하는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다. 당시 경주읍성이 크게 훼손됐다. 또 1933년 일본인의 기록에 경주읍성의 잔해만 남아 있다고 나타나 당시 이미 대부분 허물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읍성의 흔적
경주읍성 구역 내부에는 경주경찰서, 대구지법 경주지원, 계림초등학교, 구 경주여중 등의 공공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병원과 개인주택 등으로 사유화되면서 도시개발이 진행되었다. 관공서 정원과 담벼락 등에는 당시 석재들이 지금도 쉽게 눈에 보인다. 경주읍성 구역 안에 있는 모 병원 앞의 정원석으로 당시 석재들이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주택에도 다양한 모양의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계림초등학교 화단에는 당시 석재들을 모아 삼층석탑을 쌓아두고, 조경석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계림초등학교 앞에는 대규모 장방형 돌로 형성된 석굴이 남아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얼굴 그림을 모셨던 건물 집경전의 보관창고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때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지만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불에 타고 어진은 강원부로 옮겼으며 현재는 그 자리만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조 건물은 소실되고 돌 구조물은 집경전지와 관련된 보관고로 추정된다. 구조물은 높이 3m, 길이 8m, 폭 6m 규모로 터널모양으로 남아 있다. 옛 경주여자중학교 부지에 정조 친필로 새긴 ‘집경전구기비’(集慶殿舊基碑)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초석들이 20여점 그대로 남아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좋을 석재들이 전시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앞에 ‘석탑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이라는 안내표지와 함께 사천왕이 정교하게 부조로 새겨진 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두텁게 양각되었으며 아주 사실적으로 그림그리듯 새겨져 예술성이 뛰어나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는 보기 드물게 부처가 새겨진 석탑의 몸돌이 ‘경주읍성 구역에 있던 것으로 옮겨왔다’고 소개되고 있다. 또 박물관의 신라미술관 서편에 신라시대 가장 규모가 큰 석등이 서있다. 이 석등도 경주읍성구역에서 옮겨온 것이다.
남아 있는 경주읍성의 흔적들은 일부 기록물들과 연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아픔을 겪었을 선조들의 고통을 어렴풋 느낄 수 있다. 둥글게 닳거나 깨어지고 이끼가 낀 석재들을 보면서 신라의 패망으로 경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음을 느낄 수 있는 증거물로 남아 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일반백성들의 주거지보다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관사와 시설물들로 집중돼 있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관아, 군사시설과 군사훈련시설, 무기고와 창고 등의 흔적들은 당시 지도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관청과 관사로 사용되었던 시설들의 일부는 지금까지 경주문화원 등에 남아 있다.
◆경주읍성 발굴과 정비복원사업
경주읍성의 흔적은 동쪽성벽 일부가 남북으로 다소 길게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허물어졌다. 남쪽성벽과 서쪽성벽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부지도 대부분 사유지로 개발되면서 발굴작업도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다. 경주시는 경주읍성 발굴정비복원사업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지만 부지매입조차 일부지역을 확보하는데 그쳐 전체 복원사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은 동쪽성벽과 동문, 북문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주시가 2014년부터 북부동 1번지 일원을 사적 제96호로 지정해 경주읍성 정비복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거점 기능회복, 도심환경 개선, 관광자원 확충을 목적으로 2017년까지 동쪽성곽과 동문을 복원한다. 기존에 남아 있는 성벽 129m를 보수하고, 195m를 새로 쌓아 324m의 성벽을 복원한다. 또 치성 3개소도 복원해 경주읍성은 적군이 성으로 침입하는 것을 살피고 쉽게 물리치기 위해 돌출되게 쌓은 치성으로 조성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주시는 이어 동쪽과 북쪽의 성벽 770m를 복원하고, 북문지도 복원해 역사도시환경을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약 1㎞의 성벽과 동문과 북문이 복원되고, 편의시설을 설치해 공원으로 조성하면 경주의 새로운 역사문화자원으로 관광명소가 탄생하게 된다. 천년 신라의 역사문화에 고려와 조선시대를 잇는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경주의 의미 깊은 역사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읍성은 신라의 멸망에 이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대적 역사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이다. 신라시대 문화와 고려, 조선시대의 문화가 중첩된 지역이다. 경주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문화자산으로 부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인 것이다.
역사문화 전문가들과 경주지역의 관심 있는 사학자들은 “경주에 신라시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도 있고, 조선시대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라며 “경주읍성에 대한 전반적인 발굴작업과 함께 정비복원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주읍성구역에서 발견되는 신라시대 석재들을 보면 어디서 옮겨온 것인지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인지 모호한 부분이 허다하다. 역사기행에서 살펴보는 다양한 관점도 재미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신라 천년의 시간을 지우고
고려시대에 경주라는 고을 이름을 짓고는
도시를 읍성 안에 새롭게 형성한 흑역사....................
2023년 7월 현재는 동쪽의 성벽과 치성, 동문이었던 향일문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경주시는 또 동쪽과 북쪽 발굴을 마친 성벽 200여m 복원한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