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敎授坐禪 第 四
(4. 좌선법을 가르치시다)
이 품에서는 참선의 참 뜻을 일러 주시기를
평등(진여)문으로 본성인 실상의 좌와 선을
들어 보이셨다.>
師께서 示衆云하시되 善知識이여 何名坐禪인가 此法門中에
無障無 하여 外於一切-善惡境界에 心念不起를 名爲坐하고
內見自性不動이 名爲禪이니라 善知識이여 何名禪定인가
外離相爲禪이요 內不亂爲定이니 外若着相하면 內心卽亂하고
外若離相하면 心卽不亂이니 本性-自淨自定이나
只爲見境思境으로 卽亂이니 若見諸境하되 心不亂者는
是眞定也니라 善知識이여 外離相卽禪이요 內不亂卽定이니
外禪內定이 是爲禪定이라 淨名經云하되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하며 菩薩戒經云하되 我本性이 元自淸淨하시니
善知識이여 於念念中에 自見本性淸淨하여 自修自行하면
自成佛道하리라 然이나 此門坐禪은 元不着心이며
亦不着淨이며 亦不是不動이니 若言着心하면 心元是妄으로
知心如幻-故無所着也니라 若言着淨하면 人性本淨이거늘
由妄念故로 蓋覆眞如이니 但無妄想이면 性自淸淨이니
起心着淨하면 却生淨妄이니 妄無處所라 着者是妄이니
淨無形相이거늘 却立淨相하면 言是工夫라하나 作此見者하면
障自本性하여 却被淨縛하니라 善知識이여 若修不動者라면
但見一切人時에 不見人之是非-善惡過患하면
卽是自性不動이니라 善知識이여 迷人은 身雖不動이나
開口하면 便說他人-是非長短好惡하여 與道違背하나니
若着心着淨하면 却障道也니라.
대사께서 대중에게 일러 보이시기를
"선지식이여!
무엇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가운데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모든 선과 악의 경계에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라 이름하고,
안으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음을 보는 것을 선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이여!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을 여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니
밖으로 만일 상에 집착하면
안으로 마음이 곧 어지럽고,
밖으로 상을 여의면 마음이
곧 어지럽지 않는 것이니,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원래)로 정(定)한 것이나,
다만 경계를 보고 경계를
(恒常한 것으로)생각한 때문에
執着함으로써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만약 모든 경계를 볼지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이것이 참定이니라.
선지식이여!
밖으로 상을 여읨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곧 정이니,
밖의 禪과 안의 定이 올바른 선정인 것이니라.
정명(유마)경에 이르시기를
"즉시 막힘없이 환(豁然)하면
돌이켜 본심을 증득한다" 하셨으며,
보살계경에 이르시기를
"나의 본성이 원래 스스로 청정하다"
하셨으니,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가운데에 스스로
본래의 성품이 맑아 깨끗함을 보아서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스스로 불도(위없는 보리-불지견)를 이루리라.
그러나
이 門(깨달음에 드는 문)의 좌선이란 것은
원래 마음은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깨끗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움직이지 않는 이것도 아니 (반야작용)니
만약 말하기를
"마음에 다다른(着)다" 하면
마음이란 것이 원래 망령된 것
(이름한 것일 뿐)으로
마음이란
환과 같으므로 다다를 것이 없는
것임을 알 것 이니라.
만약 말하기를
"깨끗한 것에 다다라(着)야 한다" 하면
사람의 자성이 본래 깨끗하거늘
(깨끗이라는)망령된 생각으로 말미암은 연고로
도리어 덮게 (가려 흐리게)되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없으면
자성이 스스로(본래) 청정한 것이니
마음을 일으켜 깨끗한 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령됨을 내는 것이니
망령이 있을 곳이 없는지라
집착이 바로 망령이니
깨끗함도 형상이 없거늘
오히려 깨끗하다는 상을 세워(생각을 일으켜)서
말하기를 "이것이 공부라" 하나
이런 소견을 짓게 되면 스스로 본성을 장애하여
도리어 깨끗하다는 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만약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닦을지라면
다만 모든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허물과 근심을 보지 않으면
곧 이것이 자성이 움직이지 않음인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도리어 타인의 옳고 그름과
길고 짧고, 좋고 나쁜 것을 말하여
도를 어기어 등지나니
"만일 마음이란 것을 집착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집착하면
도리어 도에 장애가 되느니라" 하셨다.
강설:
참선 공부를 하는데 있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언제 어느 때나 화두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참선의 바른 방편이다.
그러므로
"悟昧一如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심지어 "夢中一如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고까지 경책하는 것이다.
행주좌와 가운데
좌선을 참선의 대표적 수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좌선이 靜禪으로써 定에 들기가 가장 쉽고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선이란 끊임없이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이 올시다.
따라서 참선은 앉음에만 국집하고
좌선만을 참선으로 잘못알고 잘못가르쳐
"참선할 때는 참선할 뿐, 밥먹을 땐 밥먹을 뿐,
일할 땐 일할 뿐...."으로 誤導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좌선은 수단이요
목적이 아닌 것이므로,
공부하는 이의 목적은 깨달음(究竟)에 있건만,
사람들은 목적인 깨달음을 증득했는가는 두고
앉음에만 국집하여 몇년을 장좌불와했느니
일생을 그렇게 눕지않고 앉았느니 하는
수단을 자랑 삼고 경력처럼 앞세우는 것을
종종 보게되고 있다.
수단인 앉는 것에 국집하는 이들을
경책하시고자 근본 좌선의 의지를 설파하시어
목적이 되는 실다운 좌선에 대한 정의를 설하셨으니,
좌선이란
法門(法인 모든 것의 실상 진리에 깨달아 드는 門)에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다 알게 되어)
일체 경계가 본성이 본래 空하고
필경 空임을 요달하여, 끄달려 집착할바가 없음을
밝게 깨달아 알아서 善惡과 好不好와 是非를
여읜 것(靜)을 坐라 하고,
안으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음(定)을
禪이라 하신것이다.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본성인 마음(心)이란 것은 절대 부동한 것 이므로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 지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자성의 움직임이란
말의 뜻은 이른바 일으키는 번뇌 망념인 생각을
이르는 것이다.
또한 선정에 있어
禪은 일체경계에 끄달려
집착하는 생각인 망집을 여의는 것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것
즉 번뇌망상으로 산란하지 않는
마음을 定이라 하신것이다.
밖으로 일체 경계(相)에 집착(恒常한 것으로 생각)
하게 되면 따라서 안으로 산란하여 청정한 본성인
마음을 가려(어지러워져 가려 흐려서 덮혀)서
이것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니,
이 상(相)을 여의면 자연 산란함이 사라지고
본심의 청정한 본래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이 스스로(원래) 깨끗한 것이라
일체경계에 초연한 마음 경계가 참으로 定인 것이다.
따라서
밖으로 相을 여의면 좌(靜)요,
안으로 산란하지 않음을 선(定)이라 하는 것이다.
덧붙여
스스로 닦음을 行과 한 가지로 해야 함을
다져 일러 주셨으며, 고요함도 깨끗함도
(망상으로)움직이지 않음이며
깨끗함이란 것도 마음이란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본래 있음이 없어 비어 청정한 자성에
공하다느니 깨끗함이니 마음이니 등에
집착하게 되면
그 생각이 오히려 망령을 세우게 되어
산란심이 되어 청정본성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맑아깨끗한 본성을 가려(어지럽혀)서
그 억지 지은 이름(假說)에 얽매임이 되는 것이니,
모든 相에 집착하는 마음과
모든 경계를 보되 시비에 끄달리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고요하고 깨끗한
본래의 청정한 마음그대로 안定된 것이다.
그러한데
어리석은 이들이 앉음에만 국집해서
몸은 비록 앉아 움직이지 않으나
생각은 삿되고 입만 열면 남의 허물이나
시비 장단에 끄달려 떠들어 道와 멀어져
등지게 되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면 남의 허물을 보는
그것(생각)이 스스로 자기 허물임을 돌이켜보며,
깨끗하다 마음이다 하는 것 까지도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이것(스스로 지어 만든) 또한 망령된 생각으로
도에 장애가 되는 것임을 지시하셨으니
잘 살펴 봐야 할 대목인 것이다.
본래 막힘없이 환(豁然)한 것이
불도(위없는 보리-불지견)이므로
본성의 體는 부동일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이것도 아니니
반야작용이 밝게 알고 움직여 나투는 것도
또한 알아야 변견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망령된 것(이름한 것일 뿐),
깨끗이라는 생각도 모두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스스로 상을 세워 생각 일으켜
또한 망상을 짓는 것이므로
이러한 생각 일으켜 분별하지 말고
오직 모르는 것을 깨쳐 앎에 집중하는 것이
參學인의 본분사로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