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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산사
똑 똑 . . . ..또그르르. 희미하게 들리는 목탁소리에 눈을 떴다. 약하게 시작해서 강하게 울리는 것은 잠들어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의미이다. 단정한 몸가짐으로 법당에 들어서니 두 개의 촛불이 넓은 공간의 짙은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었다. 촛불 사이에서 타고 있는 향 연기는 긴 여운을 남기며 허공으로 스며들고 그 아래에 자리한 스님의 얼굴은 환한 불빛에서보다 더 경건하게 느껴졌다. 촛불은 비록 작은 빛이나 어둠 속을 뚫고 나가는 여력은 여느 빛 못지않나 보다. 희미한 불빛일망정 어딘가에 빛을 전하는 힘이 있으니, 부처님 얼굴 백호(白毫)의 빛을 더 영롱하게 살려낸다. 저 영롱한 빛이 내 눈 속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모든 잡념이 사라 질 것 같다. 절을 시작했다. 50배, 100배, 그 이상은 셈도 없이 그저 하고 또 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게 타 올라가기만 하던 촛불이 점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 움직임이 점점 흔들릴 정도로 힘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는 동안 써늘하던 냉기가 점점 훈훈함으로 바뀌면서 얼마 후엔 등에 땀이 흘렀다. 등에 땀이, 그래 이런 것이다. 이 추운 새벽에 냉기가 땀으로 변하듯이 사람의 머릿속도 어떤 변화가 있길 기대하면서 무릎이 시큰하도록 절을 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생명이 없는 것과 살아 숨쉬는 것들 앞에서 자꾸만 이 의미를 찾으려 들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생(生)과 멸(滅)의 경계는 더 뚜렷이 인식되어 지기만 했다. 멸(滅)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리 아니길 바라고 또 바라도 그건 억지였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까 아니면 거부하는 반응이었을까. 때론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자기도 했고 몇 밤을 뜬눈으로 새기도 했다. 첫서리가 내리던 날에 동생은 내 집 소파에 앉아서 뚝배기 같은 묵직한 웃음을 웃어 보이고 나갔다.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들렸다던 그 웃음의 여운이 일곱 밤을 채 못 넘기고 건장한 체격의 체온은 그만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건설 현장에서 순간의 사고였다. 선을 보는 자리에 이 누나가 꼭 참석하기를 원했던 건 부모님보다 제 내면의 갈등을 더 깊이 읽어내는 내게 의지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매번 도리질을 할 때마다 내가 더 답답했었다. 어떻게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평온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나는 우연히 만난 한 아가씨의 인상 하나에 모든 걸 걸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첫 눈빛이 반짝였고 덩달아 나에게도 기쁨이었다. 나로서는 파격적인 중매였다. 씩씩한 아들 녀석 둘을 데리고 내 집 현관문을 밀고 들어와 식탁을 싹싹 비우는 날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핏줄의 정이 넘쳤다. 내가 맺어 준 인연이었기에 더 특별한 정이었다. 그 인연의 끈을 그렇게도 쉽게 놓아 버렸단 말인가. 내가 맺어준 인연에 대한 책임을 이리 무겁게 남기고 떠나 버렸단 말인가. 그 무게에 질식 할 것만 같았다. 젊은 올케의 눈물과 한숨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린 조카들 앞의 가시넝쿨을 어떻게 헤쳐 주어야 할 것인가. 또 다시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한은 무엇으로 덜어 내 드리며 흩어져 가는 가족들의 거리를 어떤 힘으로 끌어 모으는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친정 집 큰딸의 멍에가 자꾸만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날들이었다.
예불이 끝남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멎고 절은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손으로 지그시 눌러 끈 촛불이 가느다란 연기를 남기다가 서서히 스며 버리자 법당 안은 짙은 어둠이 밀려들면서 반사적으로 밖이 조금 환하게 비쳐졌다. 법당 문을 밀치고 나오니 땀으로 촉촉해진 살갗에 찬 공기가 선뜩하게 스며들었다. 눈 덮인 산사의 새벽빛은 농축된 우윳빛이었다. 그 눈 위로 내려앉은 엷은 달빛이 새벽을 더욱 창백하게 물들였다. 마당의 탑 둘레에도 뒤편의 산신각 둘레에도 새벽의 찬 공기가 냉랭하게 서려 있어 훤한 낮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 산사, 고드름 달린 추녀 밑의 풍경은 그려놓은 그림처럼 움직임이 없어 더 깊은 정적을 느끼게 했다. 작은 움직임의 진동만으로도 총총한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니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혹독한 육체적 놀림이 짓누르던 정신적 압박감을 조금쯤 덜어낸 것일까, 잠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어디서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소리나는 쪽을 찾아가니 약수 떨어지는 소리다. 돌확을 넘쳐나는 물은 쩡쩡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 얼음 밑으로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는 물줄은 그 어떤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성싶은 단호함이 엿보였다. 비록 약하나 끊이지 않고 흐르는 한 아무리 추워도 물의 흐름은 끊어지지는 않으리라. 삶이란 이런 것일 거라 믿어 본다. 살아 움직이는 한 단절되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남은 사람은 또 그런 대로 나머지 생을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 내 어머니와 올케와 어린 조카들의 눈물도 시간이 가면 차차 잦아 질 거라고. 물 한 조롱박을 받아서 들이켰다. 얼음 밑을 흐르던 물은 시리디시리게 가슴을 훑어 내려갔다.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 애석함을 서서히 내리누르면서…….
백호(白毫) : 부처의 32상의 하나, 눈썹 사이에 난 터럭으로서 광명을 무량세계(無量世界)에 비친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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