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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김치냉장고
최순희
“무슨 말이야? 그 김치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대뜸 짜증스런 소리다. 참 내가 뭐랬다고 저럴까.
“김치가 맛있다고?”
“김치찌개 하면 얼마나 맛있는데, 그러니 그대로 가만 놔둬.”
“그런데 네 지금 어디야? 대체 어디 있는 데?”
“왜 자꾸 물어. 기다리지 마.”
전화가 뚝 끊어졌다. 그 남자는 내가 잔소리를 더 할까 봐선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간 전화도 안 되었는데 오랜만에 통화라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지가 오히려 큰소리를 치다니 안부 말 하나 없이 싸가지다. 나는 얼른 그 방으로 가서 그 남자의 김치냉장고에 귀를 대었다. 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없다. 김치냉장고를 발로 툭 찼다. 그러자 김치냉장고가 위잉-하고 전기가 돌기 시작했다. 애꿎은 김치냉장고에 눈을 흘겼다. 그 방에는 그 남자의 가족이 오롯이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을 눈동자 여섯 개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라 괜스레 눈치가 보여 얼른 나왔다. 나는 우리 집에서 남편과 나, 우리만 사는 게 아니고 그 남자의 식구들과 같이 동거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 방문은 닫아놓는다. 여름철에는 어쩔 수 없이 열어 환기를 시키지만.
제일 안쪽 벽에는 벽을 등지고 흰색의 키가 큰 에어컨이 서 있고 그 옆에 장식장이 나란히 있다. 좌로는 길게 가로로 눕혀놓은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가 있고 그 옆에는 검자주색의 사각 큰상 2개가 다리를 접고서 종이박스 안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창문 아래 드림세탁기와 김치냉장고가 나란히 놓여있다. 세탁기 위에도 라면박스들이 포개져 있다. 커다란 직사각형 티비도 종이박스에 싸여있다. 그리고 장식장 앞 방바닥에는 아주 튼실한 책상이 있고 그 위에도 박스들이 포개져 쌓여있다. 앙증스런 다탁 위에도 네모 박스들이 얹혀 있다. 현규 책, 현규 옷, 현규 앨범이라고 유독 현규 것만 유성매직으로 커다랗게 적어놓았다. 테이프를 바르거나 노끈으로 묶은 박스들인데 그릇들이 포개졌는지 법랑 냄비 손잡이가 튀어나온 것도 있고, 노란 알루미늄 큰솥 뚜껑 모서리가 보이기도 한다. 서류 넣는 서랍장도 보이는데 사진액자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저들 결혼사진과 가족사진이 대형액자에 걸려 있는 것을 전에 보았는데 액자 사진들은 다 버렸는지 가져오지 않았다. 문갑 위에 놓아두던 장식품도 베란다에 반들반들하던 된장 고추장 항아리들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골프가방이며 테니스라켓과 배드민턴 가방들은 책상 아래 있고 불룩한 등산 가방도 몇 개나 포개져 있다. 어째든 사람을 대신하여 세간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였는데 마치 그네들 식구들이 오종종하니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박스들을 훑어봐도 기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젠 그 기타도 부셔버렸나? 애지중지하던 기타이니 그거 하나는 들고 갔을까? 아니야, 지헌이가 지금 기타 띵띵 거릴 상황이 아니지. 지헌이 기타에는 추억이 많다. 지헌이 중 3때 아버지께 호된 꾸중을 들으며 방앗간에 쌀가마니를 내어 장만한 세고비아기타이다. 지헌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불렀다. 우리는 지헌이 기타에 맞추어 봄 처녀, 메기의 추억, 즐거운 나의 집 등 학교에서 배운 가곡은 다 불렀다. 봄날 아지랑이가 피는 언덕에서 여름날 밤 생 쑥 모깃불이 피어오르는 마당의 평상에서 보석처럼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노래하였다. 밤에 부르는 노래는 담장을 넘어가 이웃집 처녀 언니들이 다 모여들어 어느새 합창이 되었다. 돌아와요 부산항, 단발머리, 고래사냥, 님과 함께 등 라디오에 유행하던 노래는 다 불렀으니까. 지헌이는 그 기타를 들고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인기상을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학교의 음악 선생님이 건반을 타던 하얀 손길이 너무도 황홀하여 기타보다 그림의 떡인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나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 지헌이네 살림을 들여놓자고 하던 그 날 언니는 예사로 말했다. 뭐 오래가겠냐. 저들 소중한 살림인데 거처 정하면 냉큼 가져가겠지 하고. 그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알게 뭐냐며 내가 투덜거리자 언니는 동생한테 악담을 해라 비어있는 방에 잠깐 두자는 건데 하였다. 내가 악담을 안 해도 그 잠깐이 벌써 몇 년째인가. 생각해보니 저놈의 김치냉장고랑 살림살이들이 들어온 지도 어언 이태가 지나고 삼 년 차로 접어들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내 살림이 아닌 남의 짐이라는 것은 이상하게 거치적거려진다. 더구나 33평 아파트에서 방 하나를 아예 없는 듯이 문 닫아놓고 산다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남자에 대한 불평이 새어 나오려 꿈틀거렸다. 못난이 등신 바보자식! 그러게 김치 잘 담그는 와이프랑 알콩달콩 잘살지 왜 헤어져서 집도 절도 없이 지가 개고생 하는데? 불쑥 성질이 나서 그래 얼마나 맛있는 김치인가 어디 봐, 하고 김치냉장고에 야무지게 붙여진 테이프를 떼고 냉장고 뚜껑을 열었다. 훅- 신김치 냄새가 올라온다. 김치를 많이 넣으려고 김치박스에 넣지 않고 비닐 김장 봉투를 사용하였다. 좌 쪽의 냉장 칸에 든 단단히 묶인 두 겹 김장비닐봉투를 풀었다. 신김치 냄새만 아니라 쿰쿰한 냄새까지 풍긴다. 아직 김치가 많이 있다. 맛있다고 우기는 김치는 얼마 꺼내먹지도 않았잖아. 비닐장갑 낀 손으로 김치를 만지니 우듬지는 곶까지가 끼여 물렁거렸다. 그걸 제치고 아래쪽 김치 반쪽을 꺼내어 그릇에 담았다. 다시 비닐봉투를 본디처럼 잘 묶어서 뚜껑을 덮고 테이프를 붙였다. 꺼낸 김치를 주방으로 들고 와서 보니 김장김치의 붉은 고추빛깔이 사라진 김치다. 가위로 속살을 조금 잘라 입에 넣어보니 김치가 질기고 신맛에 눈이 감기고 고개가 흔들렸다. 김치가 맛있다고, 개뿔이다 야. 김치찌개를 해봐. 나는 김치를 적당히 썰어 냄비에 넣고 텀벙텀벙 썬 돼지고기도 집어넣어 들기름에 달달 볶다 쌀뜨물을 넉넉하게 부었다. 센 불에 끊이다 보글보글 끊을 적에 불길을 조금 약하게 하여 김치찌개를 은근히 끊이기 시작했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대파와 양파를 어섯 썰어 넣었다.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한참을 끊고 난 뒤 숟가락으로 맛을 보았다. 아 이걸 어째! 오래 익혔건만 김치가 아삭아삭 익지 않고 시래기 사촌쯤 질겼다. 돼지고가가 아까워 참기름 한 숟가락 투하하고 생콩가루를 살살 뿌려 다시 한소끔 끊였다. 그래도 김치찌개가 맛나지 않고 돼지고기는 먹을 만했다. 지헌아, 너 아냐? 요즘 세상에 안 변하는 게 뭐가 있다고. 그간이면 사람도 변하겠다. 그런데 언니는 한 번도 지헌이네 김치를 먹어보려 하지 않았다. 김치냉장고가 들어온 날, 내가 김치 한포기 꺼내어 맛이나 볼까 하여도 지헌이네 가져가게 그대로 두란다. 그럼 그냥 두지 설마 내가 다 꺼내먹을까.
저녁 식탁에 김치찌개를 아무 말 하지 않고 올려보았다. 남편은 무심코 한입 먹더니 어, 김치가 좀 질기네 하면서 찌개에서 돼지고기만 골라 먹었다. 이튿날 나는 김장 봉투를 풀어 맨 위의 우거지를 걷어내고 꼭꼭 눌러 다시 그대로 꽁꽁 묶었다. 오른쪽 칸의 작은 김치 통들을 다 꺼내었다. 그곳에는 두 개의 통이 있었는데 한 통에는 절반가량 꺼내먹고 남은 파김치가 아예 물러빠져 버리기도 늦었다. 다른 통에는 갓김치가 담겨져 있었는데 우거지가 하얗게 피어있었다. 그 아래에는 동그란 젓갈 통에 깻잎 장아찌와 콩잎양념김치가 두 통 있었는데 밀봉한 그대로가 아닌가. 지헌이는 몰랐는지 한 번도 꺼내먹지 않았다. 그릇에 꺼내보니 콩잎이나 깻잎 한 장 한 장에 양념을 발라가며 일일이 손이 가게 정성스레 담근 것인데 콩잎 중앙에 붉은색이 물 한 방울처럼 남아 있고는 전부 거무죽죽 변색되어 있었다. 내 가슴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김치를 담근 손끝 야무졌던 여자가 떠올랐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이르게 군대로 가버린 조카 녀석도 나타났다. 맛있는 김치라고 우기던 볼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들 가족 세 사람이 차례로 나타나는 바람에 심란해져 울컥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밉기도 하였다. 이보게, 이렇게 살뜰히 밑반찬 해놓고 김장 저렇게 담가놓고 자네는 어디 갔어? 어디 갔느냐 말이네. 동생은 자네가 담근 김치 아직도 맛있다고 하면서 나보고 빈말이라도 김치 꺼내어 먹어보란 말 안 했어. 그 김치 아끼느라 말일세.
언니의 전화를 받고 택시로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 접수대에서 입원환자 이름을 확인하고 2층 병실을 찾아가니 언니도 좀 전에 도착하였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있었다.
“지헌아! 지헌아!”
내가 이름을 부르며 몸을 흔들어도 지헌이는 벙어리가 된 듯 말 한마디를 않았다.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숨소리도 없었다. 링거액만이 천천히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올케를 찾았다. 올케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하염없이 창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현규야, 많이 놀랐지? 어쩌다가?”
올케는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도 핼쑥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찡긋 눈치를 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병실에는 착잡하게 가라앉은 적막감만 흘렀다. 우리는 복도 휴게실로 나왔다.
“사람이 어리석어도 어느 정도여야지. 저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살아요! 단식한다고 뭐가 해결되는지.”
지헌이가 사기를 당했단다. 그것도 고향 고교동창에게서. 일은 자신이 다 저질러놓고서 잠도 안자고 화를 못 삭여 쓰러졌다고 하면서 올케는 경멸과 조소의 빛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고 동창들 간에 소문이 쫙 난 친구가 실로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타나서 동창회비에 큰돈 기부도 하고 친구들에게 비싼 밥도 사고 술도 냈단다. 그렇게 얼마간을 부지런히 동창회에 얼굴을 내민 부자 친구가 결국은 세치 혓바닥으로 친구들에게 따로따로 점조직사기를 쳐서 재산 좀 있다고 소문 난 친구는 물론 통닭집친구, 횟집친구, 구두수선 하는 친구 돈까지 빼내어 해외로 날라버린 사건이 터졌다고 하였다. 처음에 높은 이자를 제 날짜에 칼같이 계좌에 넣어주며 신용을 지킨 게 화근이었다. 달아난 사기꾼 친구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차츰 동창회장인 지헌에게로 쏟아졌다. 지헌이도 덫에 걸렸다. 교묘하게 주민증을 이용한 신원보증과 언젠가 회식비 대금을 지불할 때 포인트 올려준다며 잠시 빌려간 카드를 복사한 사기에 걸렸다고 한다. 지헌과 친구 몇 명이 서울로 가 사기꾼을 찾았으나 해외로 날았다는 허망한 소식만 들고 왔단다. 목석같은 남편과 안달복달 싸우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하였다.
“눈앞이 캄캄하네요. 내 속은 뭐 태평양 바다인 줄 아는지 이젠 가장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절망과 체념의 서글픔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입에 발린 위로 따위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그런데 왜 자꾸 올케에게 미안하고 곤혹스런 마음이 들까. 그네는 우리가 잠시 밖에 나가 식사라도 하자고 하여도 요지부동 꼼짝을 않았다. 속이 비면 더 신경질이 날 터인데, 병실에 돌아와 보니 올케는 가고 없었고 식판의 밥은 뚜껑도 안 열린 채 그대로 있었다. 지헌이는 그날 밤에 링거를 떼버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올케가 집을 나가버렸다. 우리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가을날인데 옷가지도 안 챙기고 잠깐 바람 쐬러 나가듯 산책하러 가듯이 나간 올케는 그길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지헌이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그는 끝내 회사에 사표까지 내고 말았다. 집안에 술병이 나뒹굴었다. 컵라면 용기가 쌓여가고 집안 꼴은 어지러웠다. 조카 현규는 집에 있을 때면 저 방에서 꼼짝을 않는 모양이다. 동생 부부는 올케가 죽자 살자 좋아하여 한 연애결혼으로 결혼하고 잘 지내왔었다. 물론 판이한 개성과 성격 차이로 딸각딸각 싸우는 정도는 예사로 보았지만. 부부사이가 확실하게 얼음장 갈라지듯 금이 쩍 간 것은 그 사기꾼 동창 사건이 터지고서다. 기어이 기둥뿌리가 뽑혀나갔다. 지헌이는 결국 33평대 아파트를 처분하였다. 작은 빌라로 옮겨갔다. 지헌이는 여전히 말이 없고 무기력하여 갔으며 빌라에서 꿈쩍도 않고 죽은 듯이 지냈다. 우리가 한번 찾아갔을 때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길었고 수염도 깍지 않아 텁수룩했다. 초췌한 꼴은 가관이었다. 가죽 소파며 장롱이며 버리고 버려 줄인 초라해진 살림들이 속을 뒤집었다. 이제껏 근실하게 살았던 젊은이가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나 싶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부가 없는 집구석이 얼마나 찬바람이 나는 지 얼마나 설렁한지, 얼마나 뵈기 싫은지 궁둥이 붙이고 앉기조차 싫었다. 등신! 바보 멍청이자식. 도사되려고 머리와 수염 기르느냐는 언니의 억지 농담에 아무도 그는 웃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지헌이는 현규 때문에 그나마도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올캐의 소식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를 보고 벌컥 화를 내었다.
“찾아들 오지 마!”
“야, 벼슬했냐? 오라고 빌어도 꼴 보기 싫어 못 오겠다.”
본디 올케는 손끝이 야물어 반찬도 깔끔하게 잘하고 집안도 깨끗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맘먹고 하면 잘했다. 요리도 잘하고 정리도 잘했다. 지헌이나 조카 입성도 눈에 띄게 깔끔하였다. 엄마 생신이나 제사 때라도 절대로 음식을 많이 하지 않고 적정수준으로 딱 맞게 준비하였다. 그리고 포식하는 우리와는 달리 과식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결혼 20년이 되어도 군살 하나 없는 날씬한 몸매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기 맘에 안 든다거나 하기 싫거나, 할 맘이 없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손도 까딱 않았다. 깐깐한 성격에 뱃장이라 그래서 언니와 나는 올케에게 뻗장나무라고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얼굴도 동안이었다. 명절이나 행사에 시골집에 오면 동생댁은 저녁이면 일찌감치 얼굴을 말끔히 씻고 기초화장을 하고는 이불 중에서 제일 깨끗한 이부자리를 챙겨가서 남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지헌이랑 우리 형제들, 또는 사촌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면서 고돌이야, 피박이네 쓰리고네 속였네 말았네 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 치킨과 맥주를 시켜먹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그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리는 엄마 일 덜 시키려 덮던 이부자리를 덮고 늦잠에 떨어졌다. 지헌이는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고 정말 잘 불렀다. 나는 알고 있다. 지헌이의 꿈은 가수였다는 것을. 그 길은 아버지에게 손톱도 들어갈 일이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뒤봐줄 처지도 아니었다. 그 방면으로 누군가에게 손잡을 수도 없는 형편이고 보니 지헌이는 어쩔 수 없이 가수의 꿈을 아프게 접었을 것이다.
“내동댁 아들은 집안의 큰일 치루며 손 쪽박이다. 여기서도 부르고 저기서도 찾고, 노래도 잘하고 운전도 얼마나 잘해 주냐!”
곧잘 듣는 친척들 얘기이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아버지를 닮아 준수한 용모였다. 짙은 눈썹이며 우뚝한 코에 피부가 희었고 숱이 많은 머리 손질도 지헌이는 멋있게 잘 하였다. 내가 남편에게 지헌이 머리스타일로 해보라고 조를 정도였으니까. 지헌이는 집안의 경조사도 내일처럼 거들었다. 결혼식에서는 축의금 접수대를 책임졌고 상가에서도 바깥일을 도맡아 하였다. 필체가 좋아서 문서작성에는 다들 동생을 불렀다. 지헌이가 선글라스를 끼고 멋진 포즈로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노래에 다들 넘어갔다. 지헌이는 초등교와 고교동창회장을 맡아 친구들 챙겨주는 마당발이 되었다. 그러나 올캐는 지헌이 그런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였다. 오지랖 넓은 짓 한다고, 마당쇠 노릇 제발 그만 두라고 잦은 싸움이 났다. 저러다 코가 깨져 발등 찍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집안 행사에 오기는 같이 왔으나 올캐는 항상 삐친 듯 일찍 가려고 설치며 지헌이는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래선지 대개는 혼자 왔다. 그러저러한 게 그들 부부갈등의 또한 원인인 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하였다.
나는 그 후 언니가 가끔 전하는 지헌이 소식은 듣기도 싫었고 관심도 두기 싫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안 계셔 이런 꼴을 안 보시니 천만다행이지 살아계시면 얼마나 애를 태우실까. 다시는 지헌이 빌라를 찾지 않으려했는데 살고나 있는지 꼴만 보고 오자는 언니 등쌀에 국이며 반찬 과일 등을 차에 싣고 빌라를 찾아갔다. 일부러 저녁에 갔었다. 불이 켜져 있는데도 벨을 몇 번이나 누른지 한참만에야 현규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애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가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오른뺨도 터졌으며 입술도 왕창 터져 팅팅 부어있는 게 아닌가. 왼팔도 다쳤는지 껴안고 있다. 지헌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학교에서이랬지? 친구 놈들 짓이지?”
“어떤 놈들이야? 말해봐, 학교 가자. 담임 찾아가자! 전화번호 불러봐.”
아이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새 키가 껑충하게 더 컸고 삐쩍 말라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며 찡하게 아픔이 몰려왔다. 알뜰살뜰 챙기며 아들이라면 껌뻑 넘어가던 저 엄마가 떠올랐다. 아들도 남편도 버리고 손때 묻은 살림도 다 버리고 떠난 그 여자의 마음을 다시금 헤아려본다. 이젠 그녀를 향한 조금은 섭섭했던 마음도 없어지고 오죽하면 버리고 갔을까, 어디서 얼마나 힘든 삶을 버티고 있을까. 제발이지 몸이나 성해야 할 텐데. 현규 모르게 눈물을 훔치며 가져온 반찬들로 조카 밥상을 차렸다.
“현규야 많이 아팠지. 어쩌면 좋으냐? 네 아빠는 모르고 있지?”
“고모, 제가 그냥 성질이 나서 실컷 패주었거든요. 그 애는 저보다 많이 다쳤을 거예요.”
“네가, 착하기만 하던 네가···.”
“아빠는 어디 갔니? 집에 있기나 하니?”
“애가 이 지경이 된 줄도 모르고 어디를 싸돌아다녀?”
“아빠는 이제 삶을 포기한 사람 같아요. 그나마도 저 때문에 가까스로 버티시는 거예요.”
“현규야 엄마는 네 보고 싶어 꼭 돌아오실 거야.”
“저는 엄마 아빠 다 너무 원망스러워요.”
현규의 눈에 분노와 절망의 눈물이 그렁그렁 비쳤다. 우리는 애 앞에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엄마가 집 나가기 전까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조카가 아닌가.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가 비틀거리는 집, 생각하면 조카의 처지가 제일 억울할 것이다. 예민한 고3인데. 집에서 떠받들고 있을 입시생인데. 자식은 삐뚤어지든 말든 그저 자신들만 생각하지. 정말이지 물 한잔 얻어 마시지 않아도 오순도순 저들끼리 잘 살아 걱정 안 끼치는 게 얼마나 좋으랴. 이렇게 가슴 찢어지게 걱정만 안 시켜도 고마운 일이 아닌가. 친구들 형제자랑에 귀 막은 지 오래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이 남자는 뭘 잘했다고 아이도 안 돌보느냐 말이다. 이 꼴을 안 봐야지 정말 못살아!
지헌이도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현규가 대입을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하고 난 뒤 바로 집을 나갔다. 반찬들을 싣고 지헌이를 찾아갔던 우리는 불 꺼진 빈집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쯧쯧, 곰 재주부리듯 참 가지가지로 애먹인다 싶어 밉기도 하였지만 불안한 걱정이 앞을 가렸다. 누구에게 내색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다 언니와 전화통화만 해도 눈물을 찔끔거렸다. 지헌이랑 올케랑 하는 짓이 어찌 그리 닮았어.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하면 언니는 꿈자리만 나빠도 동생 몸이라도 안 좋은가 싶어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걱정스런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언니로부터 지헌이가 부산이나 서울에 있다는 말을 풍문처럼 들었다. 강원도며 제주에도 머문 모양이었다. 우리는 현규 엄마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거라고 예단하였다. 전화도 연결되지 않는 세월이 흘렀다. 괘씸하여 피붙이고 뭐고 다시는 상종을 안 하려던 마음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니 동생이 어디서 죽지나 않았는지, 그보다 혹여 자살이라도 하지 않았는지 그게 제일 걱정이 되어 때로는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뉴스에서 무연고 젊은 남자 자살자가 나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남극의 만년설처럼 가슴이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웬수, 웬수 못살아! 어느 날 언니가 찾아왔다. 언니는 그간 지헌이가 빌라에 돌아왔나 싶어 몇 번이나 찾아갔었는데 얼마 전 집주인 노인을 용케 만났는데 아주 심하게 화를 내더란다.
“젊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영 신용이 없구먼. 우리 두 늙은이가 그거 세받아 생활비 하는데 사람도 없고 세도 안주고 전화도 안 되고 함흥차사이니 어쩌면 좋겠소? 전기세니 관리비도 밀려있고 이래가지고는 누가 세놓겠소. 다른 말 필요 없고 세입자에게 말 전해주시오. 집 비워달라고. 안 그러면 내가 컨테이너에 살림 다 들어내겠소.”
빌라에 살림만 처넣어두고 살지도 않으면서 달세만 꼬박꼬박 나가는 셈이다. 조금 더 있으면 그나마 전세도 다 까먹을 판이다. 사실 빌라 전세금도 언니와 내가 남편들 모르게 대준 돈이다. 혼자 똑똑한 척하던 자식이 사기꾼도 몰라보고 홀라당 당하고, 건사도 못할 그까짓 살림 탕탕 부수어 내버리지 왜 남겨두었는지 모르겠다고 언니는 툴툴거렸다.
“참 언니도,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뭘 그리 역정을 내누. 저 돈 아니니 전세를 월세로 다 까먹어도 답답할 게 없으니 그러겠지. 뭐”
“살림살이에는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있으니 그러지. 사람이 죽으면 다 버리지. 그러나 그네들은 도장 꽝 찍고 이혼한 것도 아니고, 지헌이는 자는 잠결에 날아가버린 새처럼 마누라를 잃었으니 미치겠지. 찾으러 다닐 수밖에.”
“철딱서니 참 일찍도 들었다.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고 마누라 찾아 삼만리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마누라 말 잘 들으며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잖아.”
언니도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내내 구시렁거렸다. 그러더니 어렵게 입을 떼었다.
“지영아, 우리 집은 딸애들이 방 차지하고 있으니 안 되겠고 너희 빈방 말이다. 그기에 지헌이네 좀 살게 하자.”
“무슨 소리야? 지헌이가 우리 집에 와서 살라고, 말도 안 돼! 못해.”
“얘, 누가 같이 살으래? 지헌이네 짐 좀 넣어두자는 거지. 빈방에.”
“빈방이 어디 있어. 하나는 상호 방이고 하나는 책하고 컴퓨터 방인데.”
언니는 그 방을 당분간 좀 쓰자는 거였다. 지헌이네 살림을 빌라에서 빼서 옮겨놓자고 했다. 우리 집 방3개 중 방 하나에. 저번 아파트에서 빌라로 옮길 때 장롱이니 소파 등 웬만한 것은 다 버렸기에 우리 방에 충분히 넣을 수 있다고 우겼다. 마땅찮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사까지 해야 한다니 버럭 짜증이 났다. 언니는 우리가 자식이 상호뿐이라 게다가 마침 상호가 유학 중이라 방이 비는 것을 노렸다. 사실이지 집안에 방이 비는 게 어디 비어있는 것이던가. 누구 방이란 이름만 안 붙었을 뿐이지 다 쓰이는 게 아닌가. 내일이며 이사하는 날인데 언니가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다. 지헌이와 어떻게 통화가 되어 사실을 말했더니 지가 와서 이사하겠다고 했단다. 그제야 내 어깨가 좀 가벼워졌다. 그리하여 지헌이네 살림이 우리 방 하나에 들어왔다. 그 방에 있던 많은 책이며 책장들은 결국 아들 방으로 우선 옮기고 컴퓨터는 거실에 두었다. 나는 이삿짐차가 출발한다는 전화를 받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동생이 즐기던 반찬으로 정성스레 밥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본 지헌이는 탄탄하던 몸의 살이 쑥 빠져 야위었고 얼굴이 아주 검게 그을려있었다. 멋지게 잘 손질하던 숱 많던 머리는 야구모를 푹 덮어써서 보이지도 않았고 모자 아래 귀밑으로 새치가 보였다. 초라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 내 가슴을 할퀴었다. 눈빛만이 예전처럼 깊었다. 언니는 듣기 좋게 활동적인 모습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삶에 지친 사내의 모습에 문득 반 고흐의 그림, 구두 그 낡은 구두가 시야에 떠올랐다. 지헌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방하나 가득한 짐들에 대해서 미안해하거나 매형의 안부도 묻지 않았다. 지헌이는 김치냉장고에 전기코드를 꼽으면서 한마디 했다.
“작은누나 이 김치냉장고 전기 끄면 안 돼. 맛있는 김치가 들어있거든.”
“얘, 네가 무슨 김치를 담갔다고 김치 있다니?”
“내가 담은 게 아니고 그 사람이 담아놓은 김치야.”
“그게 언제인데, 김치냉장고래도 너무 오래된 묵은지가 무슨 맛이 나려고?”
“아니라니까. 그냥 밥반찬 해도 맛있고 라면하고 먹으면 짝꿍이야. 김치찌개도. 내가 다른 것은 남들 줘도 우리 김치냉장고 김치만은 아무도 안 줬어.”
“글쎄 천연동굴속의 항아리 묵은지는 맛있다고 하더라만.”
“우리 김치가 더 맛있다니까!”
지헌이가 눈을 치뜨며 버럭 화를 내었다. 아이고 누가 사기꾼한테 넘어가시래? 언니가 미안한지 주방에 와서 시부렁거렸다. 저거 지헌이 자리 잡으면 가져갈거니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흥 오래일지 오래 아닐지는 누가 알아. 언니가 점쟁이야 하고 나는 받아쳤다. 결국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하던 지헌이 살림이 우리 작은 방에 들어 온지도 이년이 넘어 삼년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면 저놈의 김치는 몇 년 묵은 둥인가? 저거 집에서 이 년, 우리 집에서 삼 년차네. 오 년이나 묵은 김치 모시고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는 동생의 김치냉장고에서 딱 두 번, 이번까지 세 번 김치를 꺼내 먹었다. 처음은 김치냉장고를 가지고 온 그해 여름날, 더위를 먹었는지 입맛이 떨어져 지헌이가 맛있다고 하던 김치 생각이 났다. 집에 김장김치가 다 먹고 없었다. 또 지헌이가 김치찌개 하면 기차게 맛있다는 말이 떠올라 꼼꼼히 붙여진 테이프를 떼고 비닐장갑을 끼고서 김치 한쪽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김치 꺼낸 표시 안 나게 허둥대면 김장김치 봉투를 본래처럼 묶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동생이 알고 누나 우리 김치 왜 꺼내 먹었어? 할까 싶었다. 나는 동생네 살림방을 잘 보지 않는다. 문도 잘 열지 않는다. 꼭 저들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것 같아서다. 그저 저것들을 어서 가져가야 지헌이가 조금이라도 안정되는 일이 아닌가싶은 마음뿐이었다. 꺼낸 김치를 머리만 자르고 쭉쭉 찢어서 밥에 얹어 먹어보니 먹을 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반쪽을 꺼내어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이번에 꺼낸 김치가 세 번째이다. 나는 동생네 김치를 한포기 반을 꺼낸 셈이지만 이제 더는 그 남자의 김치를 꺼내먹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헌이네 걱정하려고 자주 만났다. 아무 소용도 없는 걱정을 내뱉으면서 울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지헌이와 올케 그리고 현규의 건강만을 절실한 마음으로 빌었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그들 걱정으로 시작하여 물같이 흘러간 세월을 뒤적여 함께한 소소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리 삼남매가 함께한 유년의 기억은 끝도 없이 새록새록 이어졌다. 울고불고 욕하며 투덕거린 싸움도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요리 잘하던 올케의 솜씨도 씹어댔다. 핏줄이 무엇인지 지헌이는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떨쳐지지 않고 미워하려 해도 미워지지 않는 내 동생이란 걸 가슴 저리게 깨달았다.
“현규 엄마는 절대 현규 못 버려. 신랑은 버릴지라도 현규는 못 버리지. 어떤 엄마였는데.”
“지헌이가 조선팔도 다 뒤져서라도 지 각시 찾는다더라. 지헌이가 지 댁한테 잘못한 게 많다네. 별거 아닌 사소한 일로 많이 다투었다고. 후회 많이 하더라. 옛날 엄마한테도 저 마음같이 고분고분 않다고 싸우고 집안일도 그러하고 아무튼 시골만 갔다 오면 싸웠다네. 지헌이는 고슴도치같이 가시 바짝 세운 마누라가 마땅찮았고, 올케는 누구한테라도 잘해주고 싶어 마당쇠 노릇하는 신랑이 꼴값이고 또 그런 게 불만이었는데 동창회장 하다 친구한테 왕창 사기까지 당했으니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
“나도 지헌이 부부는 언젠가는 다시 합쳐지리라 생각해. 그들에게는 현규가 있잖아. 어쨌든 현규 제대하면 저들이 책임져야지.”
어느 날, 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빨리 나오라고. 사거리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얘, 지헌이가 현규 엄마 찾았나 봐. 서울이래.”
“정말? 이산가족상봉이네. 올케는 뭐하고 있었대?”
"그간 일 다녔나 보더라. 그 꼿꼿한 성격에 한눈팔 사람은 아니지. 집집이 보면 거의 남자들이 문제이고 문제를 일으킨다니까.”
“나도 지헌이 부부가 언젠가는 합쳐지리라 믿었어. 둘 다 바람이 났다든가 하는 치정문제로 헤어진 게 아니잖아. 그리고 현규가 그들 질긴 끈이잖아.”
“지헌이가 잘못 살았대. 서로 비아냥대면 상대에게 상처주고, 그냥 두루뭉실 넘어가도 될 일을 그랬다는 거지. 이제야 철들었는지 곧 저들 살림도 가져갈 거야.”
우리는 전 같으면 팔이 안으로 굽었을 터인데 올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어 지헌이를 비난했다. 언니와 헤어져 집에 와서 그 방문을 열어본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김치냉장고가 돌지 않았다. 손을 대어보니 아직 찬기가 느껴지는데 전기 소리가 없다. 발로 툭툭 찼다. 그래도 무응답이다. 전기 코드를 뺏다가 다시 꼽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어머나, 이를 어째 여기 김치를 어떡하나? 지헌이는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김치를 다른 데로 옮겨야 하나? 어디로 옮기지? 이 많은 김치를. 큰일 났네! 언니야 이 일을 어떡해? 난 몰라. 김치, 김치, 지헌이네 김치!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누군가 몸을 세게 흔들었다.
“사람이 뭔 새우잠을 자면서 김치 김치 부르는 거야?”
남편이다. 뭐, 잠이라고 꿈이라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 김치냉장고,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치냉장고 괜찮겠지. 꿈이니까 꿈에서니까. 후다닥 나가서 거실을 지나 그 방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 전화 받아.”
누구 전화일까? 혹시 지헌이? 지헌이 전화며 지금 받을 수 없지. 김치냉장고부터 봐야지.
나는 다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전화벨은 그냥 계속 울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