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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오전예배 설교
2020.10.25. - 마태복음의 말씀(41) : 씨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 1 - 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한 집회에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빵집을 베이커리를 오픈하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빵집을 새로 하려고 합니다. 그 빵집 그 베이커리가 큰 가게가 되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응답을 주시는데, 빵을 크게 만들어라 라는 응답을 주십니다. 아니요. 하나님 저는 그 빵이 아니라 가게를 좀 크게 만들어 주세요 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다시 응답을 주시는데, 빵을 크게 만들어라 라고 답하십니다.
기도할 때마다 가게를 크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는데, 응답은 빵을 크게 만들라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빵을 크게 만들라고 계속 응답을 주시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다시 돌아서서 그 기업을 그 가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빵을 크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재료를 넣고 더 정성과 시간을 투자해서 빵을 조금 손해를 더 보더라도 아주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개업을 하자마자 주변에 있는 빵집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정말 매출이 점점점 늘어서 나중에는 그 빵 가게가 그 곳에서 제일 큰 가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간증하신 분이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에는 다 하나님의 답이 들어있다.
최근 기사에 다른 업종들 특별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상황을 겪으면서 다른 기업들은 다 침체하고 어려움을 겪는데 빵집만 0.2% 성장했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저는 이 기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이 기사를 읽으면서 예전에 제가 들었던 그 간증이 생각나서 이 간증을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님들과 나눠볼까 생각해서 오늘 설교 첫부분에 함께 나눠 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예측해서 하나님 이런 기도 응답주세요 라고 여러분 기도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이 예측하고 생각했던 그 응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그 응답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문제의 해답이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빵가게 크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빵을 크게 만들라 라고 하는 응답이 저와 여러분에게 올지라도 하나님의 응답 대로 그대로 순종하고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 41번째 '씨뿌리는 비유' 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4주 동안의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천국 비유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동시에 오늘은 503 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타락한 교회 타락한 교황을 향해서 우리의 교회 본질 복음의 진리를 바로 전하고자 했던 그날입니다. 그날을 기념해서 오늘 저희도 종교개혁 주일로 지킵니다.
그 가운데 저희들 온 인류를 공포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세상이 흔들리고, 세상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신앙까지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우리 교회의 치부가 드러나기도 하고요,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바로 오늘 주어진 '씨 뿌리는 비유' 천국의 비유 가운데 새롭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시간과 시대를 어떻게 결단하면서 살아갈지 함께 오늘 말씀 한 절 한 절을 읽어가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 이야기에 대해서 그 이야기가 선포된 장소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1절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있더니'
씨뿌리는 비유라고 하면 씨뿌리는 비유 이야기 그 자체에서 우리가 뭔가 메세지를 얻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 본 말씀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말씀 그 주변부에 가장자리에 있는 말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주변부에 있는 말씀 그 본문 말씀은 3절과 8절인데 앞전에 1절 2절과 9절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씨 뿌리는 비유 의 말씀을 어디에서 선포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에서 선포하셨습니까? 함께 읽은 1절 2절 말씀대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은 바닷가의 배에 올라가셔서 해변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냥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하면 되는데,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전하고 계신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농부의 이야기 그 씨뿌리는 비유를 물고기를 잡는 배 위에서 바닷가에서 해변에서 예수님이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바로 역설적인 모습,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를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타는 그 배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 역설적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이 상황 속에서 또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두 가지로 우리에게 특별하게 전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두 가지로 정리해봤습니다.
첫 번째는 모빌리티 처치 (Mobility Church)라는 것입니다. 유동적이고 이동이 용이한 신앙의 삶, 그런 특별한 교회 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쉐어링 처치 (Sharing Church) 공유하고 함께 나눠쓰는 함께 빌려쓰는 삶의 신앙 그런 교회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빌리티 처치는 유동적이고 이동이 용이한 신앙의 삶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모빌리티 Mobility 란 뜻이 뭡니까? 여러분 오늘 다 가져오셨죠? 성경을 다 가져 오셨습니까? 성경은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은 다 가져오셨죠? 스마트폰이 뭡니까?
핸드폰 스마트폰 우리는 그런 것을 통칭해서 모바일 폰이라고 합니다. 이 모바일이라는 표현이 뭡니까? 이동이 가능한 휴대가 가능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폰 (iphone) 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전화기 사무기기 컴퓨터를 어떻게 하면 한 손에 모아보면 어떨까 하고 마음 속에 꿈을 꿨는데 그것을 현실화 시켰죠. 그는 아이폰을 만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교회와 신앙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를 여러분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를 모바일폰과 같은 그곳에 담아내면 어떨까? 실제로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스마트폰이 세상 곳곳에 전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 세상의 땅끝까지 전해져야 하는데 지금 세상은 모바일 폰이 스마트폰이 세상 끝까지 전해주고 있는데,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는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신 그곳은 배였지요. 이 배는 요 지금 이 시대의 삶의 특징인 모빌리티 움직이고 이동하기 편한 운동성이 있는 그런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리고 그 배에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라는 것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배는 닻을 올리고 노만 저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천국에 대한 비유를 어디든 갈 수 있는 배 위에서 선포하셨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천국의 삶이란 이 땅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을 내가 지배하고 내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차지하고 싶은 분들이 땅 문서 건물의 그 문서들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더 넓은 교회 더 많은 건물 더 많은 부동산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적어도 코로나 터지기 이전에는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큰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공간 필요한 건물 필요한 예배 처소는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번 코로나를 겪으면서 그 공간 그 땅 그 건물이 얼마나 무용한 지를 하나님이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무리하게 교회 건물을 지은 교회들은 지금 수많은 건축비와 이자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수천 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에 몇달 동안 50명이 안되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려야했고 아직도 그 넓은 공간은 낭비되고 헛되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에 코로나 이전에는 땅을 차지하고, 공간을 지배하고 고정된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어떤 문서를 하나 갖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 천국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엄청난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소유하고 차지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 그 복음이 땅끝까지 확대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널리 전파되는 것이 천국 임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씨 뿌리는 천국의 비유 그 비유를 출렁거리는 그 배에서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상징적인 깨달음을 주고 계십니다.
언제든 움직이고 떠나며 이동할 수 있는 배에서 천국 복음을 전해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참 복음의 의미, 복음은 널리 퍼져야 한다는 복음의 이동성, 천국은 점점점 확장되어야 한다는 천국의 확장성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계십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종로 5가 김상옥로 37번가 여기에서 복음을 듣고 천국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라인 랜선 OnLine LAN 문자와 카톡 메시지 이메일 라디오를 통해서 그 말씀이 그 복음이 그 천국의 소식이 전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오늘 본문 1절 2절에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천국 복음을 배 위에서 언젠가는 떠날 수 있는 그 배에서 전하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십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는 항상 우리 성도님들이 설교 끝나고 피드백을 해주실때, 아 목사님 이발 좀 해야겠어요. 뭐 이런 것을 피드백 해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저는 우리 연동교회가 너무 좋습니다.
제가 부임하고 주일 드레스코드가 항상 하얀 로만칼라를 입고 있습니다. 예전에 있는 교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는 성도님들이 넥타이 품평회를 설교 시간에 합니다.
야 오늘 목사님 넥타이가 좀 그래. 오늘은 좋아라고 하십니다. 제가 면도하다가 자주 면도기에 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설교 내내 목사님은 왜 저렇게 해서 비셨을까? 아래로 하다 비셨을까, 위로 하다가 비셨을까? 그거 그냥 하루 종일 고민하십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져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최근에는 라디오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제공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성도님들이 이렇게 피드백 해주십니다.
목사님 몰랐는데 목사님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힘있게 강조하는 설교의 부분에서는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런 피드백을 주십니다. 말씀에 대한 피드백입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목사님 찬양하실 때 높은 음은 안하셔도 괜찮아요.
목사님 목소리가 목이 힘드실 거 같아서 말합니다 (좌중 웃음) 저도 다 알아듣습니다. 목사님 노래 잘 못해요, 이런 얘기 아닙니까?
어찌되었던 천국 소식이 복음은 어디서 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얼마나 넓게 멀리 전해질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배 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 New Normal 시대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요 컴퓨터 전화기 사무기기 다이어리 그 모든 것을 모바일 폰으로 하나로 묶어서 손으로 갖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요 여전히 집 전화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무엇을 변화해야 할까?
혹시 저희들이 지금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하는데, 집 전화만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 교회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천국을 부동산과 건물에 묶여 두어선 안됩니다.
배를 타고 곳곳을 찾아가며 복음을 전파하셨던 참된 모빌리티 처치를 이루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지금의 종교개혁의 참된 변화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바닷가 배 위에서 천국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새로운 뉴노멀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쉐어링 처치 (Sharing Church)입니다. 공유하고 함께 나눠쓰는 신앙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옆에 보면 따릉이라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일정 비용을 내면 몇 시간 동안 내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내 자전거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함께 나눠쓰는 거지요.
그럼 공유하는 차도 있고요 또 우리 젊은 세대들은 스터디카페에 가면 그 공간을 일정 비용을 내면 함께 거기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나눠쓰는 사람은 세상에 벌써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2절 뒷부분에 보면 온 무리는 해변에 서있었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해변은 주인이 없습니다. 파도가 이만큼 쳤다가 또 이만큼 물러가며 서로 왔다갔다 하는데 누가 그 해변 땅을 누가 주인이고 누가 주인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해변은요 모든 사람들이 다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그 해변에 서있더라 라고 했습니다. 땅은 주인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해변은 가능한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함께 사용하기 위해 주인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해변에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눠쓰는 해변에 앉아서 천국 비밀의 말씀을 전하셨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바로 천국의 삶이 이렇게 공유하고 함께 나눠쓰는 신앙의 삶가운데 천국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제 코로나가 종식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가 되면 가장 먼저 우리 삶의 변화가 될 것이 소유에 대한 인식이 변화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합니다. 가장 먼저 화폐와 물질입니다.
우리는 이미 재난지원금 이라는 것을 받아보았지요. 여러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럼 그거는요 저희들이 세금 내서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물질 그 돈을 모든 국민이 다 공유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바로 그런 상황들이 더 발전하면 기본 소득제로 가게 될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또한 건물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 쉐어하는 함께 공유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 저기 건물은 무슨 유명한 회사 건물이지 라고 하는 시대가 점점 더 줄어들 것입니다.
한 건물에 회사가 두 개 세 개가 함께 있게 될 것이고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신학교도 저희 신학교는 식당 도서관 교실이 다 있지만, 옆에 있는 작은 신학교 몇 개 신학교는 교실도 없습니다. 식당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함께 도서관을 사용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한지붕 여섯 교회가 예배당을 공유하다.
여섯 교회가 예배당 하나에서 서로 시간 차를 두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건물에 대한 비용을 줄이고 더 많은 선교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구제와 봉사의 영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전할 해변이라고 하는 땅은 그 예수님이 지나가다가 해변에서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지금 이 시대에 주고 계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해변 곧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나눠쓰는 땅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서로 삶을 나누고 공유하고 함께 나누는 삶이 곧 천국의 삶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바로 이 메세지를 우리 교회로 우리 신앙에도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종로 5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 5가에 있는 많은 기독교 단체와 기관들이 우리 교회 건물을 또 장소들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저희들은 적극적으로 빌려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이 코로나 시대 이후로 우리는 더욱더 쉐어링 처지로서 비전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혹시 교회학교를 위해서 놀이 공간을 더 만들고 키즈 카페를 만들고 게임룸 실내 운동장을 더 만들 수 있다면, 도심 한가운데 아이들이 놀러 왔을 때 갈 곳이 없다면 우리 교회가 그들에게 이 장소를 이 공간을 셰어하여 주고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저는 이곳이 천국이 된다 라고 믿습니다.
교회 마당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 마당 제가 창문으로 볼 때마다 또 걸어 올라 올 때마다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 마당은요 그 작지만 그 작은 곳에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에는 푸릇푸릇 싹이 올라오고요, 여름엔 그 나무들이 식물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그 가운데 운치가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우리교회 마당을 우리 주변에 있는 회사 회사원들에게 같이 공유하고 셰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에 작은 카페 하나를 만든 다음에 그들이 함께 와서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서로 대화하고 이곳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을 배에서 해변에서 함께 공유하고 나눠쓰는 그 자리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쉐어링 처치에 대한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에 핵심으로 들어가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에서는 어떤 얘기를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가? 예수님께서 이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실제로 그 풀이는 이미 오늘 본문말씀 다음에 예수님께서 직접 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8절에서 23절에 보면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풀이가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자가 와서 그 씨를 빼앗아가는 것과 같고, 돌밭에 떨어진 것은 말씀은 즉시 받아 기쁨은 있지만 뿌리가 없어서 환란과 박해가 오면 넘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에 염려 제물의 유혹에 말씀에 결실이 없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깨닫고 그 가운데 결실을 맺어 100배 60배 30배로 맺는 자들을 이야기한다 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이처럼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풀이는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종종 목사님들이 설교 때 네 가지를 각각으로 따로 풀이하시기도 합니다.
무엇이고 돌밭이며, 무엇이 가시밭이며 또 좋은 밭은 어떤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풀이하는 것은 많은 숲속의 나무들이 있는 것을 나무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것이죠.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그 반대로 여러분과 풀이하고 해석하기 원합니다. 그 숲속의 나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나무가 다 채워진 큰 숲을 보고 오늘 말씀을 한번 풀이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한 해석방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더 쉬운 해석의 방법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 그리고 좋은 땅을 하나의 땅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땅이라면 길가는 4분의 1 25% 입니다. 돌밭은 또한 4분의 1 가시떨기 밭도 4분의 1 좋은 땅도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땅인 것이죠.
그래서 씨가 뿌려지는 땅은 그 가운데 75% 는 3분의 4분의 삶은 그 씨가 잘 자라지 못하는 땅이고요, 나머지 4분의 1만 그 씨가 잘 자라는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25%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그 좋은 땅이 그 수치로만 본다면 매우 작은 것이죠. 약하고 부족한 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 작고 약하고 얼마 되지않는 땅이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매를 맺는데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는다 라고 증거 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 길가 돌밭 가시밭 각각의 4분의 1씩 차지하는 큰 마음의 밭이 한꺼번에 저와 여러분이 심령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이지요. 우리는 이 네가지 밭이 혼재되어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 갑니다.
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성인 군자라고 하여도 사람들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평가하더라도 모든 인간은요 네가지 밭을 다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만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깊이 했을지라도 쓴 뿌리를 가지신 분은 그 쓴 뿌리를 없애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장로 권사 집사 직분자라도 말씀을 들을 때 가시밭이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있으면 그 말씀이 들어와도 잘 자라지 못합니다.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유혹에 빠지는 삶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 이라는 것이지요. 이 씨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천국은 좋은 밭만 기경해서 만들고 좋은 밭만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 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네가지 밭을 다 혼재해서 갖고 있다면 이 자리에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좋은 밭은 4분의 1밖에 안되는데요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 네가지 밭을 다 품고 살아가는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가운데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신 것은 바로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밭을 100%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네개의 밭이 다 내 마음 속에 있다. 그것을 인정해라.
오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4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밭에 말씀이 심겨졌을지라도 겨자씨 같은 말씀이 심겼을 지라도 내가 그 넓은 밭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비옥한 땅이 아니라도 특별한 땅이 아니지만 말씀의 씨앗을 충실히 키워서 100배 60배 30배 결실을 맺게 한다면 그 땅은 좋은 땅이 될 것이다 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고계십니다.
바로 그렇게 자신의 존재는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 안에서 씨앗을 키우고 그것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결실을 보이면 그것이 곧 천국에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좋은 밭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을 살짝 눈으로 보십시오. 성경에 뭐라고 나옵니까? 농부가 잘 가꾼 땅? 비옥한 거름이 충분한 땅? 물 댄 동산 같은 땅? 아니요, 아무 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좋은 땅은 그냥 좋은 땅입니다. 그 땅은 길가 돌밭 가시밭 75% 에 비하면 아주 작은 땅이지만 그 작은 것에 충성하여 말씀을 품고 또 품어서 귀한 열매까지 만들어낸 그 땅을 하나님이 천국의 좋은 땅이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좋은 땅은 그 자체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에 겨자씨 같은 주님의 말씀을 심겨졌을 때 그것을 품고 내 땅이 4분의 1이래서 점점점 가시밭이 몰려오고 돌밭이 늘어나서 내 좋은 땅이 10% 5% 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1% 남은 그 땅에서 주님이 주신 성령,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결실을 맺어 100배 60배 30배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주님이 우리를 천국의 소망을 품게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길가 돌밭 가시밭 모두 기경돼서 좋은 밥만 갖고 있어서 바울이 천국에 갔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로마서 7장 21절에서 23절 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으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쓴 이 로마서를 읽으면 로마서를 쓴 바울이 복음에 대한 높은 경지에 마치 득도한 것처럼 그때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의 정수가 담겨져 있는데 그 중심에 우리가 생각된 복음은 이런 겁니다 라고 정의를 내릴 것 같은데, 이 로마서 16장까지 인데 정중앙에 7장에서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과 죄의 법을 따르는 두 가지 마음이 여전히 내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정수를 깨달은 바울이 그 마음에는 좋은 밭만 있을 것 같은 그 바울의 모습이 지금 뭐라고 얘기 합니까?
내 양쪽에는 하나님의 법, 죄의 법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4절에 고백하는 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자신 안에 가시밭 돌밭 길가와 같은 완악하고 딱딱하고 여전히 쓴 뿌리를 가진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내 안의 4가지의 밭이 여전히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를 천국으로 불러줄 겁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75% 가 4분의 3이 씨앗이 자랄 수 없는 말씀이 자랄 수 없는 밭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가시밭이 돌밭이 점점점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린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 세 가지의 밭, 말씀이 자랄 수 없는 길가와 돌밭과 가시 밭을 기경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게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쓴뿌리를 여전히 갖고 있고 가시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 1% 밖에 안되는 작은 밭에 말씀의 씨앗을 심고 그 가운데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게 해주실 때 저와 여러분에게는 천국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네가지 밭이 있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 천국이 첫걸음이 시작된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의 마지막에도 우리에겐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9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코로나를 겪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죠. 전문가들이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이 곳곳에서 코로나 이후에 하나님이 이런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런 뜻으로 우리는 포스트코로나를 준비해야 됩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9절의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일침을 주는 영적인 도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본문 2절에 보십시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8절에 씨 뿌리는 천국 비유를 들었지요 그리고 9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천국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귀 있는 자 주님께 지혜를 얻은 자, 주님이 구별한 자만 받을 수 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코로나 라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메세지를 깨닫는 사람은 귀 있는 자만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귀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미 널리 전해졌고요, 이 코로나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또한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귀 있는 자 깨어있는 자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복음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만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음을 깨닫는 신앙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귀로 듣고 세상에 고백할 때 하나님께 저와 여러분을 구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더욱더 이 말씀을 붙들고 한 주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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