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진 위대함의 징표 ‘똘레랑스’
내가 유학하면서 보낸 8년 반 동안의 프랑스에서의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그리고 아직 까지 나에게 가장 큰 여운으로 남아 있는 정신문화 중 하나는 ‘똘레랑스’였다. 그 이유는 똘레랑스는 한국사회나 동양사회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똘레랑스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 보자면 똘레랑스(tolérence)는 ‘참다’ ‘인내하다’ ‘용인하다’ ‘인정해주다’는 등의 동사 ‘똘레레(tolérer)’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가장 적합한 개념은 ‘관용’이라는 것이다. 나와 다른 타자의 감정이나 습관이나 문화적 성향이나 혹은 가치관이나 세계관 등을 ‘용인하다’ ‘참아주다’ ‘인정해주다’는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 똘레랑스이다.
내가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이상하게 보인 점은 아랍인이나 아프리카인 그리고 동양인들이 매우 많았고 그들의 삶의 형식이나 문화적 기질이 프랑스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프랑스인들은 이를 전혀 게으치 않고 용인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령 흑인들은 버스에서도 전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사적인 이야기를 아주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으며, 아랍인들은 길거리에서 조차 종교적 행위를 하기도 하였으며, 전철 속에서는 자주 음식을 먹는 동양인들도 보였다. 그런데도 지나치지만 않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에게 그것이 가장 이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8년 반 동안 이 같은 ‘똘레랑스’ 정신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자췻방에서 김치나 된장찌개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 정신 덕분이었다.
아마도 프랑스 사회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유럽사람, 아랍사람, 아프리카 사람 그리고 동양사람 등 거의 세계 모든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다문화’라는 개념은 한국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고, 오히려 이미 자연스럽게 다문화 사회가 이루어져서 더 이상 ‘다문화’라는 개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범-인류애를 지향하는 기독교적 문화가 오랫동안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반면 전통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한 한중일 동양 삼국은 자문화중심주의나 자기중심주의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새삼 느꼈다. 아마도 역사적인 이유로 반일감정, 반중감정 등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인류’라는 개념이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동양의 문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내에서 조차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면서 지역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정치적 상황, 정치인들의 이기주의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에겐 선진국의 척도 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있다면 그 사회에서 얼마나 똘레랑스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동물들에게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자나 호랑이는 결코 표범이나 원숭이 등을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물들은 본성적으로 자신들의 종적인 동일성을 가진 것과만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와 상어가 한 가족처럼 지내는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백인과 흑인이 동양인과 서양인이 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하여 혼혈 2세를 낳는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을 부도덕하거나 이상하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주어진 속성이나 경향성을 ‘가치’나 ‘이념’ ‘사상’ 등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의 위대함이다.
만일 서구 문화를 크게 두 가지 이념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유신론적인 기독교적 문화’와 ‘무신론적인 물질문명’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문화는 최소한 내가 본 프랑스 사회에서는 거의 충돌하지 않고 서로가 인정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나에겐 그것이 그들의 똘레랑스 정신 덕분으로 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사회는 30여 년 전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이 같은 똘레랑스의 문화는 거의 정착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한국사회는 오히려 문화적 사상적 다름이 보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긴장과 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날과 같이 글로벌한 시대에서는 윤리, 도덕적으로 죄이거나, 범법행위이거나 하는 것에는 결코 ‘똘레랑스’를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이 가진 문화적 특성, 기질적 특성, 사상적 다름은 그것이 심각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수용하고 용인하는 관용의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한 사회를 평화롭게 하고, 인간다운 사람을 영위할 수 있는 기초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교철학을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목적도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서로 다른 사상이 있고, 한 인간이 가진 사상이나 철학은 그의 전 인생을 통해 이루어져 온 자신의 존재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여기엔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선호할 만한 것은 있겠지만, 그 자체로 나쁘거나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없다. 다만 자신의 가진 사상이나 철학을 자신의 이기주의를 위해서 삶에 적용할 때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에 나쁜 것이 될 뿐이다. 타자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어떤 문화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 모든 것이 나름의 이유와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만큼 선하다”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념이나 철학은 존중되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라는 말이 마치 인간의 기본권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이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왜 나와 다른 타자의 사유나 특성을 나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함께 가자!"라고 하지 못하는 것일까?
서로 다름, 차이에 대한 관용의 정신없다면, 그곳에는 오직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고자 하는 대립과 투쟁만이 남게 될 것이고, 이는 마치 중국의 무혐영화에서 보듯이 원한이 원한을 낳는 끊임없는 대립만을 낳게 될 것이다. 똘레상스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내가 푹 잠겨 있는 어떤 사상이나 문화적 특성으로부터 잠시 빠져나오는 것이다. 숲을 보기 위해서 숲을 떠나보아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혹은 자문화 중심에서 한번쯤은 벗어나 보아야 한다. 철학에서는 이를 ‘자기객관화하기’ 라고 한다. 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공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모든 문화적, 역사적 자문화중심에서 떠나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정함이고 또 패어플레이 정신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며, 인간의 위대함의 징표이다. 정의, 공정, 공평 등의 개념은 오직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똘레상스의 정신 위에서 가지게 되는 ‘페어플레이 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공정함과 정의를 외쳐도 자문화중심이 자리하는 곳에서는 오직 ‘내 것만이’ 정의요, ‘내편만이’ 공정이라는 이 이원론적인 틀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선호도 조사’ ‘비호감 조사’라는 것이 유행하는 용어가 되고있다. 무엇을 선호하는 가는 자유이지만, 내가 선호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나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사람이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진리인 것도 아니다. 오직 자기 객관화 된 똘레랑스의 정신에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공정하게 보려하고 '페어 플레이하는 정신'이 지금 우리사회에는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