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은행잎 날아와
이성자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 화장실 옆에는 아이들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지에 매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면, 나이가 삼백 살은 훌쩍 넘은 할미나무였다. 우리는 중요한 약속을 할 때나 친구들의 잘잘못을 따질 때 늘 은행나무 앞으로 모여 청문회를 열었다.
그날도 누가 먼저 제안을 했는지 모르지만, 미술반 아이들은 예술제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은행나무에 빌기로 마음을 모았다.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은행나무 앞에 빵과 과자를 차려놓고 제를 올렸다. 기도가 끝난 다음 준비했던 음식을 나눠먹으며 미래 화가의 꿈을 다짐했다.
바로 그때였다. 은행잎 하나가 뱅그르르 돌더니 내 어깨 위로 내려않았다. “와, 이번 대회에 최우수는 이성자 것이다!” 같은 반인 상수가 눈치도 없이 엉뚱한 말을 날렸다. 아이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나와 상수를 노려보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데, 민영이가 내 어깨 위의 은행잎을 주워 휙 던졌다. 분위기가 금세 썰렁해지고, 상수는 줄행랑을 쳤다.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민영이도 말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일을 끝내고 화장실 문을 밀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두 손으로 힘껏 밀어도, 쾅쾅 두들겨도 소용없었다. “민영아, 민영아!”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화실의 작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은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선생님, 친구들, 왕방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민영이…….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나는 가끔씩 비실비실 식은땀을 흘렸고, 선생님이 친구들 두어 명을 붙여주어야만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예술제에서 우리 학교는 종합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최우수상은 민영이었고, 나는 겨우 입선이었다.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민영이와 나는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이 없었던 민영이. 그 민영이가 내 곁을 스치기라도 하면 일부러 고개를 모로 돌렸다. 화장실에서 있었던 그 날의 일을 모두 민영이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미술반 아이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내가 은행나무 귀신에 씌었으며, 어쩌면 시름시름 앓다가 큰 병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쉬쉬하며 은행나무를 피해 다녔다. 어쩌다 은행잎이 머리 위에 내려앉기라도 하면 놀라서 털어내곤 했다. 그러나 짓궂은 6학년 남자 아이들 몇은 새끼줄로 은행나무 몸통을 칭칭 감고는 귀신을 쫓는다며 도시락 뚜껑을 두들겨대기도 했다.
어느덧 졸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은행나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은행나무가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을까. 가지를 흔들어대며 후드득 쌓여있던 눈덩이를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귀신이 내 몸 어딘가에 진짜로 달라붙을까봐 눈을 돌렸다. 민영이와 나, 할미은행나무와 나는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 몇 번의 가을을 보냈을까? 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나이 들어 결혼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가을이면 예쁜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혼자서 피식 웃곤 하였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을 가던 중, 휴게실 화장실에 들렀다. 일을 끝내고 문을 밀었더니, 열리지 않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두근거렸다.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소리를 질렀다.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대기 중이던 많은 사람들의 눈이 내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그 눈, 눈, 눈들……. “문을 안으로 잡아당겨야지, 밖으로 밀면 어떻게 해요!”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멀뚱해졌다. “얼른 저리 비키세요!” 그 여자가 나를 거칠게 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화살촉같이 쏟아지는 눈들을 피해 얼른 밖으로 나왔다. 온 몸이 땀으로 진득거렸다.
‘세상에, 그러면 그때의 일도?’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을 확인해보는 할미은행나무와 화장실의 사건이었다. ‘그래, 그랬던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놀란 민영이가 화실로 선생님을 부르러 간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민영이를…….’ 긴 세월동안 민영이를 오해하며 살았던 내 어리석음에 ‘휴’ 한숨이 나왔다. 왕방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던 민영이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지금쯤 우리나라 화단에 빛나는 이름으로 우뚝 서 있을지도 모를 내 친구 민영이.
우리의 철없던 시절을 커다란 몸통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을 것 같은 할미은행나무, 우리의 수호신 같았던 은행나무는 지금도 빛바랜 이름표를 단 채 그대로 서 있을까? 세월이 이처럼 겹겹이 흘렀는데도 미술부였던 나를 알아봐줄까? 어디선가 노란 은행잎 날아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2010년 전라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