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향교를 돌아보고 나오니 바로 앞에 전주 동헌과 장현식 고택이라는 건물이 있다.
현재의 전주시청에 대응되는 조선시대 관아인 전주동헌은 풍락헌 또는 음순당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민간에 매각되었으나 전주동헌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찾기 위한
현 송하진 전주시장의 노력과 소유주였던 유인수 선생의 기증으로 한옥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주동헌은 120년 된 옛 건축물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현판의 풍락헌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 전주를 안락하는 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던 일송 장현식 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시
금구면 서도마을에 건축했던 고택(안채와 중간채)도 동헌과 함께 한옥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독립운동가요 사회사업가와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선생의 의로운 뜻과 고난의 연대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장씨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긴 고택은 목재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임실 진참봉 고택 사랑채도 장현식 선생 고택 앞에 자리했다.
전주시는 동헌과 고택이 한옥마을에 복원 이축된 것을 계기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위상에
맞게 ‘가장 한국적인 연수’를 진행하는 ‘전통문화연수원’으로 동헌과 고택을 활용하고 있다.
풍락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전주 동헌.
작년에 처음 봤을대 현판이 왜 우측에 치우쳤는지 궁금했었는데 현판은 관아로 쓰이는 부분만 숫자로 계산하기에
제일 우측방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한옥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현식 고택
사랑채는 임실 진참봉 고택을 옮겨온 것이다.
전주 전통문화연수원장께서 한옥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해주셨다.
문짝 하나에도 과학성이 있다.
미닫이와 여닫이가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문고리 하나에도 정성이 들어있다.
대들보의 아름다움
석전의 글을 새긴 다탁
한옥창틀과 창호의 과학성을 설명해주는 전통문화연수원장
모과나무와 돌확도 한옥을 이축할때에 함께 옮겨온것 이라한다.
사람들이 모과나무를 보고 세번 놀랜다고 한다.
열매가 못생겨서 놀라고, 그 향기가 좋음에 놀라고, 그 열매가 맛없음에 놀란다는것이다.
모과나무의 열매. 나무에 달리는 참외 비슷한 열매라 하여 목과(木瓜) 또는 목과(木果)라 쓰기도 한다. 산미가 강하고 단단하며 향기가 강한 열매로, 가을에 노랗게 익는다. 과육을 꿀에 재워서 정과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과실주 또는 차로 끓여 먹기도 한다.
특히, 한방에서는 서근(舒筋)·청간(淸肝)·화위(和胃)·제습(除濕)·조혈(造血)의 효능이 있다고 하여 약용한다. 약성은 온(溫)하고 산(酸)하여 신경통·근육통·습비통(濕痺痛)·각기(脚氣)·수종(水腫)·해수(咳嗽)·빈혈(貧血) 등에 치료효과가 높다.
민간에서는 감기에 차로 끓여 마신다. 모과차는 모과를 얇게 저며 꿀이나 설탕에 재워 두었다가 끓는 물에 모과 두세 쪽과 항아리에 고인 즙을 타서 마신다.
모과나무는 집 주변, 마을의 빈터에 많이 심고 있다. 과원을 개설하는 일은 드문 편이나 경상북도 의성 지방에서 대량으로 식재한 예가 있다. 예전에는 충청남도 공주 지방의 모과가 좋다는 말이 있었다.
모과는 생식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며, 또 형태가 울퉁불퉁하여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