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민 시집_[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시인선 99
휘민 저자(글) 걷는사람 · 2023년 11월 20일
“까만 밤이라 쓰고 환한 어둠이라 읽는다”
존재를 초과하는 눈물에 대하여
어긋난 리듬으로 슬픔의 중력에 맞서는 시
저자(글) 휘민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시집 『기린을 만났어』, 동화집『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 『라 벨라 치따』 등을 냈다. ‘시힘’ 동인이다.
작가의 말
한 사람이 지나간 뒤에야 나는
그의 눈빛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순간의 현재성으로부터 매번 미끄러지던 어리석은 질문들
삶이라는 생생한 현재에 닿지 못한 채 나는
뒤늦은 변명처럼 원문에도 없는 주석을 달고 있었구나
네 줄의 찰현악기로 아르페지오네의 선율을 복원하려는
음악가처럼
금이 간 거울에 나를 비추며
끝내 미완으로 남을 고통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2023년 늦가을
휘민
목차
1부 수목한계선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평일의 슬픔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하는 밤
무심천
헬리콥터
한로
수목한계선
스크래치
라이브 플러킹
삭
어머니와 개와 쥐가 있는 잠포록한 보름치의 풍경 안에서
다시, 봄
살아 있는 동안
무릇
매향리 바다
2부 겨울 다음에 오는 것
나를 지켜보는 나
신분당선
겨울 다음에 오는 것
송곳니
견갑
발굴지에서
물의 심장
팝업 하우스
적도
상고대
이코노미클래스증후군
그 밖의 계절에는 다소 어두운
부정맥
눈사람과 몽당비
시인
겨울 다음에 오는 것
3부 코끼리에게
농섬의 노래
가위
우는 화살
비밀의 책
잠복기
비 올 확률
코끼리에게
테트리스
고스트라이터
응달
배꼽 혹은 깊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 날의 일기
미분
백미리에서
타투이스트
4부 얼굴 없는 당신들 앞에서
견인
드림렌즈
첼로
옮겨 다니는 산
라운드업 레디
장다리 끝에 매달린 여린 꽃 하나 보자고
점보롤 티슈
씹던 껌
다정한 애인
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패키지 투어
역류성식도염
플롯 연습
5부 아름다운 오만
먼 시간에 대한 반응
얼굴
아름다운 오만
해설
‘어긋남의 리듬’으로, 사라지는 당신과 함께
-김수이(문학평론가)
추천사
이현호(시인)
이 시집에서 우리는 숱한 질문을 만난다. 대부분 시가 의문문으로 쓰인 구절을 한둘쯤 품고 있어서다. 그 돌올한 질문들은 마치 뒤에서 누가 부르는 것같이 시를 읽어 나가는 우리의 눈길을 잡아챈다. 때로는 과속방지턱이 되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때로는 돌부리가 되어 당연하게만 여겼던 생각을 거꾸러뜨리고, 때로는 폭포수 같은 격정까지 품는 용소가 되어 우리가 거기에 몸 담그게끔 한다. 이렇게 시인이 던진 질문을 딛고 선 우리는 비로소 똑바로 세계를 마주한다. “쇠스랑 같은 질문”(「견갑」)으로 파헤친 세계에는 “실마리를 당기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물기 없는 슬픔들”(「씹던 껌」)이 가득하다. 우리는 원자같이 세계를 구성하는 슬픔을 보며, “상처투성이 등으로 지옥을 실어 나르는”(「코끼리에게」) 것이 삶임을 깨닫는다.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몇 겹으로 눌러 둔 슬픔이 저 홀로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몰랐다”(「팝업 하우스」)라는 구절처럼, 그동안 모두가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일 따름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시인은 “검은 질문들의 잔등을 긁어”(「타투이스트」) 부스럼을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질문이 곧 기도이고, 구원인 까닭이다. 자신에게 타인에게 세상에 괜찮으냐고, 슬픔이 넘치는 세계에 이대로도 괜찮은 것이냐고 계속 묻지 않으면, 현실은 고착되고 “미래는 가까워지지 않”(「신분당선」)는다. 그래서 시인은 “구부렸다 펴는 힘줄의 의지로/절망의 순간을 품에 안는” “파라다이스날뱀”(「시인」)처럼, “골똘하게 손끝을 구부려 물음표를 만들어”(「타투이스트」) 보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이 물음표는 절망을 헤치는 낫이자, “오지 않을 미래를”(「테트리스」) 끌어당기는 갈고리이며, “먼저 오는 슬픔을 마중하러”(「시인」) 가는 지팡이고, 끝내는 “미끄러운 슬픔의 뼈대를 더듬”(「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는 손길이다. 숱한 질문으로 들추어낸 온갖 슬픔의 목록인 이 시집은 “슬픔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플롯 연습」)지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 질문들은 섣부른 해답이나 어설픈 위로 같은 “거짓의 마음”(「상고대」)을 버린 이의 표현법이라서 진실하고 또 미덥다.
책 속으로
간절함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운명은 번번이 예상치 못한 샛길로 방향을 튼다
자일인 줄 알았는데 내가 절벽 끝에 걸어 둔 것은
불안의 사슬이었나
올라가기에는 정상이 아득하고
방향을 틀어 내려오는 건 더 까마득하다
-「헬리콥터」 부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든.
주머니가 있었다면 빵 조각이라도 넣어 왔을 텐데…….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수목한계선」 부분
유리잔 속에 담긴
수많은 탄식과 비명
어떤 목소리는
깨진 유리잔의 공명이 되고
어떤 목소리는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 움츠러드는
고통의 맥놀이로 마음에 새겨진다
내일을 먼저 보고 온 자의
불안일까
어제를 잊으려는 자의
고투일까
아홉 번의 겨울을 함께 살고도
데면데면하던 우리는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켜보는 달빛이 없어
울기 좋은 밤이다
-「삭(朔)-시절인연」 전문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나를 등지고 떠나갈 때
차마 당신의 심장만은 보낼 수 없어
흙 묻은 심장을 직박구리와 참새 몰래
내 등골에 묻어 둔 것을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지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오늘도 내가 살아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부분
당신은 시작을 말했지만 끝을 말하지 않는 사람
나는 대답 없는 당신의 손끝을 어둠 속에서 응시한다
어는점과 녹는점이 같은 온도라면
영도로 낮아진 마음은
액체와 고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
-「나를 지켜보는 나」 부분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다
-「신분당선」 부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당신과 나는 서로의 반대편에 머물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 점이지대를 추가하면 지도가 바뀔 수 있을까 물결 위에 떨어뜨린 한숨으로 본초자오선을 흔드는 상상을 해 본다 아주 가끔 물속에서 눈동자가 붉은 열대어들이 튀어 올랐으나 바다는 잠잠하다 불안은 미래의 편이어서 나는
-「적도」 부분
싹둑,
차가운 금속이 목덜미를 스친다
열 지어 서 있던 눈빛들이 땡삐처럼 날아와
내 머리에 꽂힌다
실핀이라도 꽂지 그랬니
교무실로 불려 간 내가 안쓰러웠는지
담임이 한마디 거든다
머리칼이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자르고 싶어요
(……)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운동장에서
신발 바닥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아낸다
-「가위」 부분
끝내 번역하지 못한 당신의 유언
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은 절벽의 깊이가 아니라
그 끝을 딛고 버티는 발등의 두께로 기억될 것이다
마마 마마
까만 밤 수직의 세계 속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허리가 긴 슬픔
숨이 빠져나간 자리가 오래도록 환하던
마 마 마 마
우리는 더운 숨을 식혀 가며 탁성으로 울었다
달빛이 어룽거리는 창으로 슬픔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부분
출판사 서평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휘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걷는사람 시인선 99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세계는 간절함을 배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릴수록 내게 소원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다는 사실이 선연해지듯이, 구원을 소망할수록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수목한계선」) 있어 아무도 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듯이, “간절함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운명은 번번이 예상치 못한 샛길로 방향을”(「헬리콥터」) 틀고야 마는 것이다. 꿈이 외려 나를 찌르는 파편으로 돌아올 때, 그 안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휘민의 시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슬픔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 다른 슬픔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휘민의 시를 읽다 보면 나의 슬픔과 당신의 슬픔이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와 당신이 다른 슬픔의 존재자이기에, “당신과 나는 서로의 반대편에 머물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적도」). 그러나 시인은 오히려 이러한 어긋남에서 당신과 내가 ‘우리’로 불릴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낸다.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삭(朔)」)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 화자에게 눈물은 그 자신의 슬픔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눈물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외면하지 않고 나의 슬픔을 마주한다면, 당신에게로 다가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시인은 슬픔 너머 내일의 가능성을 엿본다.
슬픔은 늘 우리를 초과한다. 눈물은 감정이 존재의 임계점을 넘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초과하는 것이 슬픔의 특성이기에, 우리는 눈물의 다른 이름이 된다. “어는점과 녹는점이 같은 온도라면/영도로 낮아진 마음은/액체와 고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나를 지켜보는 나」). 마음이 얼어 버린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기에 소멸한다. 어는점은 녹는점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는점이 녹는점과 같은 온도라면, 당신이 당신이라는 고체의 형상으로 존재하기를 시인은 바라는 듯하다. 우리의 슬픔이 이토록 다를지언정, “당신 심장의 두근거림으로/오늘도 내가 살아 있”(「살아 있는 동안」)기 때문이다. 어긋난 심장의 만남이 서로가 소멸되지 않도록 건너편에 제 손길을 건네기 때문이다. “슬픔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반대편의 안부를 묻는 이 미련한 수용성 공동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눈물에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눈물 끝에 볼 수 있는 서로의 얼굴에 희망을 거는 이 마음을, 사랑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도처에 널린 슬픔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건너편을 믿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신분당선」),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 다른 슬픔을 껴안은 당신과 내가 ‘우리’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은 절벽의 깊이가 아니라/그 끝을 딛고 버티는 발등의 두께로 기억될 것이다”(「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추천사를 쓴 이현호 시인의 표현대로 이 시집은 “슬픔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플롯 연습」)지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 질문들은 섣부른 해답이나 어설픈 위로 같은 “거짓의 마음”(「상고대」)을 버린 이의 표현법이라서 진실하고 또 미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