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10찰3. 범어사
늘 깨어있기
하늘 물고기
살다보면 무언가에 취해 정신없이 헤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일러주는 부처님과 같은 눈뜬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도 부처님이나 선지식의 가르침이 남아있어 무명無明의 술에 취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불교는 정신 차리는 공부가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전한 진리를 접하다 보면 어느새 정신이 번쩍 뜨이고, 형편없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겨울인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봄이었다. 봄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꽃샘추위가 세차게 불어 닥친 어느 날 하늘 물고기가 살고 있는 범어사로 화엄 나들이를 하였다. 화엄이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라면 범어사는 동백과 은행나무, 등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부처들이 살고 있는 파라다이스라 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곳의 부처들은 모두 24시간 내내 눈을 뜨고 있었다. 물고기를 닮아서일까? 이번 순례는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여정이 될 것 같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금정산 범어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래현 북쪽 산마루에 커다란 우물이 있었는데, 항상 황금색의 물이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 온 금빛 찬란한 물고기가 그 우물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물고기梵魚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어사는 하늘 물고기가 파라다이스에서 소요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는 금샘에서 놀 때는 물론 잠을 잘 때도 항상 눈을 뜨고 있었다. 어쩌면 범어는 잠을 자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불교의 인문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불교는 정신없이mindless 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늘 깨어있는mindful 삶을 살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본과 권력, 물질이라는 환상에 취해 목표와 방향성을 상실한 채 무조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끝에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낭떠러지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모두가 고통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남이 뛰니까 나도 덩달아 뛰어가는 위험한 질주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결국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한 채 돈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외쳤던 천박한 자본과 골든타임을 허무하게 보내버린 무능한 권력이 빚어낸 합작품이 아니던가. 우리사회는 그 위험한 길을 눈을 감은 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어디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지, 왜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는지 큰 눈을 부릅뜨고 질문하는 하늘 물고기가 있었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범어는 늘 깨어있어야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잃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 점에서 범어는 자기 상실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는 부처님과 같다 할 것이다. 범어사는 하늘 물고기라는 상징을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라고 일러주는 성지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범어사의 모든 전각에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려는 많은 불자들이 자기 성찰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독경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신도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신행에 열심인 범어사 불자들을 보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살려는 범어보살이었다.
화엄과 호국
범어사는 합천의 해인사, 양산의 통도사와 함께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3대 사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 대사가 화엄 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이와 동시에 범어사가 자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호국 사찰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왜적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불력佛力에 의지해 적을 막고자 하는 불교 신앙과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합해졌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며, 범어사 역시 왜구의 침략으로 완전히 소실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 호국護國이란 말에는 더 깊은 불교적 의미가 담겨있다. 물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호국’이기도 하지만, 그 나라는 단순히 우리들이 사는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사는 이 나라가 곧 정토淨土이기 때문에 누군가 청정한 이 땅을 더럽히려 한다면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땅은 정토, 즉 파라다이스를 머금고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지키고 가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행사로 널리 알려진 팔관회나 연등회 등도 본래 이 땅을 청정한 국토로 가꾸기 위한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토신앙의 시선에서 이 땅이 곧 청정한 곳이라면, 화엄의 눈으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화엄은 깨어있는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그리고 있다. 화엄의 눈에 비친 이 땅은 부처라는 이름의 온갖 꽃들이 만발한 파라다이스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누군가 침략한다는 것은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는 온갖 부처님들을 해친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부처님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호국사찰 범어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량이라 할 것이다.
의상 대사의 <법성게>에 있는 한 구절이다.
“보배 비를 내려 허공 가득히 모든 생명 이롭게 하니雨寶益生滿虛空, 모든 생명들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네衆生隨器得利益.”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雨寶가 내려 부처라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화엄도량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이 어둡거나 그릇이 매우 작아서 이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보배 비의 이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를 지킬 수도 없다.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의 아픔을 겪은 것은 세계를 보는 눈과 마음이 작아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범어의 눈이 아니라 중생의 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아름다운 화엄의 성지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준엄한 말을 남겼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늘 깨어있어야 한다. 마치 금샘에서 노니는 하늘 물고기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운 이 화엄의 땅을 지킬 수 없다. 늘 깨어있는 범어의 눈으로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성찰하고 어떻게 미래를 가꿀 것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의 지나친 우경화와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여 미래를 걱정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호국사찰 범어사는 이를 지적하는 것 같았다.
눈뜬 선지식의 도량
이곳 범어사는 ‘하늘 물고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근현대의 수많은 눈뜬 선지식들이 주석했던 공간이다. 만해, 경허, 용성, 동산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당대 최고의 고승들은 이곳 범어사에서 하늘 물고기의 눈으로 어지러운 시대를 통찰하고 파라다이스인 이 땅을 지키기護國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일본식 불교를 들여와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려는 총독부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에 눈뜨는 교육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응축된 에너지를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동산 선사를 중심으로 펼친 정화운동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범어사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수많은 탑비塔碑의 주인공들도 이러한 삶을 살다간 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들을 지나 당당하게 서있는 일주문과 마주할 때는 파라다이스를 지키려했던 눈뜬 하늘 물고기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일주문에 쓰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범어사는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도량이다. 의상 대사 당시의 화엄 도량에서 오늘날 선종 사찰로 변모를 했지만,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범어사의 정신마저 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화엄이든 선이든 ‘늘 깨어있음’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정신이다.
올해는 한국 선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해 평생을 진력한 동산 대종사의 열반 50주기를 맞는 해이다. 대종사는 평소 보조국사普照國師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무척 아꼈다고 전해진다. 간화선看話禪 주창자로서 <원돈성불론>을 중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본래 선과 화엄이 둘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화엄과 선이 모두 무명의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나와 세계를 성찰하는 가르침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교회통禪敎會通의 바탕에는 스승인 용성 선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용성 선사 역시 간화선을 강조하면서도 <화엄경> 12권을 완역할 만큼 화엄사상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오늘날 무비 스님이 80권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화엄경>을 해설한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을 지난해부터 1년에 8~10권씩 출간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이곳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씨를 뿌린 화엄사상이 선사상과 만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하늘 물고기의 도량이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을 찾은 김에 해운대 밤바다에 몸을 맡긴 채 하룻밤을 보냈다. 여기저기에서 버스킹을 하는 젊은 친구들의 노랫소리와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부산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복잡한 도로망 탓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어지러웠던 탓인지 한참을 헤맨 뒤에야 정로正路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문득 정신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나를 향해 큰 눈을 부릅뜬 동산 선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원고를 마치고 보내려는데, 마침 불교TV에서 범어사 주지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었다. 문득 스님의 동그란 눈이 범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왜 범어사의 모든 부처들이 하늘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시대를 성찰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곧 범어사의 인문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