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열매를 바라보며
강 돈 묵
솔직히 말하면 난 전혀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는 나무에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화과의 열매를 내 손에 쥐어주며 ‘이게 바로 그 과일이야’했을 때도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바보 취급하며 고집쟁이라고 느물거렸다. 그때 처음 입에 대어본 무화과는 별맛은 없었다. 흐물흐물한 것이 조금 단맛이 있을 뿐이었다. 별수 없는 과일이구나 하고 내 의식에서 지우려던 때쯤 나는 집을 짓게 되었다.
전에부터 마련해 둔 땅에 갑자기 집을 짓게 되었다. 이 일은 깊이 생각해 보고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다. 전원주택에 살아보자고 막연히 대지를 하나 마련해 두었고, 어느 날 갑자기 아내의 요구에 집을 짓게 되었다. 순전히 아내 때문에 집을 짓게 되었다고 말하면 아내는, ‘그래, 뭐 잘못된 거 있슈?’ 하며 당당해 한다.
정원을 꾸리는데 무화과나무를 두어 주 심어서 따 먹길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열매에 대해 그리 탐탁치 않아서 들은 체 만 체했다. 별맛도 아닌 것을 심어 정원을 비좁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재차 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과수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권이다. 나는 마지못해 그것을 구입했으나 보기 싫은 녀석이나 되듯 정원에 두지 않고 남새밭 끄트머리에 심었다. 세 해가 지나자 열매가 맺혔다. 여름이 되자 다른 집의 무화과는 주먹만하여 따 먹는데 우리 것은 밤톨만한 것이 가관이었다. 마침 작은 섬을 돌아다니다가 열매가 큰 나무를 하나 구해다 옆에 심었다. 좀 지나면 이것을 키우고 전에 사다 심은 것은 뽑아버릴 심사였다.
가을이 되자 나의 이런 알량한 마음을 무화과나무는 가차 없이 내치는 것이었다. 가을볕을 받아 크기 시작한 열매는 며칠 사이 주먹 만하여졌고, 불그스름하게 익은 것은 맛이 설탕 덩어리를 뭉쳐 놓은 것 같았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전에 맛본 무화과와는 전혀 다른 특유의 단맛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수종을 탓하였던 것이 미안했다. 작은 섬에서 구해온 것을 얼른 뽑아버리고 거름을 얹어 주었다.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반으로 잘라 열어본다. 그 안에 작은 꽃술 같은 것들이 꽉 들어찼다. 작은 새싹처럼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그것은 붉으면서도 자줏빛이었는데,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별스럽지 않은 열매 속에 이와 같은 무서운 열정을 키워놓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겉으로 꽃을 드러내지 못해 무화과라 할지언정 꽃을 피우고자 하는 열정은 그 누구에 못지않다. 꽃을 피워 벌 나비를 끌어들이는 온갖 과실수들이 제 호화로움을 자랑하지만, 이 무화과의 뜨거운 열정을 반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
비록 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개화에 대한 욕망의 열정은 가슴 안에 가득하다. 남들처럼 제 꽃이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바 없이 숨겨서 키워온 열정에 새삼 놀란다. 속에다 그 열정을 끌어안고 있어서 벌 나비도 찾아주지 않지만, 꿋꿋하게 흔들림 없이 제 구실을 다하는 무화과의 모습에 나의 알량했던 마음은 깊은 감동 끝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무화과는 늦가을과 이름 봄 두 차례 착과한다. 늦가을의 것은 겨울을 지나 초여름에 수확하고, 봄의 것은 여름동안 풍성하게 키워 늦가을에 수확한다. 모든 과실수가 열매를 익혀 수확하는 늦가을에는 아무도 모르게 가슴 태우며 잎자루 옆으로 열매를 밀어 올리기 시작한다. 남들이 눈치 챌세라, 조용조용 밀어 올린다. 자신의 노고를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고, 잎자루마다 고통의 부스럼 하나씩을 키워 올린다. 이것이 열매라고 떠벌리지도 않으며, 그냥 끌어안고 추운 겨울을 견뎌낸다. 그리하여 여름이 되면 우리의 미각에 성숙한 열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른 봄에 착과한 것도 매한가지다. 다른 꽃들은 한해에 한번 만개하여 제 영혼을 불사르고 말지만, 무화과는 비록 꽃은 피지 않아도 두 번의 열매를 맺게 하는 실리적인 과실수다.
황의순 여사.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수필과 비평 행사장에서였다. 일년에 두 번 수확하는 무화과 열매처럼 그곳에서는 열매 맺은 새로운 수필가들을 두 차례에 걸쳐 선보였다. 행사 때마다 그 자리에는 그녀가 있었다. 내 꽃이 이렇게 곱다고 자랑하는 법도 없었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노라고 웅변하는 것도 아닌 채로 말없이 그녀는 수더분하게 그곳에 있었다.
스스로 수필을 쓰는 것도 아니었지만, 수필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무화과 열매 속에 가득 찬 알갱이처럼 무수히 많은 수필가들을 보살폈다. 수필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을 안으로 품어서 키워낸 사람. 그녀가 한 일은 드러나지 않지만, 안에 가득 단맛을 끌어안고 있는 무화과 열매처럼 사랑이 가득하다. 비록 지금 이 세상에 없어도 그녀가 심어 놓은 나무들은 실한 열매를 맺고 있으니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인가.
이 가을 무화과나무에 맺힌 열매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를 추억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녀의 옆에 심심하지 않게 무화과나무 하나 심어주고 싶다.
첫댓글 우리집 좁은 정원에도 무화과나무 한 그루 심어볼까 싶어집니다. 꽃을 피워 밖으로 뽐내기 보다 내실을 기하는 무화과 나무처럼 속이 꽉찬 그 분은 당신을 소환해주신 교수님께 감사하여. 그곳에서도 기쁨을 안에서 품고 계실 것만 같아요.
무화과가 꽃이 안피는지 이제야 알았네요~~
글 잘읽고 갑니다~^^*
무화과가 두 번의 열매를 맺는 다는 것 처음 알았습니다.
무화과는 과실 안에서 꽃을 피우더군요.
수필과 비평 행사 때 교수님이 무화과 하안 박스 가져 오셔 우리 맘껏 먹여 주신 생각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