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에 관해
물에 대해 마무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太一生水라고 하는 문헌의 소중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대인으로서 리얼하게 느껴야 할 새로운 우주관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문헌입니다.
太一生水라는 말은 太一이 물을 생한다는 뜻이다. 수는 다시 태일을 생하고, 이러한 cocreation, 즉 같이 生하는, 같이 창조하는 과정이 전개되어서 歲까지 갔다.
cocreation 같이 창조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태일과 물의 관계 사이에서 결국, 시간이 완성되는 것이다. 태일생수적 세계관으로 보면, 물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물이 시간을 창조한다.
이 말은 너무도 맞는 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로 이루어진 생명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태일생수는 일관되게, 이 세계는 물이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A가 B를 생하고, B가 A를 생하고, B가 C를 생하고, C가 B를 생하고, C가 D를 생하고, D가 C를 생하는 관계에서는 어느 일자로의 방향이 없다.
전체가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착종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시간 방향이 나오지 않는다. 직선적 방향이 없으면, 결국 창조도 종말도 없는 것이다. 그럼 과정만 있는 것이다.
동양인의 세계관에는 창세론도 없고, 종말론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삶의 과정이다. 내가 죽으면 그 과정은 또 다른 사람이 이어간다. 즉 끊임없는 과정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불교에서는 華嚴이라고 한다.
@ 一卽一切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아니다. 화엄철학의 중심 명제
일본의 쿄토에 가면, 삼십삼간당이라는 게 있다.
@ 三十三間堂 京都市 東山區 七條大和 대로에 있는 천태종의 절. 1164년 성립. 1001体의 千手觀音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카마쿠라 시대의 걸작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이 33칸이다. 등신불이 1,000개가 들어가 있다. 그 부처의 광배 모습이 화엄 사상의 극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부처님에 시간과 공간이 얶혀 있다는 영감을 준다.
나라는 존재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 항상 관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은 물을 통해서 본 이 들의 궁극적 의미는 물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물을 생하고, 물이 생했다고 한다면, 물이 곧 하나님인 것이다.
물이 곧 하느님이다. Water is God.
과거에 우리 민중들이 장독대에 가서, 그 대자연을 향해서, 왜 청수 한 그릇을 받쳐놓고, 절하고 빌었을까? 물이 곧 하나님이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빌었다. 이건 샤머니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건 모든 종교의 본질이다. 물이라는 것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물이 우리 생명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아무리 환경 캠페인을 해도 소용이 없다.
@ 환경론(ecology)의 문제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힌 물이 다 자신이 마셔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는 물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水神이라고 했다. 물이야말로 가장 신령스러운 하느님이다.
@ 水神 물이야말로 가장 신령스러운 신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경 문제가 일어난 원인은, 우리의 환경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취하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천지야말로 하느님이고, 우리 생명의 원천이다.
그래서 이 사회가 이렇게 물 한 모금이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과거에 왜 청수 한 그릇 떠놓고 절하고 빌었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냥 평범한 제식이 아니었다.
2. 관자의 수지편
管子라는 책이 있는데, 선진 문헌 중에 대단히 희안한 책 가운데 하나이다.
@ 管子 현존하는 것은 79편. 春秋時代 齊나라의 명 재상 管仲의 이름에 기탁한 철학논서.
장자랑 비슷한 책이다. 관자는 전설적으로 공자가 존경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했던 사람으로 논어에 나온다. 제나라의 대단한 재상이었던 관중이 지은 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고대로 올라가 직하학파라고 하는 사람들의 논문 모음집으로 여겨지고 있다.
@ 稷下學派 직하는 산동성 臨潛縣의 북쪽에 있던 땅이다. 전국시대 齊宣王이 학자를 우대하여 天下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이 번창하였다. 이를 稷下之學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관자라는 책에 水知篇이라는 재미있는 글이 있다. 이 수지편과 태일생수가 같은 맥락의 사상으로 여겨진다. 거의 동시대 문헌으로 보인다.
고대 문헌이 발견되면, 현재 문헌과 비교 연구를 한다.
관자의 수지편에 물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지, 고대인은 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도록 한다.
[地者(지자) 萬物之本源(만물지본원) 諸生之根菀也(제생지근원야)] 땅이라는 것은 만물의 본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美惡賢不肖愚俊之所生也(미악현불초우준지소생야)]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모두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水者(수자) 地之血氣(지지혈기) 如筋脈之通流者也(여근맥지통류자야)] 물이라는 것은, 땅의 피요, 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근육과 혈맥이 있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고, 흐르게 해주는 것과도 같다. [故曰(고왈) 水(수) 具材也(구재야)]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何以知其然也(하이지기연야)] 어째서 그러함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曰(왈) 夫水淖弱以淸(부수뇨약이청) 而好灑人之惡(이호쇄인지악) 仁也(인야)] 말한다. 대저 물은 부드럽고 유약하여, 깨끗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기를 좋아하니, 인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視之黑而白(시지흑이백) 精也(정야)] 그리고 우리가 깊은 물을 쳐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미로운 성질이다.
[量之不可使槪(양지불가편개) 至滿而止(지만이지) 正也(정야)] 물을 됫박에 잴 때 위를 고르는 막대기를 쓰지 않아도 그것은 됏박에 차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바른 미덕이다.
[唯庶不流(유서불류) 至平而止(지평이지) 義也(의야)] 물은 차이가 있을 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면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人皆赴高(인개부고) 己獨赴下(기독부하) 卑也(비야)]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위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물은 자기 홀로 항상 밑으로 간다. 이것이 물의 겸양의 미덕이다. 낮춤의 미덕이다.
[卑也者(비야자) 道之室(도지실) 王者之器也(왕자지기야)] 낮춤이라는 것이야말로 도가 깃드는 곳이요, 왕의 그릇이다. [而水以爲都居(이수이위도거)] 물은 진정코 항상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準也者(준야자) 五量之宗也(오량지종야)] 수평(건축에서 쓰는 재는 기구)이야말로 모든 형량의 으뜸이다.
[素也者(소야자) 五色之質也(오색지질야)] 물의 무색이야말로 모든 색깔의 바탕이다.
[淡也者(담야자) 五味之中也(오미지중야)] 물의 담박함이야말로 모든 맛의 중용이다. [是以水者萬物之準也(시이수자만물지준야) 諸生之淡也(제생지담야)]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만물의 기준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는 담박한 체액이며, [違非得失之質也(위비득실지질야)] 모든 시비와 득실의 바탕이다.
[是以無不滿, 無不居也(시이무불만무불거야)] 그러하므로 물은 채우지 아니함이 없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集於天地(집어천지) 而藏於萬物(이장어만물)] 물은 하늘과 땅에 가득차며, 만물 어느 곳에도 깃들지 아니함이 없고
[産於金石(산어금석) 集於諸生(집어제생) 故曰水神(고왈수신)] 쇠덩이, 돌바위에도 생하지 아니함이 없고, 모든 생명을 활성화시키지 아니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물의 예찬이다. 물에 대한 성질을 깊게 통찰해서 이러한 철학적 문헌을 남긴 것이다. 동양인의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 문헌은 2,400년 된 문헌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환경단체가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을 보다 경건하게 바라볼 줄 아는 근본적인 철학과 새로운 종교관이 생겨나야 한다.
21세기 우리 인간의 최대의 과제는 환경론의 문제들이다. 우리 국민은 환경의식이 없는 정치지도자를 경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을 지킬 수 있었을까? 삼천리 금수강산에 대한 신적인 경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자의 물의 사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
3. 제 9 장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예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持而盈之, 不如其已] 그걸 지니고서 가득 채우는 것은 제 때에 그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 近仇首王條에 나와 있다.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을 때,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어 대파시키고 水谷城 서북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백제의 장군 막고혜(莫古海)가 간하였다.
막고혜라는 장군이 신라 쪽에서 쳐들어왔다가 백제가 진격을 한다. 그래서 적진 깊숙이 파고 든다. 그 때 막고혜가 더 이상 진격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 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그치는 일만 같지 못하다. 더 진격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혈기를 부리지 말고 그만 물러나라.
이를 통해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미 왕실에서 노자를 배우고 있다는 게 나온다.
고구려 보장왕 때 연계소문의 건의로 도교를 펴니 黃冠道士가 와서 道德經을 講하였다.
노자가 우리랑 관계없는 문헌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여러 번 인용된다. 당나라에서는 당태종이 노자가 같은 이씨라 해서, 굉장히 숭상했다. 그래서 신라 때 많이 들어왔다.
구체적으론 원효대사가 노자를 달달 외웠다. 대승기신론소에 보면 노자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
@ 원효의 대표작 大乘起信論疏記는 노자도덕경의 완전이해 위에 서있다.
노자를 잘 몰랐다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노자는 몇 천년전부터 우리 것이었다.
[揣而銳之, 不可長保] 그것을 갈아서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이 없다.
칼이라는 것은 날카롭게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무뎌지게 마련이다.
@ 企者不立 까치발로 서 있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칼을 일본인이 갈 때, 제일 마지막에 장인들이 손으로 칼을 간다. 일본의 철강 기술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일본의 정밀함은 대단한 것이다. 다 백제나 이런데서 간 기술들이다.
일본 고대사에서 渡來人이니 歸化人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은 실상 조선반도에서 유입된 선진기술을 소유한 지배자(ruling class)를 지칭하는 것이다.
날카롭게 해봤자 무뎌진다는 말이다. 자연은 무딘 방향으로 간다.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과 옥이 집에 가득 차 있으면 그래봤자 지킬 길이 없다.
莊子라는 책이 있다. 죽간본이 나오기 전까지 노자는 장자에 나오는 노자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위서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장자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죽간본이 나오면서 이 주장은 완전히 깨졌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전목(錢穆)이 했었다. 전목 선생은 역사 분야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계신 분이다.
@ 錢穆(1895~) : 江蘇省 無錫의 사람 금세기 중국의 대표적 사학자, 사상가, 대표작으로 中國近三百年學術史(1937) 등이 있다.
장로통변이라고 해서 항상 장자를 먼저 앞세웠었다. 지금은 노장사상이 되었다.
@ 莊老通辯 : 錢穆선생이 老子가 莊子 후에 생겨난 저작이라고 우긴 논서.
이 분은 의고풍 학자다. 1919년 오사운동이 일었는데, 이는 중국문명을 모두 의심하는 거였다.
@ 疑古風 개화기 중국신문화운동의 대사조, 중국 고문헌의 성립 과정으로 과학적으로 분석, 그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打倒孔家店을 외치며 모든 권위에 도전하였다. 古史辨 전집은 이 운동의 기념비적 논문집이다.
의고라는 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문명은 모두 거짓이라는 관점에서 고대문헌을 모두 비판한다. 여기에 유명한 분으로 구제강이 있다. 1910년대에 이런 학자들이 풍미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의 주장은 틀린 게 많다.
@ 顧頡剛(구제강, 1893~1980) 疑古風을 대표하는 고전학자, 역사지리학자 胡適의 제자 古史辨을 편집
하지만 이 사람들은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다. 1910년대에 그런 사상 운동이 나타나서 중국 문명이 유구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모두 비판해서 새로운 학문을 하려고 했다. 이 사람들이 발간한 잡지인 신청년은 대단한 잡지였다. 호적, 전목, 고일강 등이 논쟁한 내용을 보면, 대단하다.
@ 新靑年 五四신문화운동을 대표하는 월간지. 1915년 9월 陳獨秀가 창간. 20세기 초 중국 문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자기 부정의 반성이 없는 국수주의 학문은 천박한 독단(dogma)에 불과하다. 중국은 20세기 초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쳤으나 한국은 그러하지 못하다. 한국의 국학은 아직도 국수주의 타성에 머물러 있다.
중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신비화시키려는 것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단군이야기며, 천부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어서 오히려 다행인 측면이 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더 미신적으로 갔을 것이다. 기독교는 보편성이 있다. 기독교는 아무리 잘못가도 전세계의 보편주의라는 기반이 있다.
기독교는 보편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다.
4. 장자의 지혜
장자라는 문헌은 노자에 비교하면 훨씬 후대 문헌이다. 장자는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그런데 맹자와 장자는 서로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면이다.
장자라는 책은 엄청난 메타포, 은유, 비유로 가득찬 이야기 책이다. 노자 사상을 우리가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었다. 노자는 첫 장에 도가도비상도와 같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나오지만, 장자는 대붕이 구만리 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로 스타일이 다르다.
한학에 능한 외할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어려서 들었다.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마어마한 보석을 구했다. 이 보석을 보관하기 위해 좋은 금고를 샀다. 그리고 그 금고를 어마어마한 철책방에 넣었다. 이어서 창문도 없는 쇠로 만든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높은 담을 쌓았다. 그렇게 하고도 불안해서, 어떤 섬에 이것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완전히 철통같은 방비를 해놓았는데, 어느말 도둑놈이 섬을 통째로 들고가 버렸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메타포이다. 그리고 장자가 말하길, 藏天下於天下라고 했다.
藏天下於天下. 莊子 大宗師
오늘날의 기업인, 정치인들이 배워야 하는 말이다. 천하를 천하에 감추라는 말이다. 즉 감출 수가 없다. 명명백백하게 살 수밖에 없다. 멋진 메타포다.
이런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어려서 깨달음을 얻으면 평생 간직하고 살 수 있다.
어릴 때 배운 고전의 한 구절은 그 인간의 일생을 지배한다. - 도올 -
5. 9장
[富貴而驕, 自遺其咎.]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뿐이다.
부귀는 잘 쓰는 말인데, 부는 돈이 많은 것이고, 귀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라면 과거시험을 보아서 관직을 얻는 것이 귀였다.
富 : Economic wealth(경제적 부) 貴 : Social position(사회적 지위의 높음)
[功遂身退, 天之道.]
물러난다는 것은 노자 사상에서 보면 그것이 나아가는 것도 된다.(2장)
물러나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인생을 한 방향에서 생각한다.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알고, 나아갈 때는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거대한 굴레에서 이루어지는 사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동양사상은 모든 세계를 양면적으로 바라보라고 한다. 한 면만 바라보면 안 된다.
서양 사상은 사람을 자꾸 한 면으로 제한시킨다. 예를 들면,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도 자기 스타일로 그리라고 한다.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평생 변화를 하고, 근원적으로 그 이즘이 다르다. 평생을 통해 여러 그림을 그리다가, 그것이 통합되면서 자기 그림이 나왔다.
한국 화가는 항상 그 스타일이 똑같다.
우리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넓으면 깊이가 없고, 깊으면 넓이가 없다는 말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을 못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을 못쓴다. 언변이 능한 사람은 사상의 깊이가 없다. 이런 말들이 우리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깊으면 넓을 수밖에 없고, 넓으면 깊을 수밖에 없다. 글을 잘 쓰면 말을 잘 할 수 밖에 없다. 말을 잘 할 수 있으면 글을 잘 쓸 수 밖에 없다.
잘못된 말로 우리 젊은이들을 묶어놓고 있다. 일면만 강요함으로써 근대 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 사상은 항상 양면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본다. 물러나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이고, 앞으로 가는 것이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전관해야 한다.
@ 全觀 : Total View
우리나라는 전체를 동시에 보는 교육을 안 시키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르치는 자들이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재능이 빨리 개발이 되면, 자기들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계를 밟으라고 한다. 까불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위축시키는 형편없는 교육을 해서 우리나라가 망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면성과 단계성에 묶어두는 교육은 교육자들의 부족한 실력이 빚어놓는 비겁이요, 위선이다.
동양사상이라고 하면, 전부가 고리타분하고, 사람을 욱박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동양사상처럼 위대한 해방철학이 없다. 동양사상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것을 가르쳐야 한다.
노자 철학은 비권위주의적인 해방사상이다. Lao Tzu emancipates man from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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