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구려를 세웠던 궁예의 휘하에 있던 태조 왕건은 918년 고려를 세우고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삼국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지방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혼인관계를 맺어 29명에 이르는
후비(后妃)를 두었다. 지방의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태조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낮추는 등 취민유도 정책을 펼쳤으며, 연등회와 팔관회를 여는 등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다.
또한 발해의 유민들을 포용하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뚜렷이 함과 동시에 북진정책을 통해 영토 확장에 힘쓰기도
했다.
이렇게 나라의 기반을 닦은 태조의 기본 정책은 훈요 10조를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태조 왕건이 새로 세운 국가의 안정을 위해 많은 호족 세력들과 외척 관계를 유지했던 나머지, 그가 죽고 난 후
외척들의
정치 참여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이에 4대 왕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 조세제도 개혁 등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통해 호족 세력의 약화와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다. 6대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중앙의 정치조직을 정비하고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식 정치 제도를 만드는 등 고려 초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80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침범하자 서희를 보내 외교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동6주의 관할권을 얻어낸 것도 성종 때의
일이다.
8대 현종 때에는 연이은 거란의 침입에 강감찬 장군이 이를 물리쳤으며, 거란의 침입을 불교의 힘을 통해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기도 했다.
고려 사회가 점차 안정화되면서 초기의 지방 호족들 가운데 여러 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문벌 귀족이 되어 음서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였다. 문벌 귀족이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7대 인종 때 있었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으로 인한 갈등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 문신에 비해 차별 받던 무신들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표출되었다. 이에 18대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명종 역시 1197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다. 무신정권 기간 동안 국가의 통치
질서는 허물어졌고, 이후 몽골과의 전쟁을 겪으며 고려 사회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고려는 1231년부터
1270년까지 40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으며 이후로도 원의 내정 간섭을 받으며 자주적 국가 운영 체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31대 공민왕은 반원 자주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한 신돈을 등용하여
원 간섭기 동안 성장한 권문세족을 억누르기 위해 토지와 노비 제도를 개혁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과 함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개혁 정책은 중단되었으며,
이후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32대 우왕 때 요동 정벌을 위해 나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고려 왕조는 점차 그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으나 결국 1392년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고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