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때 묻은 지폐
이 홍사
이 나라에는 오만 짯짜리 지폐가 없다 고액권이 만 짯 그 돈은 나오는 대로 부자들의 금고 안으로 들어가 쌓였다 은행보다는 금고를 더 믿는 나라 오천 짯짜리도 귀하기는 마찬가지 오천 짯짜리로 바꾸려면 당연히 웃돈을 줘야 하는 나라 서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건 거의 천 짯짜리 8,400만 짯을 천 짯짜리 지폐로 챙기면 얼마나 될까 여태 몰랐다 백만 짯짜리 다발로 야물게 묶어서 여행용 큰 가방으로 세 개에 꽉 차서 지퍼를 억지로 채울 정도 가방이 워낙 커서 혼자 들기에 버거웠다 좀도둑이 설친다는데 강탈 걱정 없었다 어제는 이놈을 은행에 넣으려고 낑낑거리며 화물차를 불러 짐칸에 실었다 은행 앞에서 문지기의 도움으로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 그런데 이 돈을 다 헤아리는 것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답답했다 먼저 지폐 식별기에서 세고 다시 계수기로 다시 계수기로 헤아려 확인하는데 저걸 언제 다 세나 답답한 마음에 실금이 갔다 미얀마 은행 직원들은 하도 해보아서 표정은 덤덤했고 손놀림은 빨랐다 두 녀석이 계수기를 돌리고 한 녀석이 묶는 걸 보니 괜히 이는 짜증 돈뭉치만 확인하고 뒤에 의자에 앉아 있으니 지점장으로 보이는 인도계 검둥이가 나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돈 헤아리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친절하면서 귀찮은 설명 확인하지 않으면 돈 세기를 중단할 기세 창구 앞에 서서 보고 있으니 한 장 한 장 내가 살아온 날이 계수기를 통해 검수되고 있었다 때에 절은 지폐가 된 내 지난날은 계수기를 거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덜컥 걸리는 지폐 한 장 그래 내 지난날도 저렇게 걸리던 날이 있었지 잘 넘어간 삶이란 어느 놈에게도 없는 법이지 나도 한때 저렇게 걸려 절망하고 방황했었지 그런 호사스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덜컥 걸린 지폐는 위조지폐였다 천 짯짜리를 위조하다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내 생에서 덜컥 걸리는 날이 있었지만 위조는 아니었다 억울했다 여직원이 위조지폐를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보이며 흰 바탕에 있어야 할 코끼리 그림이 없다는 설명 위조임을 인정했다 은행에서 내미는 서류 위조지폐가 증빙자료로 첨부된 복잡한 진술서가 눈앞에 펼쳐졌다 단박에 내가 범죄자로 둔갑했다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넘는 아버지의 존함을 영문으로 쓰고 사인을 했다 이 나라는 성이 없기에 뭐든지 증명하려먼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해야 하는 이상한 나라 84.000장이나 되는 지폐에서 나온 한 장의 위조지폐 나는 겨우 22,000일을 조금 넘게 살았다 아무래도 30,000일이 넘도록 기억이 온전하지 못할 터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턱 걸리는 위조지폐는 만나지 않아야 했다 그 처절하고 간곡한 바람을 품고 때에 절은 천 짯짜리 위조지폐처럼 구겨져 이국에서 잠들었다 내 통장에 찍힌 액수는 8,400만 짯에서 딱 천 짯이 빠지는 금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