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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신문물 도입을 주장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
북학을 일으키다
조선의 실학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조선의 실학은 16세기에 번성했던 탈성리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형원은 경세치용(經世致用)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유용한 학문을 지향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이다. 성호 이익도 학문이란 천하를 발전시키는 데 유용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때 '실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도를 추구하여 요순시대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모든 학문이 공자의 가르침으로 귀일되었고, 주희의 해석을 경전처럼 생각했다.
조선의 실학은 치세의 근본이라고 믿는 성리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등장한 인물이 이가환, 정약용이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학에 영향을 받아 북학파라고 불린다. 정약용은 성리학을 잡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학자나 북학파들은 박학(博學)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를 중요하지 않게 보았고 도학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김종직이 선비는 잡학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이래 유학을 오히려 잡학이라고 폄하한 인물은 정약용이 처음이었다. 박지원은 노론의 가문이면서도 정조대에 남인들에 의해 들불처럼 일어난 실학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가 남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당대 명문가의 적자이면서도 서자들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평생 지기처럼 지내면서 북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소설들은 양반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등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변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에 한양의 서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박필균이고, 아버지는 박사유였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박필균에게 글을 배웠다. 박지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지원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과거에도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 관직에 있었으나 청렴했다.
박지원은 가난했다. 가족은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었다. 관직에 있던 할아버지마저 물러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대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간 것은 형수 이씨였다. 그런데 가난한 살림을 이끌던 형수마저 병이 들었다.
아버지 박사유는 벼슬이 없었고, 어머니는 살림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형수가 고생하면서 열 식구를 먹여 살렸다. 이씨는 제사를 받들고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이웃에 돈을 변통했다. 그 일이 2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씨는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다. 옆에서 지켜보는 박지원의 가슴은 미어졌다. 대가족인 그들은 때때로 식량마저 바닥나서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여 하루도 편하게 보내는 날이 없었다. 늦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날이 추워지면 겨울을 날 걱정에 병이 더욱 깊어졌다.
가난이 계속되자, 박지원은 가족들과 상의하여 연암 골짜기로 이사했다. 박지원은 손수 잡목을 베어내고 돌부리를 캐내어 집을 짓고 병든 형수에게 말했다.
"형수님, 형님이 늙었으니 이제 아우와 함께 산림에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삽시다."
박지원의 말에 시름시름 앓던 이씨가 일어났다.
"내가 바라던 일입니다."
이씨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니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과일만 먹어도 배를 주리지는 않을 것이오."
이씨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박지원이 형수에게 말했다.
"시동생이 이와 같이 좋은 이야기를 하니 내 병이 낫는 것 같소."
이씨는 기뻐했으나,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죽었다. 박지원은 탄식하며 이렇게 썼다.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내고 떼어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다.
형수가 죽었을 때 박지원이 깊은 슬픔을 느끼며 묘갈명에 쓴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가난했고 형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다.
아!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결코 제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 잔치를 너끈히 치러냈으니, 어찌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한 분이 아니겠는가. 죽어서야 그 일이 끝나니 너무나 애통하다.
박지원은 형수가 죽자 통곡했다. 그러나 학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양반이었고 노론의 세력가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연암집』박지원의 시문을 모은 문집으로 총 17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성리학만 학문이 아니다
박지원은 16세가 되었을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박지원은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이보천은 사위인 박지원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16세에 『맹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이미 박지원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그의 처남 이재성이 서너 장을 읽으면 겨우 한 장을 읽을 정도였다.
"공은 어찌 책 읽는 것이 그리 늦소?"
이재성이 박지원에게 물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도 한참이나 늦습니다."
박지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하지 않는가? 문장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연구하고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박지원은 책을 빠르게 읽지도, 외우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책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따지고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히 책 읽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실천한다는 뜻의 거경과 의미를 헤아리는 궁리를 합친 거경궁리의 방법으로 학문에 접근했다. 송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거경을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다루었고, 주희는 궁리를 강조했다. 퇴계 이황이 이를 받아들여 거경궁리를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아이는 벌써 『맹자』를 이해하고 있다.'
장인인 이보천은 자신이 박지원을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아우가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어도 문장이 출중하다. 아우에게 문학을 배워라. 그가 너의 스승이 될 것이다."
이보천의 동생 이양천은 홍문관교리를 지냈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박지원은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공부했다. 박지원은 수년 동안 문장을 배우면서 많은 작품을 썼고.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모방하여 『이충무전(李忠武傳)』을 짓기도 했다.
"네가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글 솜씨가 있구나."
이양천이 크게 칭찬했다.
박지원은 이양천에게 학문을 배울 무렵 우울증을 앓아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세상 모든 일이 귀찮아졌다. 박지원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박지원은 영조 때의 인물이다. 숙종이나 경종 때처럼 당쟁으로 수많은 선비들을 한꺼번에 죽지는 않았으나 당쟁이 치열했다. 과거를 보고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가난으로 학문을 계속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이 우울증을 앓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김신선(金神仙)의 방술(方術)이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여 그를 만나고 싶었다.
박지원이 남긴 『김신선전(金神仙傳)』에 있는 글이다.
타고난 이야기꾼
박지원은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김신선이라는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박지원은 김신선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광문자전(廣文子傳)』을 지었다. 광문이에 대한 이야기는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 들은 것이다.
내 나이 17, 1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彝器 : 나라의 의식에 쓰는 그릇)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박지원의 우울증은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이 결혼한 지 불과 일 년 만의 일이다. 그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해학을 잘한다는 민유신이라는 노인을 불렀다. 박지원은 민유신이 오자 방으로 청해 인사를 나누었다. 민유신은 73세나 되었고 5척 단신에 하얀 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다.
민유신이 박지원을 한참 살피더니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박지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배가 아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구먼."
민유신이 방문을 활짝 열고 창문을 걷어 올리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기이하게 박지원은 가슴속의 답답함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내 병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병입니다."
"그런가? 그러면 축하하네."
민유신이 갑자기 일어나서 절을 했다.
"노인장은 어찌하여 저에게 축하하는 것입니까?"
박지원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재산이 남아돌 것이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셈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을 살면 오복(五福) 중에 수(壽)와 부(富) 두 가지는 이미 갖춘 셈이 아닌가?"
민유신의 말에 박지원은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다. 박지원은 민유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유신은 특별한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는데도 이야기에 힘이 있고,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책을 읽는가?"
"더러 읽기는 합니다."
민유신이 갑자기 박지원에게 제안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책에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버렸는데 지금은 늙었다네. 그래도 자네보다는 나을 걸세. 자네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번 눈으로 읽어보고 외우기로 하지. 만약 한 자라도 틀리게 되면 약속대로 벌을 받겠네."
"아무려면 노인이 나보다 빠르겠습니까?"
박지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하지 않겠나? 할 텐가?"
"좋습니다."
박지원은 민유신을 가소롭게 생각하여 허락했다. 박지원의 방에는 책들이 많았다. 민유신은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를 외우기로 하고 박지원은 「춘관(春官)」을 외우기로 했다. 두 사람은 책을 펴들고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 다 외웠네."
박지원이 한창 눈으로 글을 읽고 있을 때, 민유신이 읽던 책을 덮었다. 박지원은 아직 한 번도 다 읽지 못한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나도 읽어야 하지 않소?"
박지원이 놀라서 민유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민유신은 박지원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자꾸 다른 이야기를 시켰다. 박지원은 책을 읽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자 민유신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박지원은 자신이 책을 읽다가 잠든 것이 부끄러웠다.
박지원은 민유신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물었다.
"어젯밤에 외운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를 않았다네."
민유신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더니 껄껄대고 웃었다. 박지원은 그제야 민유신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민유신 덕에 모처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옹은 귀신을 본 일이 있소?"
하루는 박지원의 사랑에 있던 사람이 민유신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민유신을 쳐다보았다.
"보았지."
민유신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민유신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내가 귀신이라니 무슨 소리요?"
등잔 뒤에 앉아 있던 사람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은 밝은 데 있고 귀신은 어두운 데 있는데, 당신이 어두운 데 있지 않소? 어두운 등잔 뒤에서 밝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민유신의 말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박지원은 노인의 말에 감탄했다.
"노인장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네. 때때로 내 오른쪽 눈은 용이 되고 왼쪽 눈은 호랑이가 되고, 혀 밑에는 도끼가 숨어 있고 팔목은 활처럼 휘었지. 삼가고 조심하면 갓난아기처럼 선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조금만 실수해도 오랑캐가 될 것일세.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를 물어뜯거나 잡아먹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거나 칼로 베어버릴 것이네. 이 때문에 어진 인물은 자신을 경계하고 예를 받들어 사악한 짓을 막아 자신을 보존한 것이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은 적이 없다네."
박지원은 민유신이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해도는 황충(蝗蟲)이 들끓어 피해가 커서 관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충을 잡느라 아우성입니다."
"황충을 왜 잡는가?"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은 벌레 때문에 근심하는가? 진짜 근심거리는 종루(鐘樓 : 종로)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라네."
"종루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길이가 6척에서 7척이 되는데,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거릴 정도라네. 쉴 새 없이 떠들면서 꾸부정한 모습으로 아귀처럼 몰려다니며 세상의 곡식을 죄다 먹어치우고 있네. 그래서 내가 잡아 없애려고 했지만 이것들을 담을 큰 바가지가 없어서 그냥 두었네."
민유신은 사악한 인간에 대해 말했고, 박지원은 이 말에 탄복했다.
『열하일기』를 남기다
박지원이 29세가 되었을 때, 홍대용이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연경에 들어갔다. 박지원은 연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고 44세가 되었을 때 자신도 연경에 들어가 저 유명한 『열하일기』를 남긴다.
'청나라는 과연 대국이구나.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
연경에 도착한 박지원은 번화한 시가지와 문물을 살피고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열하일기』에 담았다.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열하일기』의 서문에 있는 글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도 교훈을 남기기 위해 썼다고 밝히고 있다.
박지원의 이러한 사상은 1권 「도강록(渡江錄)」에 잘 드러나 있다. 박지원은 압록강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에서 이용후생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삼십 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 의주관(義州館)에서 묵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이 먼 까닭이다.
『열하일기』의 첫 부분이다. 『열하일기』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는 「허생전(許生傳)」이라는 단편소설을 실었다. 「허생전」은 봉건시대의 전기소설(傳奇小說)과는 달리 사회의 병리를 비판하고 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할 열정을 가졌던 이상주의자 허생을 창조하여 당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하일기』의 「관내정사(關內程史)」는 산해관(山海關)에서 연경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와 숙제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虎叱)」이 실려 있다. 한 고을에 학문으로 이름이 높은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는 선비가 동리자(東里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했다. 동리자는 아들이 다섯인데 모두 성이 달랐다. 그녀의 자식들이 북곽선생을 여우로 의심하여 몽둥이를 들고 동리자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북곽선생은 혼비백산하여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분뇨 구덩이에 빠졌다.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치다가 기어 나오니 집채만 한 호랑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박지원은 호랑이의 입을 빌려 이기적인 인간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대개 제것이 아닌 것을 취함을 도(盜)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호랑이는 북곽선생을 더러운 선비라고 질책하고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지원 스스로도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 평가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의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돌아올 때까지 전 과정을 26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기록하여 조선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읽히기 시작했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패사(稗史 : 사관이 아닌 사람이 이야기 형식으로 쓴 문장)와 소품에 지나지 않으면서, 조선의 국시를 뒤흔드는 불순한 잡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학이 공허한 공맹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체로 기록했다.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조선의 문장가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지시했다. 이상황, 김조순, 심상규 등과 시파(時派)에 속하는 이덕무, 박제가도 문체가 불순하다고 하여 자송문을 지으라는 영을 내렸다.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다. 『열하일기』는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정조가 영을 내렸다.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정조는 문체를 바꾸면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종2품의 제학(提學)의 벼슬을 내리겠다고 회유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박지원이 남공철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그만큼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시중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박지원이 33세가 되었을 때 박제가와 이서구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으나, 이미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박제가는 훗날 『북학의』를 집필하고, 이서구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청직을 전전하고 형조판서를 지내는 등 문신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박지원은 34세가 되었을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박지원의 문명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과에 급제하게 하여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회시에 응하더라도 노송이나 괴석을 그려 제출했다. 특히 그가 활약할 무렵은 홍국영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홍국영이 노론을 심하게 미워했기 때문에 박지원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관계에 나가면 굶주림은 면할 수 있다.'
박지원은 정치 판도가 바뀌면서 정치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국영이 죽었으나 정조는 남인들을 발탁하고 있었고, 노론은 남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50세가 되어서야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정일환 등이 찾아와 벽파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박지원은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을 지냈다.
박지원은 1797년 면천군수,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과 목민관을 지낸 경험에 기초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북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청나라를 통해 서구문명을 인식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분제 혁파 등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천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을 지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실학적인 입장을 반영했다. 박지원은 1805년(순조 5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문물 도입을 주장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2012.3.30,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