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발소에 관한 명상
이 홍사
이발소에 앉아 있다.
미얀마에서 가장 큰 경제도시 양곤, 양곤의 가장 번화가에 있는 이발소에 앉아있다. 서울로 따지자면 명동에 있는 고급 이용소쯤 되는 셈이다. 내가 머리를 자르는 게 아니다.
일. 요. 일.
열대지방의 게으름이 몸에 밴 통역과 운전기사가 칼같이 쉬는 날이라 하릴없이 뒹굴며 창밖의 손 뻗으면 닿을 듯 휘늘어진 야자수 잎만 바라보다가 형님을 따라 나섰다. 호칭이야 형님이지 사실은 사업파트너이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인 김 선생이 이발을 하러간다고 하기에 냉큼 따라나선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는 당연히 머리 깎는 이발소 의자가 아닌 뒤에 있는 소파다. 소파에 몸을 묻고 형님의 뒤통수에서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을 지켜보고 있다.
벌초!
그렇다. 초가을 날 산소에 웃자란 풀이 예초기에 잘려 나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내 머리는 아니지만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머리를 좀 자르라고, 보는 사람이 답답하다고 몇 번이고 종용한 끝에 이발소를 찾은 것이기에 더욱 가슴이 후련하다.
째깍째깍......... 가위소리가 상큼하게 들린다.
가위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으니 어느 시인이 즐겨 쓰는 닉네임 평강 이발소가 생각난다. 그 시인의 대표작도 평강 이발소다. 그 시를 띄엄띄엄 기억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시인이 낸 첫 시집 표제작도 평강 이발소지 싶다. 구룡포에서 바다를 끼고 사는 그 여류 시인은 옛날 이발소의 낡은 미닫이 목문을 밀고 들어가 가위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처녀작으로 발표한 첫 시집의 서두에 그렇게 썼던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여류시인은 서문에 구룡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했다. 같은 인터넷 카페 회원인 그녀의 시를 읽으면 바닷바람과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바탕에 깔려있다는 착각을 하고 시를 오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파에 몸을 묻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한국에서 한파에 의해 준비를 부실하게 했던 옆집의 수도관이 동파되는 걸 보고 미얀마로 날아 온 지 겨우 나흘이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 더워 하루에도 찬물 샤워를 두 세 번씩 하며 땀을 씻어내고 속옷을 갈아입고, 지금은 시원하게 돌아가는 에어컨 아래 앉아 가위소리를 들으며 구룡포에 사는 여류시인의 시, 평강 이발소를 떠올리고 있다.
평강 이발소, 시보다 먼저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귀에 이명처럼 일며 가위소리와 함께 섞여 절묘한 화음이 내 나팔관을 자극하고 있다. 이국땅에서 나팔관을 자극하는 음은 청아하다. 이럴 땐 어김없이 불쑥 인다. 창작의욕이.
그 여류시인의 시작詩作 모티브는 분명 바다에 있고 나는 그녀가 시를 잉태하는 바다의 자궁을 뒤져 이발소를 찾아내고 그 가위소리를 모티브로 또 다른, 내 장르에서 창작의욕에 불을 지피고 있다.
쓰고 싶다. 아니, 언어를 조립하고 싶다. 귀에 이는 절묘한 화음, 파도소리와 가위소리를 조립하여 혀에 착착 감기는 문장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갑작스런 의욕은 제어하기 힘이 든다. 버릇처럼 빈손에 볼펜을 쥔 것처럼 말아 쥐고 뭔가 글을 쓰는 시늉을 할 뿐 글을 쓸 환경이 아니다. 이럴 땐 글의 줄거리를 구상하는 게 상책이다. 거기에서 기발한 문장이나 아포리즘을 하나 건지면 대단한 수확이다. 눈을 감고 이발소에 대한 내 기억의 앨범을 찬찬히 뒤적인다. 빛바랜 사진 들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내 기억의 이발소와 이곳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곳은 이발소와 발 마사지를 겸업하고 있다. 아니 미용실과 겸업하는 곳이 이라고 해야겠다. 미얀마어로 갈겨놓은 간판이 이발소인지 미용실인지 구별할 수가 없지만 형님이 이발을 시작하기 전에 진 생머리의 미얀마 처녀가 드라이어를 하고 나갔다. 커트를 하는 이발사도 남자가 아니라 뚱뚱한 사십대의 아줌마이므로 분명 미용실이다. 이발의자가 세 개 나란히 거울 앞에 있고 그 옆으로 발 마사지 받는 의자가 여섯 개 있는데 빈자리가 없다. 누운 손님들의 발에 젤을 바르고 발가락이나 발바닥을 지압하는 처녀들이 빨간색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입고 저마다 일에 열중이다. 누워서 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기에 미용실 안은 사람은 많지만 가위소리 아니면 적요가 감돌 것이다.
이발소는 남자들만 가는 곳이고 미용실은 여자들만 출입하던, 철저히 구분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미용실마다 남성 커트 전문이라고 적어놓아 그 성벽이 허물어진 지 오래다. 젊은 사내들은 모두 미용실을 출입하니 이발소가 설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나는 미용실에 잘 가지 않고 집 부근의 단골 이발소에 다닌다. 목욕을 하러 가더라도 목욕탕에 딸린 곳에서 이발을 하지 않고 꼭 단골 이발소에서 먼저 이발을 마치고 목욕탕에 가는 형편이다.
단골 이발소는 이래 깎아 달라, 저래 깎아 달라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깎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 이발소의 십이 년 단골인 셈이다. 단골 이발소의 월남 참전용사였던 늙은 이발사는 우리 집 사정을 낱낱이 알고 무슨 말을 걸어서라도 이발 하는 동안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월남이고 그 다음이 정치에 관한 얘기다. 그의 월남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발을 마치고 머리를 감는다. 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서 진솔한 작품을 만들어 볼까?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한다.
이발소에 관해 글로 쓰자면 당연히 해평 이발소를 주제로 써야 한다. 해평 이발소를 주제로 잡으면 우리 가족사가 글에 스며든다. 해평 이발소는 바로 할아버지께서 하신 이발소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이발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발소를 경영하셨다. 이발소를 차려놓고 직공을 둘 들인 것이다.
해평이면 경북 선산, 지금은 구미시로 편입되어 도시의 변두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인구 만 오천을 웃도는 읍에 가까운 면단위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는 사람들과 타지에서 온 상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할아버지께서 이발소를 차린 목적은 간단하다. 그 때는 마을마다 이발소가 있었고 장터에는 한일 이용소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터에 사는 눈이 트인 사람들은 친일파가 하는 한일 이용소를 이용하지 않고, 그렇다고 걸어서 마을 이용소도 싫다하고 백 리나 떨어진 대구까지 가서 이발을 하고 오는 것이다. 주위의 지인들이 이발소나 하나 차리라고 권유해서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 입으시던 코드의 내피인 호피虎皮를 팔아서 이발소를 차린 것이다. 할아버지께선 어째서 호피 코드를 입으셨는가?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할아버지는 부자셨다. 한국에서 보통 부자가 아니라 만주에서 천석을 하는 부자셨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독립군의 자금을 대어주고 남는 금액을 이따금 들어오시는 고모부 할아버지, 할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매제들에게 한국으로 보내셨다. 고향에 가서 땅을 사라고 보내신 돈인데 고모부 할아버지 둘이서 그 돈을 받아서 매번 노름으로 탕진을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잃고 다음에는 본전을 찾기 위해서 노름판을 찾고 그 다음에는 전번의 본전이라도 건졌으면 하는 생각에 노름판을 찾았다고 했다.
만주생활 십이 년 동안 수십 차례 큰돈을 매제들을 통해 보내며 고향인 해평에 땅을 샀으리라 짐작하시고 독립자금의 출처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 오자 주재소에 몇 번 끌려가서 취조를 당하시고 사람을 데리고 지으시던 전지를 더러는 헐값에 팔고 더러는 그대로 버리고 야반도주를 강행하신 것이다. 그 때 할아버지께선 장질부사(장티푸스)로 이년 간 고생을 하셨는데 내 친할머니는 해평에서 고향을 지키고 계셨고 그 곳에서 만난 할머니가 병수발을 하였기에 헤어지지 못하고 고향으로 데리고 오신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할머니가 둘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나는 그 할아버지의 둘째 손자로 태어났다.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추측컨대, 할아버지께선 할머니 둘을 데리고 한 집에 사실 수가 없어서 만주에서 돌아오는 길로 장터에 만주에서 가져온 돈으로 땅을 조금 사고 딴살림을 차린 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그 작은 할머니를 ‘장터할매’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큰방할매’, 사랑채에 계시는 증조할머니는 ‘노할매’, 장터 이발소에 계시는 할머니는 ‘장터할매, 그렇게 구분하여 호명하였다. 할머니가 셋이나 되니 우리 어머니 고생이야 누구나 짐작할 게다. 성질이 급해 제풀에 스르르 무너지는 어머니는 마흔여섯, 그렇게 단명하신 이유가 있다.
장터 할머니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을 떴다. 이발소에 대해서 생각하니 기억의 앨범에 한 페이지를 차지한 그 분이 떠오르고 철이 들고 생각하니 친정 식구까지 다 데려와 그 친정 조카들이 연대보증이란 게 있던 시절, 우리 집안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니 감정의 조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며 심란한 기분이 들어 자연스럽게 눈을 뜬 것이다. 그 분은 생각을 말자! 친정 조카들이 우리 집안에 끼얹은 찬물은 더욱 생각을 말자고 다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의 이발은 기계로 뒤통수를 마무리하고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빗을 대고 고르고 있다. 심혈을 기울여 가위질을 하고 있는 사십대의 아줌마에게 눈길이 갔다. 몸피가 튼실하다 못 해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정도로 뚱뚱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가위질을 가볍게 한다. 가볍게 움직이는 팔뚝이 내 허벅지 굵기다. 아무리 못 나가도 백육칠십 근은 넉넉히 나가겠다. 허리에서 내려오는 히프라인은 보기가 더 답답하다. 허리는 평평하게 내려와 히프에서 라인이 툭 불거지니 그 위에 계란 하나를 올려놓아도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자고로 여자를 보면 치마속이 궁금해야하는 법이거늘, 미용사 아줌마는 전혀 그런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 다만 저 몸매에 섹스를 어떻게 할까 궁금할 뿐이다. 아무리 살피며 상상을 해도 섹스는 불가능할 것 같다.
내가 지금 뭘 상상하고 있는 거지? 엉큼하고 불손하게.
자신을 꼬집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산만해진 생각을 원위치 시키며 눈을 감았다.
내 어린 시절은 늘 할아버지의 해평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큰방할머니를 따라 오일장이 서는 날 장터에 따라가서 이발의지에 빨래판을 걸쳐놓고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깎았다. 할아버지께서 사주신 눈깔사탕을 물고 직공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가위소리를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위소리는 변함이 없다.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묻고 가위소리를 듣고 있으니 입안에 눈깔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침이 고인다. 큰방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 만주에서 돌아오셔서 고향에 많은 땅을 샀으리라 짐작했는데 그렇게 보낸 돈이 노름 밑천으로 다 날아갔다는 사실을 아시고 허망하게 뱉은 첫마디가 ‘그 사람들 그거 참!’ 이라는 한마디였다고 했다. 그 뒤로 도 매제들을 마땅찮아하거나 그 돈에 대해서는 평생을 거론하지 않으셨다. 큰방할머니는 그 우유부단한 성격이 늘 못마땅해 하셨다.
그렇다. 할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인자한 웃음으로 손자인 나를 대하시는 할아버지는 내가 다닌 해평초등학교의 1회 졸업생이었다. 할아버지는 해방 전 1회 졸업생이셨고 공교롭게 아버지께선 해방 후 1회 졸업생이셨고 나는 그 학교의 50회 졸업생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할아버진 모교의 기성회장이셨다. 삼일절이면 할아버지께서 운동장 교단에 올라가 만세 삼창으로 한 학기가 시작되었고 운동회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본부석 교장 선생님 옆자리에 당연히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당시 우리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이천 명에 가까운 거대한 초등학교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지께서 기성회장인 관계로 선생님들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우쭐해 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할아버지께서 이발소 경영을 시작하신 것은 내 기억에 없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 싶다. 그러나 내가 중학에 입학하자 할아버지는 이발소를 그만두셨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 앞에 있는 이발소, 할아버지의 이발소에 직공으로 있던 이발사가 차린 이발소에서 이발을 했다. 아는 사이라고 대우가 달랐다. ‘료금표’ 라고 빛바랜 요금표 액자가 걸려있었지만 가끔은 나에게는 이발 요금을 받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께 받은 이발 요금이 고스란히 내 몫으로 굳어진다.
-내일 골프 치러 갈 거야?
이발 의자에 앉은 형님이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불쑥 물었다. 골프? 골프가 뭐더라? 이발소와 골프가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잠시 헷갈렸다.
-내일 밍글라돈 골프장이 스포츠 데이라고 정해서 그린피가 50%야.
-그래요?
언젠가 들었다. 어느 골프장이 월요일을 스포츠 데이로 사규를 정해서 그린피 50%의 이벤트를 한다고. 그러나 골프에 관심이 없기에 그냥 흘려들었다. 50% 이벤트를 안 하더라도 미얀마는 그린피가 턱없이 싸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린피가 삼만 짯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골프에 미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사만 짯을 원화로 계산하면 삼만 사천 원 쯤 된다.
-지금 왼쪽 어깨 때문에 백스윙이 안 되는데........
-그냥 잔디밭을 걷는 재미로 아이언 하나 잡고 볼을 툭툭 치고 나가면 되잖아?
형님이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재안했다. 나도 거울 속의 형님을 보고 그럴까요? 하고 대답했다. 왼쪽 어깨에 인대가 늘어나고 오십견이 겹쳐서 백스윙이 안 된다. 평소에는 아프지 않는데 열중 쉬어 동작과 바지를 입고 팔을 돌리고 허리띠 끼우는 동작을 취하면 어깨가 당기고 깜짝 놀라게 아프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모른다. 몇 번이고 병원을 찾았지만 그때뿐, 차도가 없어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골프는 언감생심이다.
-캐디 붙이지 말고 그냥 잔디밭을 걷는 제미지.
형님은 그럴까요? 라고 심드렁한 내 대답에 쐐기를 박았다.
-생각해보고요.
역시 불확실한 대답을 토해놓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별로 할 일이 없다. 계약하려던 땅, 주인이 생각해볼 시간을 사흘 달라고 어제 얘기했었다. 그 사흘을 손을 놓고 기다려야한다. 금액과 계약조건을 다 흥정하고 마지막에 계약서를 쓰려다 말고 사흘의 재고 기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가 차서 한숨을 옹골지게 쉬자 이렇게 하는 것이 미얀마 스타일이라고 통역이 일러주었다. 통역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빨리 빨리 습성 때문에 미얀마에서 항상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적 위도에 의해 사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빨리빨리’가 몸에 배었다. 옛날 농경시절부터 봄 일은 봄에 마쳐야하고 여름 일이 따로 있고 가을걷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마쳐야하기에 ‘빨리빨리’가 몸에 밴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그렇지가 않다. 오늘 못 하면 내일하면 되고 내일 못 하면 그 다음날 하면 된다. 모든 것이 느긋하다. 한국 사람인 나도 성질이 급하다. 외국에 나가면 맨 먼저 배우는 그 나라 말이 ‘빨리빨리’다. 영어로 퀵퀵, 중국어로 콰이콰이, 베트남어로 얄랑얄랑, 몽골어로 호르땅호르땅, 미얀마어로 미얀미얀이다.
컴퓨터 부팅이 3초 느리다고 멀쩡한 컴퓨터를 바꾸는 민족이 한국 사람이란다. 골프장에서도 그 민족성이 드러난다. 앞에 치고 나가는 중국인 팀이 세 명이고 우리는 다섯 명인데도 불구하고 바짝 달라붙어 나인 홀 쯤 가면 결국 추월하는 것으로 패스를 받는 게 한국 사람이란다. 또 중국집에 자장면을 시키면 어떤가? 음식을 주문한 지 오 분이 안 되어 독촉전화를 두 번이나 한다. 그 민족성이 꼭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성질이 급한 민족이 일구어낸 한강의 기적! 말 그대로 기적이다. 어린 시절 쌀독 옆에 놓인 파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절미함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마다. 쌀독에서 쌀을 퍼고 그 쌀에서 세 숟가락 들어서 절미함에 넣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땐 식량이 부족했다. 60년대까지 미얀마인 버어마에서 쌀 원조를 받던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되었다. ‘빨리빨리’의 민족성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이백 년이나 삼백 년에 걸쳐서 이룰 경제부흥을 단 삼십 년 만에 일구고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구석구석에 한국 사람이 선교사로 나가 있거나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릴 적에는 내가 이 나이에 미얀마에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여기는 미얀마다. 나는 이발요금이 한국의 삼 할이 채 되지 않는 이발소에 앉아 있고. 정말이지 삼십 년 전만해도 꿈도 꾸지 못했다. 특별할 게 없는 한국의 보통 사람이 미얀마에 나와서 가정부를 둘이나 두고 통역과 기사까지 채용하고 차를 굴린다는 것은.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통역은 땅이 계약되면 그만 둔다는 것을 녀석도 알고 있다. 영어로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라 미얀마어로 계약서를 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데리고 다니고 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자식이 우리가 하는 얘기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우리 얘기에 제 생각을 포함해서 전달하곤 하는 바람에 서로 오해가 생기고 계약이 무산된 적도 있다. 가사도우미와 기사는 그대로 채용해서 쓸 생각이다. 지리를 모른다거나 면허가 없어서가 아니다. 형님과 나는 미얀마 운전면허가 있고 지리도 대충 익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운전하면 교통경찰에게 뜯기는 돈이 기사 한 달 월급과 버금간다. 미얀마 교통경찰은 외국인이 운전하는 것이 눈에 띄면 무조건 차를 세운다. 잘못한 게 없는데 차를 세운다. 교통의 흐름을 관찰하고 원활하게 흐르도록 신호를 하는 우리나라 경찰과 다르다. 나도 양곤에서 서너 차례 걸린 적이 있다. 차를 세우면 일단 면허증부터 보자고 한다. 면허증을 보여주면 차량 등록증과 세금납부 영수증을 보자고 한다. 영수증은 삼각형으로 생긴 붉은색 스티커인데 앞 유리에 붙이고 다녀야하지만 보통은 붙이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을 손에 쥐고 타이어를 툭툭 차며 차를 한 바퀴 돈다. 걸릴 게 없으면 방향지시등을 켜보라고 하고 브레이크를 밟아 보라고 하고 브레이크 등을 살피고 심지어 넘버가 조금 찌그러진 것을 가지고 흠을 잡는다. 결국 돈을 요구하는 것인데 ‘빨리빨리’ 근성을 지닌 우리가 ‘배 째라’ 하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느긋하지 못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차를 돌고 있는 경찰을 불러 오천 짯을 쥐어주면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돌며 쥐고 있던 면허증과 등록증을 돌려주고 거수경례를 척 붙인다. 경찰이 돈을 받는데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관행이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물건 값을 주듯이 돈을 펴서 내밀어도 상관없다. 아무 거리낌 없이 돈을 받는다. 준비성이 철저한 나는 국제면허증에 오천 짯 짜리 한 장을 접어서 넣어두고 있다.
형님은 어느 날 재수 없게 연거푸 세 번이나 걸린 날도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경찰에게 뜯기는 돈으로 차라리 기사를 채용하는 게 낫다. 하여 기사는 그대로 데리고 있을 생각이다. 또 차량 보험이 없어서 조그만 접촉사고만 나도 무조건 외국인이 불리하다. 분명 신호를 받다가 뒤에서 바쳤지만 외국인 잘못으로 돌린다. 그 점이 두려워 ‘까 써야’를 데리고 있을 생각이다. 미얀마에서는 기사를 두고 ‘까 써야’ 라고 부른다. 한국말로 풀이하면 ‘운전사 선생님’이 되는데 가까워지면 이름을 불러도 무방하다. 데리고 있는 아웅퓨 녀석은 심성도 곱고 제가 알아서 잔심부름까지 하고 마당의 공터에 제 집에서 씨앗을 가져와 상추와 이름을 들어도 자꾸 잊어버리는 미얀마 채소까지 가꾸어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융통성을 부리고 있다. 오늘은 녀석이 쉬는 날이라 내가 차를 끌고 시내로 나왔다. 형님 이발이 끝나면 땡기제(땡끼시장)에 가서 참깨를 좀 사야겠다. 어제 아내로부터 국제전화가 왔었다. 지난번에 사다준 미얀마 산 참깨로 기름을 짜서 큰집과 이웃에 돌렸더니 맛있다고 난리라면서 들어올 적에 좀 더 사오라는 것이다.
몰라서 그렇지 국내에서 먹는 참기름 오 할이 미얀마 산이다. 참깨를 그대로 들여가는 게 아니다. 농산물 관세가 육 백 프로가 되어서 약삭빠른 무역상들이 참깨를 살짝 갈아서 가축 사료용으로 들여가는 것이다. 그렇게 관세를 피해서 들여가서 기름을 짜서 기름은 식용으로 대기업에 납품하고 깻묵은 사료용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가끔 그게 문제가 되어서 텔레비전에 뉴스로 가축 사료용을 식용으로 팔았다고 나오는 게 다 그런 루트다. 엄연히 사료용으로 들여갔으니 불법이라 걸려도 대기업은 걸리지 않고 중간 도매를 한 힘없는 중간상인이 걸려들어 처벌 받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한 이치다. 이른바 깃털의 논리인가?
이발소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빠졌다. 나는 참기름에 듬뿍 젖은 내 생각을 건져 이발소로 옮겼다. 몸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듯하다.
내 어릴 적 이발소 의자에 얹어 놓은 빨래판에 앉아서 ‘하이 칼라’ 로 머리를 깎으며 눈깔사탕을 물고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당시에 또래들은 집에서 ‘바리깡’이라는 재래식 수동 기계로 제 아버지가 감나무 그늘에서 윗옷을 벗은 아이들의 머리통을 빡빡 밀어주던 시절인데 ‘하이 칼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큰방 할머니를 따라 근 십리가 되는 신작로 자갈길을 걸어서 장터에 가서 할머니는 장을 보고 나는 하이 칼라를 하고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가득 넣어서 돌아오는 길이면 철이 없게 할머니가 둘인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참 어린 시절 얘기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할머니가 둘이라는 게 자랑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도회로 나갔다. 방학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 껄끄러울 정도였다.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할아버지께서 십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신다. 그러나 ‘장터할머니’ 는 오시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철이 들어서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다시 가위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 기억 속에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터할머니’는 나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아니, 미워한 게 아니라 친정 조카들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창조아재라고 부르는 친정 조카는 할아버지의 이발소 작은 방에서 기숙하며 중학과 고등학교를 다녔다. 할아버지의 이발소에 가면 만나는 창조아재는 면단위에 하나 밖에 없는 상업고등학교의 악대부 단장이었다. 창조아재 방에는 항상 학교에서 가져온 트럼펫과 크고 작은 나팔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게 그렇게 불어보고 싶었지만 ‘장터할머니’의 눈치 때문에 불어 보기는커녕, 마음대로 만져볼 수조차 없었다. ‘장터할머니’와는 달리 그녀의 친정조카가 되는 창조아재는 나를 귀여워 해주었다. 어느 날 큰방할머니를 따라 장터에 갔다가 이발을 마치고 창조아재를 따라 시장 골목을 벗어나 지류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제방에서 나팔 연습하는 것을 보며 나도 나팔이라는 것을 불어보았다. 트럼펫이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게다. 그 땐 유치원이란 게 없었지만 나는 집에서 개명하신 엄마께서 가르쳐주신 덕택으로 한글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나팔을 부는 아재를 보며 길바닥에다 창조아재의 이름인 ‘김창조 최고’ 라고 나무 막대기로 써놓았다. 트럼펫을 연습하던 창조아재가 그 글을 보더니 나팔을 손에 쥐고 나를 안아주며 언제 글을 배웠냐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한도막이 지나간다.
그날 날이 어둑해서야 트럼펫 연습을 그만 두고 나팔을 하나씩 들고 해평 이발소로 돌아오니 ‘큰방할머니’는 장보기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나는 내심 잘 됐다 싶었다. 할머니가 없으면 나는 창도아재와 잘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웬 걸. ‘장터할머니’의 단호한 거절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이발소 직공에게 자전거를 내어 주시고 나는 이발소 직공의 건장한 허리를 잡고 자전거 꽁무니에 실려 어둠이 내리는 신작로를 달리며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집에 도착하니 ‘큰방할머니’의 분노는 더 심했다. 어린 나를 두고 분개하는 게 아니라 ‘장터할머니’에 대한 험담이었다. 돌아오거든, 저녁을 먹여서 재우라고 했거늘 애에게 밥도 먹이지 않고 오밤중에 집으로 돌려보낸 것에 대한 분개였다. ‘큰방할머니’가 허공에 대고 그렇게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장터할머니’와 사이가 왜 안 좋을까 짚어보았지만 그 땐 그 수수깨끼를 풀 수가 없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이발소 직공이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에게 창조아재가 나팔을 잘 불더라고 자랑을 했다. 아버지마저도 창조아재를 싫어하는지 그 자식 얘기는 듣기 싫다고 하셨다. 왜 식구들은 친척인데 미워할까? 이유를 그 땐 알 수 없었고 단지 복잡한 가계라는 것만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 앞에서 창조아재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끔 이발소에 가면 창조아재가 기숙하는 방의 방문을 열어보고 구석에 서 있는 나팔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창조아재는 면에서 유지인 할아버지의 입김으로 면사무소 옆에 있는 단위조합에 다니고 있었다. 그 때는 귀한 오토바이를 창조아재는 타고 다녔다. 내가 고등학교를 가까운 도회에서 다녔기 때문에 할아버지 댁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이발소도 그만두었고 인사차 가는 일이 아니면 들를 일이 없었다. 그 때 창조아재가 조함에서 사고를 쳤다. 지금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공금 횡령이었지 싶다. 취업에 연대 보증을 섰던 아버지께서 며칠 드러누웠다. 며칠간 식음을 전패하시고 고민하시던 아버지께선 소를 팔고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논을 팔아서 그 돈을 갚았다. 물론 창조아재는 어디론가 잠적하고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창조아재를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구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들었지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나타나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그 점을 생각하면 나도 이가 갈린다.
여기는 미얀마다. 어쩌다 생각이 지금은 얼굴 기억마저도 희미한 창조아재까지 미쳤는지 모르겠다. 이발소에 대해서 낭만적인 생각만을 하고 싶었는데 내 사유는 엉뚱한 곳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다.
닻을 올리며 번쩍 눈을 떴다. 형님 이발은 어지간히 끝나간다. 그 사이 발 마사지를 받던 금발의 서양인 중년 여자가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있다. 키가 상당히 큰 팔등신이고 군살이 없는 몸배다. 카운터를 보는 미얀마인 남자는 영어가 능통하다. 영어에 대해서 젬병인 나는 부러운 눈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미얀마에는 영어가 통한다. 영국의 지배를 백오십 년 받은 영향이겠지만 노인들도 영어를 예사로 구사한다. 서양인 여자는 마사지 값을 카운터에 지불하고 뒤에 붙어선 미얀마 소녀에게 얼마간을 팁을 손에 쥐어주고 가뿐한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쳐 출입문으로 나갔다.
-그 년 잘 빠졌는데........
이발의자에 앉아 있던 형님이 거울속의 나를 보고 말했다. 이발소 안에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나뿐이다. 형님은 맘을 놓고 속어를 지껄이고 있다.
-누구 말이에요?
-방금 나간 양년! 따라가서 꼬셔봐! 꽤나 섹시한데.......
-영어가 되어야 말을 걸죠. 어느 망할 자식이 영어는 만들어 가지고...... 한국에 들어가면 영어학원에 등록을 해야겠어요.
-하하하. 그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고?
-공부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바디랭귀지가 편해. 자꾸 부딪히면 소통이 된다구. 모르면 억지로 미얀마 말이나 영어를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한국말로 해! 표정을 보고 알아듣는다구. 강아지와 한 삼십 분 정도 같이 있으면 이 녀석이 똥이 마려운지 배가 고픈지 알 수 있지. 언어가 아니라 교감으로 알 수가 있어. 하물며 인간인데 소통이 안 되려구!
-그래도 영어 공부를 좀 하는 게 낫겠죠?
-정통으로 영어 공부를 해봤자 여기선 말짱 황이야. 콩글리쉬가 아니고 여긴 미얀글리쉬야. 오래 있으면 저절로 소통이 돼. 그 점은 걱정하지 말어.
-알았어요. 형님 이발 마무리는 제가 해드릴까요?
-뭐야? 남의 머리 망칠 일이 있어?
-그럴 일 없어요. 군대에서 ‘깎사’로 통하는 이발병을 했다구요. 이릴 적에 우리 집도 이발소를 했구요. 군대에서 대대장도 고참 이발병을 제쳐두고 나한테 머리통을 디밀었어요.
-그렇더라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사업을 그만두고 길거리 이발사로 나앉으면 밥은 굶지 않겠네.
-여기도 길거리 이발사가 있어요?
-변두리로 가면 있습니다. 이발비가 오백 짯이지요.
언젠가 베트남 여행을 갔다가 본 길거리 이발사가 미얀마에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지만 이발할 자신이 없다. 군대에서 이발병을 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다. 이발병은 거의가 방위병이었다. 방위 이발병에 생각이 미치자 그 방위병을 소재로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나는 군에서 해안근무를 했다. 거의가 분초단위였다. 우리가 분초에서 이발하러 대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깎사가 보름에 한번 정도 분초에 들린다. 그 방위병 입장에서 보면 매일 출장이다. 이 분초 저 분초로 돌아다니며 사병들의 이발을 한다. 그 깎사가 들고 다니는 국방색 백에는 이발 기계와 가위, 그리고 나일론 보자기가 들어있다. 깎사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분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나무의자를 내어놓고 이발을 하면서 바다를 본다. 야간 근무를 서면서 보는 바다와 이발하면서 보는 바다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깎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의자에서 보는 바다는 평온했고 밤에 근무를 서면서 보는 바다는 전장이라 긴장감이 감돌았다. 깎사에게 머리통을 맡기고 바다를 보면 그 쪽빛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 땐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깎사는 항상 이발을 마치면 거울 두 개를 이용하여 제가 깎은 뒤통수를 보여준다. 마음에 들면 그만이지만 이발이 맘에 들지 않으면 일찍 대대로 보내지 않고 얼차려를 주거나 사역을 시켜 분풀이를 하는 악랄한 선임병도 있었다. 이발병이 신임일 때는 가는 분초마다 얼차려를 받느라고 죽을 맛이지만 금세 누구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고 어느 선임은 어떤 머리가 어울린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이발의자에 앉은 형님의 머리가 마무리 되자 뚱뚱한 이발사가 작은 거울로 뒤통수를 비춰주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형님 맘에 들지 않더라도 얼차려를 주거나 사역을 시킬 수가 없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얼차려를 주었다간 이백 근은 족히 나갈 저 여자는 금세 숨통이 끊어질 것이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뚱뚱한 미얀마 아줌마가 얼차려 받는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왜? 내 머리가 이상한 거야?
거울 속의 형님이 내가 웃는 것을 보고 퉁을 먹였다.
-아닙니다. 형님, 저 몸매에 어떻게 부부관계를 할까 그 상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거울 속의, 거울로 형님의 뒤통수를 비춰주는 아줌마를 턱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발사 아줌마는 자기 얘기를 하는지 모르고 거울을 이리 저리 비춰주며 외국손님이 자기가 한 이발이 맘에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집 유한부인을 두고 대단히 불손한 상상을 하고 있구만.
옛날 군대의 깎사처럼 얼차려를 주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우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형님은 밀실의 커튼을 젖히고 머리를 감으러 들어갔다. 머리를 왜 컴컴한 밀실에서 감는가?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고 일어서 커튼을 젖혀 보았다. 밀실 안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누워 전신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머리를 감는 시설이 붙어 있었다. 아하! 여기는 세 개의 업종을 겸하고 있구나. 나는 커튼을 닫아주고 내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째깍 째깍.
어디선가 가위소리가 일었다. 평강 이발소를 썼던 여류시인은 이 소리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리라. 그녀의 시심을 자극한 가위소리 아주 날카롭고 상큼하게 내 귀에서 일었다. 가위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어릴 적 해평 이발소에서 이발의자에 빨래판을 가로로 걸쳐놓고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깎던, 그 가위소리와 흡사하다. 가끔은 장보기를 일찍 마친 ‘큰방할머니’가 오늘의 나처럼 뒤편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그 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총각 이발사의 탄탄한 몸매를 보고 있었을까?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건 결코 아니다. 남편을 젊은 시절에 ‘장터할머니’에게 빼앗기고, 이발소와 붙은 안채에는 들어가시질 않고 이발소 의자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큰방할머니’ 입장에서 짚어보니 참담하고 숙연해진다. 그 숙연함 가운데 가위소리가 더 크게 귀에 울리고 있었다. 째깍 째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