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9장57~62절
제목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시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야고보와 요한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저들을 멸하라”하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길 가실때에 세 사람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58절)
1)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함(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본절의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8:19절에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서기관은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한 사람을 말한다(왕하 12:10; 대하 34:13). ‘비서’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왕하 12:10-NIV).
직업적인 필사자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눅9:22절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한 것을 보면 서기관은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어떤 모습의 제자 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님의 권능(마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5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시고,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23절).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심(59~60절)
1)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59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 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60절)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하고 이 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입니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하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즉 성도들이 예수님을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순위를
세상 일과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3. 또 다른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61~62절)
1) 가족과 작별을 허락하게 하소서(61절)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 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하는 교훈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입니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합당'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가족 사랑을 강조합니다.
바울사도는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딤전5:8).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기 전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거나(59절),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61절) 사람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사는 것이 훨씬 급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가족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두 제자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4:20, 막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