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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35회.'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1999.07.10.)
35회 :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방송일: 19990710 조회수 : 292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제 35 회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 방송 1999. 7.10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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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문화랑세기 10
역사속에만 남아있던 한권의 책. 삼국통일직후 신라학자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 필사본 10 그 책이 1300여년만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 타이틀 :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ST 1.
# 기본세트 배경으로 MC
화랑세기라... 어떻습니까? 좀 귀에 익으신지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역사서보다는 낯설지만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화랑세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00년쯤에 신라시대 학자 김대문이 쓴 것입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만에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 관창그림나오고
먼저 이 그림을 한번 보시죠.
신라시대 화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관창이 백제의 계백장군과 황산벌에서 싸우는 모습을 후대에
그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이었던 관창은 어린나이에 삼국통일전쟁에 참가해 백제군과
싸우다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계백장군이 그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를 놓아주었죠.
그런데 관창은 또다시 적진에 들어가 장열히 전사했고, 이로인해 사기가 높아진 신라군은 마침내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랑관창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랑의 상징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 관창그림옆에 나란히 화랑세기 서고
관창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이런 활약상은 그동안 여러 역사책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화랑의 조직이나 계보등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엔 이런 것들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사랑, 알력, 음모등의 개인적인 사생활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
까지 다시 써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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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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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pan 10 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보관돼 있었다.
취재팀은 필사본의 소장자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 2S 필사본의 소장자인 김경자씨.책은 김씨의 남편이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 표지 넘기고 8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다.
성수학명이라 쓰여진 지금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든 것이다.
# 필사본 35 한지에 쓰여진 필사본은 모두 16장.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화랑들의 이야기이다.
화랑의 기원은 물론 화랑의 계보.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활동등 사생활까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첫 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위화랑에서 15번째 김유신까지, 총 15명의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의 족보인
것이다.
# 사진보여주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충북 청원 출신의 박창화.
박창화는 김씨의 남편 김종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책은 죽기전에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 김씨 INT 화랑세기가 어떤 책인지 알아보니 없어진 걸로 돼 있더라 신라때 김대문이 쓴 것인데 없어진걸로.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만약 진본으로 밝혀진다면 신라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안되겠나 그런 생각에.
# 신문자료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 2월 , 마침내 세상에 공개됐다.
책 제목만 전하던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1300년만에 필사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 이태길 2S 필사본을 가장 먼저 검토한 사람은 부산의 한문학자인 이태길 선생이었다.
# 이태길 INT 김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문화재 위원한테 보였다. 부산시 문화재 위원이 보니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그래서 내한테 연락해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복사를 다 해놨다.
이게 32면 밖에 안되거든 있는 그대로 신문에 번역을 해서 신문 공간이 허락하는데로 빨리 세상에 알리자.
# TR 5 그런데 그로부터 7년뒤인 지난 95년. 또하나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나타났다.
# 방안들어가는 10 두 번째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청주에 사는 박인규씨.
첫 번째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의 손자였다.
# 책 '이게 할아버지가 쓰신 필사본입니다'
# 덮개여는 13 필사본은 한지에 싸여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책은 많이 헐어 있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았다.
# 책타이트 25 두 번째 필사본은 총 162장.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까지 , 총 28명의 대표화랑들의 이야기다.
전체적인 구성은 앞서 발견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기록된 대표화랑들의 숫자가 많고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다.
# 박창화 사진 이렇게 두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박창화.
그는 188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했다. 그는 이 책은 1930,40년대 썼다고 한다.
# 손자 INT 할아버지는 보통사람하고 좀 틀리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만 열중하고 사교성이나 명예,
돈이라든지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신경을 안쓰고 , 오로지 학문연구만 했다.
# 요약발췌문 그렇다면 박창화가 만든 두권의 필사본은 어떤 관계일까?
첫 번째 발견된 필사본은 두 번째 것을 발췌한 요약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필사한 시기도 늦다.
서문부터 15번째 대표화랑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고 , 뒷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 모본 필사한 시기도 빠르고 내용이 자세해 모본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필사본은 서문과 앞부분이 없다.
대신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 CG 따라서 앞부분이 있는 첫 번째 필사본과 뒷부분이 있는 두 번째 필사본이 합쳐져야 한권의 완전한 화랑
세기 필사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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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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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 병풍배경으로 이책에 어떤 내용인지 담겨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 김유신과 김춘추 영정 나와 옆에 서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사람,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입니다. 이들은 형제지간처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중 김유신은 특히 화랑출신으로 그의 용맹성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유신은 물론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입니다.
# 화랑세기 배경에서 글자나와 영정앞에 서고
여기를 좀 보시죠.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유신이 15세 풍월주, 즉 15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고
김춘추는 18세 풍월주, 18번째 대표화랑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새로운 사실은 이뿐 아닙니다.
이 책은 김춘추의 결혼에 관한 얘기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매제사이였습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가장 애를 쓴 사람은 바로 김유신 이었는데요. 김유신과 김춘추의 친분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김춘추는 한동안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의 결혼을 꺼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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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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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고 뜻이 있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이같은 풍모를 알아본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그는 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 삼국기자료 우선 김춘추를 집으로 초대해 동생과 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임신을 하자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며 동생을 불에 태워죽이려는 연극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결혼을 망설였는데
왜 그랬을까?
#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랑이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타소라는 딸까지
낳았다.
# 이도학 INT 종전에는 초혼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학계에선 김춘추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었고 그런 상황
에서 불가피하게 문희와 결혼을 하지 않았겠나 추정해 왔다.
그런데 필사본은 김춘추에게 보라공주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기록과 맞추보면 김춘추가
성큼 결혼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가 규명이 되지 않겠는가.
# 삼국기자료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구한 것은 선덕여왕이었다.
때마침 김유신의 집근처를 지나다 이 사실을 알게된 선덕여왕은 김춘추을 책망한다.
# 화랑세기 그런데 화랑세기엔 선덕여왕이 선덕공주로 나온다. 이것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 화랑세기 여기엔 문희의 언니인 보희도 김춘추와 결혼한 것으로 돼 있다.
. 왕비가 되는 길몽을 동생에게 판 보희가 후회하며 처녀로 남자 김춘추가 첩으로 삼은 것이었다.
# 영정 이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진다. 이것은 두 신흥세력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 서문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비롯됐다는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 이도학 INT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처음 여성수령이 남성
수령으로 바뀐 것으로 돼 있다.
성적인변화를 보여주는 것 화랑의 기능이나 성격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종전에는 화랑하면 전사단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집단, 제사집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단석산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도인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는 단석산.
원래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는 화랑세기
# 계시받는 그림 필사본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화랑김유신이 이곳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한 의미가 명백해 진다.
# 용전도그림 그러므로 화랑이 용감한 무사집단으로 변한 것은 신라가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전쟁을 치루면서
였다.
# 화랑세기 새로운 사실은 이뿐이 아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화랑이라는 명칭이 첫 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에서 비롯됐다고 쓰고 있다.
화랑의 명칭에 대한 기원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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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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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 병풍배경으로 MC
지금까지 우리는 화랑이란 명칭은 많이 들어왔지만 왜 화랑이라 불렀는지 그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은 이렇게 화랑이 첫 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됐
다는 것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랑의 구성과 조직체계까지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화랑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렇게 튼튼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강력합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만든 가짜책이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필사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도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한권의 사서에 대한
논란이 10년째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 배경에서 마지막장 떨어져 나오고
이쪽을 좀 보시죠. 화랑세기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인데 김대문이 이 책을 쓴 이유를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글씨 나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향음, 즉 신라어로 화랑의 세보를 저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화랑집단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과, 각 계파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등을
기록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대표화랑이었던 김대문의 아버지가 화랑의 족보를 썼는데 아버지가 죽자 자신이 그것을 이어서 썼다는 내용
으로 이책의 저자가 김대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은 필사본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진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위작의 근거가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필사자가 가짜책을 만들어놓고 김대문이 쓴 것을 베낀 진본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내용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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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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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은 올해로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향가다.
6세 대표화랑인 세종조에 나오는 송출정가.
562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당시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해 그의 애인 미실이 지은 것이다.
이 향가는 화랑세기보다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를 참조한 증거로 의심받는다.
# 노태돈 INT 필사본 화랑세기에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데 향가는 13세기 쓰여진 삼국유사에 마지막으로
수록돼 있다. 그 이후는 향가가 지어지지도 않고 해독되지도 못했다.
이것이 다시 해독된 것은 1929년이다. 이점과 필사본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를 참고했다는 것을 연결시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1929년이후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 들어가는 그렇다면 필사본에 수록된 향가는 위작을 만들 당시 창작된 것일까?
전문가를 찾아 향가의 내용을 풀이해 봤다.
# 향가 듣고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앞에 치지말고
빨리 빨리 돌아오라. 다시만나 안고보고
아흐 님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느뇨.
# 향가 그런데 1929년 이후에 이런 향가를 만든다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 김학성 INT 제생각으로는 도저히 그당시 향가 해독수준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필사를 할 당시 일제말기인데 당시 우리나라 향가수준은 향가를 억지로 읽어나가는 해독의 수준이
었다. 그래서 양주동같은 분은 겨우 전체작품을 번역, 나머지 전문 국어학자들은 2,3수 정도를 겨우 읽는 정도,
그래서 읽어내기 바빳던 그 시절에 하물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당시에 이미 향찰로 쓰여진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관한 기록도 진위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 마복자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마복자라는 용어다.
마복자는 화랑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도화 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마복자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관계가 존재했던 것일까?
# 이종욱 INT 마복자는 신라사회의 성적인 문란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 마복자는 그 이상 중요한
정치적인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비처왕의 경우 마복 7성이 있었다. 그중엔 법흥왕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마복자와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의 관계는 후견자와 추종자의 관계에 있는 것을 알수 있다.
# 낭도공전 필사본은 마복자 풍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낭도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 자신이 모시는 우두머리인 화랑에게 총애를 얻는데 이 때 남편이 재물을 바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다시 들어가 또다시 총애를 얻고 재물을 바친다는 것이다.
# 노태돈 INT 화랑세기에서 주목된 것이 마복자 풍속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약자의 성을 강자가 유린하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기간에 그것이 유지된다면 과연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는 조종 대신들의 처까지 마복자 풍속에 노출돼 있다면 당시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되긴
어렵다고 본다.
# 신라토기 신라시대 토우나 각종 기록들은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왔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필사본에 기록된 남녀관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여성들도 자유분방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다함에게 향가를 지어준 미실의 경우 남편외에 6명이나 되는 정부가 있었다.
# 이종학 INT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 성생활이 문란하다 하지만 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관계뿐 아니라 형수,처제, 죽으면 부인으로 맞는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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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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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 병풍배경으로 MC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향가와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에 대한 기록은 진위논쟁에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사본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 화랑세기 나타난다/책매듭부분
우선 이 책을 한번 보시죠.
모본인 첫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입니다. 바로 여기 책의 매듭 부분을 주목해 주십시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고서들은 대개 매듭이 5개라고하는데 이책의 매듭은 하나, 둘, 셋, 네갭니다.
이처럼 매듭이 네 개인 것은 일본에서 흔히 사용된다고 합니다.
# 책장 넘긴다/ 잘려진 부분 , 궁내성 글씨 나타나고
화랑세기가 필사된 종이 또한 한지가 아닙니다.
빨간색으로 금이 그어진 이런 인쇄용지는 193,40년대 일본 정부에서 사용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화랑세기를 베낀 책이 일본식 장정에다 일본식 종이에 쓰여진 걸까요?
이것이 진위를 밝힐 수 있는 어떤 단서는 아닐까요?
우선 이 책을 필사한 박창화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요.
# 박창화 사진 나타나고
바로 이 사람이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입니다.
박씨는 1889년 충남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한학과 역사에도 밝았고 한때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그 당시로선 상당한 인텔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창화는 어떻게 이 책을 필사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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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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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S 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 마을주민 INT 천재라고 한번 들으면 잊질 않는다고. 한다.
# 자필이력서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 신문 소설가 김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박씨는 영동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배재고보, 청주사범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 임량재 INT 화랑에 대해서 계곡에 다니면서 수련하고 그 시작도 얘길했다.
화랑제도가 쇠퇴하는 과정도 말했다.그때 저희들은 바람둥이들처럼 생각하던 때인데 그 선생님을 통해 화랑이
원 본질은 고귀한 것이라는 걸 배웠다.
# 찾아가는 해방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주목할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 최기철 INT 중국을 갔는데 국경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다.독립운동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모시더래요. 소원이 뭡니까 그러니 역사공부라고 그러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테니 오십시오. 해서 간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
# 교육청 외경 박창화와 일본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 서류보여주는 ' 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돼 있네요.
# 넘기는 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이거군요. 어떻게 돼 있죠?'
최종적으로 괴산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 면직했는데요. 서기로는 1950년입니다.
# 펜내리는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 서릉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 목록들 그러나 왕실도서관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겨우 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서적 목록이었다.
# 왕PD확인하는 우선 목록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책은 찾을 수 없었다.
# 국립도서관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 책장넘기는 그중 1935년 직원명부.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들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은 85엔이었다.
# 다른명부 41년도 직원명부에선 박창화가 소원창화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 박창화 10여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해방직전 귀국했다.
해방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 이었다.
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김준웅 INT 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22년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훔처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 그런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르켜 주겠는냐 자기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간다고 주겠느냐.
# 도서관 자료 일본 왕실도서관엔 천황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미공개 도서로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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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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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왕실도서관 앞에서
현재로선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책이 왕실도서관 미공개 도서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창화가 왕실도서관 사서였다는 것은 필사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의 많은 고서적들이 왕실도서관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랑세기가 왕실도서관에 공개되지 않은 서적으로 보관돼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박창화 사진 서고 한쪽에서 나온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들을 연구했던 박창화는 한학은 물론 역사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소장했던 책들도 많고, 직접 저술한 책들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창화의 소장책과 그의 저서들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를 밝혀줄 또다른 단서가 될 수도 있습
니다.
VC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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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꺼내는 박창화의 소장도서와 저서들은 그의 손자가 가지고 있다.
우선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기로 했다.
# 한문소설 박창화가 직접 쓴 한문소설들이 눈에 띄었다.
어을우동기,홍수동기, 도홍기등 모두 성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역사학자인 그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의외였다.
# 신문 박창화의 소설창작능력은 그의 제자 김팔봉이 쓴 신문 칼럼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10년대 박창화는 학생들에게 막동이라는 역경을 이기고 사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3년동안 계속해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 노태돈 INT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단한 독서를 했고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제자였던 소설가 김팔봉이 남긴
기록에의하면 1910년대 이미 한글소설 막동이전을 4권이나 썼고 남아 있는 유작들도 운문투의 시들이남아있다.
여타 저술도 비록 방향은 발못됐지만 노력하고 상당한 문필력과 창작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 강역고 박창화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필이력서에도 강역연구를 20년동안이나 했다고 나온다.
# 확인하는 모습 소장도서들의 대부분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어떤 단서가 있는 것일까? 전문가와 함께 분석해 보았다.
# 고구려사략 그중 고구려사략.
광개토대왕을 영락대제라고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또다른 책인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각각 다른 책을
보고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 김용만 INT 고구려 책들을 여러개 보고 쓴게 보인다. 일치하지 않는 것이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편집하기
보다는 단지 자신이 본 것을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 만력이전 그런데 소장도서중에 주목되는 문서가 있다.
만력이전고간본사료.
일본정부에서 사용하던 용지에 초서로 흘려쓴 것이었다.
# 만나는 모습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전문가를 만나 확인해 봤다. 임진왜란전에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책을 기록한 목록이었다.
'... 계축진서, 계축년...'
# 만력이전 대부분이 국내에 있는 책들이었다,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것들도 찾아봤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 허호구 INT 이전에 일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책 목록같다, 보니까 유가의 경전도 있고 문학가들의 소사,
대부분이 유가경전 불경도 있는데 화랑세기에 관한 서적은 보이지 않는다.
# 계보도 또하나 주목할 것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정리해 놓은 계보도.
역시 일본 정부에서 사용하던 종이에 쓰여진 것으로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에 근무할 당시 만든 것이었다.
위작하기 위해 만든 자료가 아닐까?
# 이종욱 INT 화랑세기의 400여명의 인명이 모두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20세 예원의 경우 그 아버지는 12세
보리공이다. 그런데 보리공의 형인 원광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계보도만을 가지고 화랑세기를
위작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 계보도 소장도서중에 가장 유력한 단서였던 계보도.
하지만 그 또한 필사본의 정체를 밝혀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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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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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전리 암각화 배경으로 MC
일본 왕실도서관도 확인하고 박창화와 그 주변까지 추적해 봤지만 필사본의 정체를 밝혀 줄 확실한 단서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필사본의 출처를 확인해도 진위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책의 내용을 하나씩 분석하는 걸겁니다.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돌이나 비석에 새긴 글자들을 금석문이라고 합니다.
현재로선 필사본의 내용을 금석문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입니다.
왜냐하면 금석문은 다른 사서들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인물들이 금석문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진서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 천전리암각화/명문글자부분 나타나고
지금 보시는 것이 70년대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입니다. 여기엔 수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을 한번 보시죠.
이것은 법흥왕때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 '지몰시혜비'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법흥왕의 동생 입종의 부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애자사기'.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한다입니다.
전체를 풀이하면 부인이 남편 입종이 먼저 죽어 그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법흥왕보다 동생 입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법흥왕이 살아있을 때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이곳외엔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 사다함전,글자만 나타나고
5대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사다함전인데요.
여기에 '법흥붕이 입종역훙'.
법흥왕도 죽었고 그의 동생 입종도 역시 죽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법흥왕보다 동생 입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전리 금석문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필사본이 진본이라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전리 암각화를 좀 더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화랑들의 이야기가 가장 풍부하게 기록돼 있는 곳이고 아직 해독되지 않은 글자도 존재하기 때문입
니다.
VC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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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전리 가는 70년대 발견된 울주 천전리 암각화는 신라사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 들어가는 우선 이곳에 기록된 화랑의 이름이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지 확인해 보았다.
# 암각화 영랑이라는 화랑의 이름이 보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없었다.
# 김창호 교수 ' 자기가 공부하는 기간을 뭘 이루겠다는 거죠. 가령 태권도나 유교경전이나 그걸 이뤘다는
것이죠. '
# 암각화 충양량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필사본엔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찾는 2S 화랑들의 이름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문첨랑. 이 또한 화랑세기엔 없었다.
# pan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있는 화랑의 이름과 비슷한 것이 발견됐다.
# 암각화 관랑. 필사본에 무관랑이라는 화랑이 나온다. 그러나 동일 인물로 단정할 수 없다.
# 암각화 CG 천전리 암각화엔 성강랑, 정광랑, 성림랑, 천랑등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과 일치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 박홍국 INT 몇 명정도? 글씨는 아주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있는데 탁본하지 않고 10명정도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 화랑세기와 비교해서 일치 하는 것은? 애는 많이 썼는데 현재로선 동일인물을 찾아보지 못했다.
# 필사본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금석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권덕영 INT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보이는 백수십명의 인물가운데 단 한명도 금석문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입증받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만 나오는 인물이 적어도 한두명 정도는 확인되야
하는데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 냉수리비 FS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과 그 내용이 일치하는 금석문은 나타나고 있다.
지난 89년 4월, 포항에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비.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된 이후에 발견된 것이다.
# 비문 타이트 ZI 여기엔 지도로 갈문왕이라는 글씨가 나온다.
갈문왕은 즉위전 왕의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주는 호칭이다.
따라서 지도로 갈문왕은 지증왕이 즉위전에 부렸던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 화랑세기 필사본엔 지증왕때 부군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부군은 금석문의 갈문왕과 비슷한 호칭으로 추정된다.
# 나무들 Pan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과 금석문의 내용이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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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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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정배경으로
그동안 금석문과 일치되는 부분이 몇몇 확인되긴 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는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금석문과 비교하는 작업은 아직도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 포석정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포석정입니다. 신라왕과 귀족들이 술마시며 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엔 포석정과 관련된 글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 포석정 배경으로 길례 글자 나타나고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춘추가 포석사에서 길례, 즉 결혼을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니 좀 이상하죠. 또 포석정을 포석사라고 쓰고 있습니다.
# 문노전 포석사 글자
화랑세기 필사본의 문노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역시 포석정을 포석사라 해놓고 이곳에서 뭔가 성스러운 일이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포석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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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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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사진 지난 5월 13일, 포석정의 비밀을 밝혀 줄 획기적인 유물이 발굴됐다.
포석정 근처에서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 기와 명문기와는 가로 5.5cm, 세로 8cm. 포석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었다.
# CG 탁본을 해보면 원래 글자의 모양이 쉽게 나타난다.
'포'자가 포석정의 '포'와 다르게 새겨진 것은 기와 제작자들의 편의를 위한 관행이었다.
# 기와조각들 포석정은 9세기쯤 창건돼 100여년이상 존재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포석정 명문기와는 7세기 유물들과 함께 출토됐다. 이는 포석정이 7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화랑세기가 쓰여질 당시 포석정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김성범 INT 당시 함께 출토된 유물중에 삼국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물들과 혼재되서 나왔기 때문에
이 포석정의 조성연대를 지금의 8,9세기보다 올라갈 수 있는 증빙자료가 나온 것이다.
# 포석정 그렇다면 포석정의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 포석정은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놀이공간으로
알려져 왔다.
삼국유사에 견훤이 음력 11월 쳐들어왔는데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그 근거였다.
# 경애왕릉 그렇다면 경애왕은 정말 견훤이 침입해 오는 위기속에서, 그것도 한 겨울에 포석정에서 놀았던
것일까?
# 강돈구 INT 견훤이 처들어온때가 음력 11월, 영천까지는 한 25km떨어지는데 먼 거리가 아니다.
거기까지 쳐들어와서 바로 코앞에 있는데 논다는게 상식으로 안맞고. 음력 11월이고 11월에 술잔을 띄우고
뭘한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
아무리 남쪽이라도 11월이면 추울때인데.
# 유포석정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포석정. '유'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놀다가 아니라 갔다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강돈구 INT 삼국유사나 사기를 쓴 사람들이 신라가 왜 멸망을 했고 고려가 개국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는 의미로 놀다가 경애왕이 죽었다. 적이 쳐들어오는데 그랬으니 신라가 멸망하고 다음왕이
가져왔다 이렇게 애기 할 수 있다.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유자를 놀러 갔다라고 생각하고 기록한 것일 수
있고 또하나 놀러간 것이 아니라 그저 갔다 그런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지 않나.
# 술잔띄우는 또다른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유상곡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마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래 유상곡수는 시를 짓고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석정에서 지어진 시는 한편도 발견되지 않는다.
# 헌강왕 기록 그렇다면 포석정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만났다는 기록은 이곳에 신과 관련된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
# 남산 헬기 S 삼국유사에 따르면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청송산, 피전, 금강산, 우지산의 4영지에 둘러싸인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산은 최고로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남산자락에 위치한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욱 INT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사안에 삼국통일이 문노로 부터 시작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문노의 화상을
그안에 모셨다. 경애왕과 일족들이 포석사에 가서 견훤을 물리치고 신라를 지킬 수 있도록 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포석정은 하나의 사당으로 그안에 신라의 왕 또는 공을 세운 또는 화랑중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의
화상을 모신 사당으로 생각할 수 있다.
# 화랑세기 필사본의 포석사에 대한 기록은 포석정이 사당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 경주월성 발굴사진 지난 84년부터 94년까지 10여년간 경주 월성 발굴작업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 해자 방어를 위해 성 주변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인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필사본에 해자와 비슷한 단어가 나온다.
# 화랑세기 여기엔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색을 밝혀 무관랑과 살았는데 화랑들이 흉을 보았다.
그러자 무관랑이 성벽을 넘어 도망치다 구지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도랑과 못이 이어진 구지가 바로 해자와 유사하다.
# 이종욱 INT 사다함의 친구인 무관랑이 금진과 같이 산곳이 어디냐가 문제다. 그런데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은
진흥왕에 의해 궁중에 끌려들어가 조화방 부인 이러한 명칭을 받고 궁에 산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궁이 어느궁이냐가 문제인데 진흥왕이 살던 현재 월성, 대궁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 해자 pan 화랑세기 필사본은 월성 해자가 신라시대 구지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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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8..
# MC 월성배경으로
제가 서있는 곳이 바로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와 살았다는 경주 월성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무관랑이 도망치다 빠졌다는 월성해자인데요. 이곳이 정말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구지라면
우리는 새로운 신라어를 하나 갖게 됩니다.
당시 신라인들은 방어를 위해 성벽 근처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인 이 해자를 구지라고 불렀기 때문이죠.
# 구지 사라지고 / 월성이 기본세트속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은 물론 신라 사회 전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담겨 있습니다.
신라인들이 말하는 신라의 역사책인 셈이죠.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제작팀은 그동안 필사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이 진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릴 확실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1300여년만에 나타난 화랑세기 필사본.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화랑세기 필사본은 들여다 보면 들여다 볼수록 앞서 본 김춘추의 얘기라든지 포석사라든지 ,
구지처럼 뭔가 새로운 사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