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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과 망작((妄作) / 전문수
종래의 우리들 소박한 서정 문학론이 감당해야 할 현대 과학 이론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문인들을 조여 오고 있다. 철학분야도 아니고 미적 가치영역의 문학에 과학이론이라니 좀 엉뚱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미 과학이 철학분야까지 다 점령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제 학문은 분화가 아니고 다시 융합으로 들어선지 오래다. 요즈음 우주의 구성원리나 변화원리에 대한 기존 이론들이 새롭게 재해석 되고 있다. 여기에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카오스 이론, 프랙탈 이론, 특히 근래의 행위자연결망 이론 등등 깜짝 놀랄 첨단 물리학에 기초한 과학기술의 발전 이론은 모든 문화영역에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이 시대는 저간의 문학에 대한 소박한 정의, 즉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란 개념이 초등학교 작문지도 지침 수준 같이 느껴지고 있다. 문학이 아직도 신변잡기를 못 벗어나는, 좀 어패가 있지만 표현기술 좀 부리기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들 한다.
이런 새로운 과학 기술론의 변화에 힘입어 뒤로 한참 밀렸던 우리들 동양의 주역, 즉 역경이 기지개를 펴면서 태극의 음양 오행이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 문학은 이제 개인적 서정으로는 시대 의식을 독자에게 소위 선견할 미적 정념도 인식도 감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6년전 필자의 시집 <천문>을 내 놓으면서 매우 오만하고 당돌해 보일 가 주저했던 것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당시 천문학의 과학 이론에서 이 엄청난 이름을 문학적으로 차용하면서 망설였던 것이 이제는 어제가 되었다. 요즈음은 정말 현실과 환상이 둘 어느 것이 바로 지금을 지배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어쩌면 현재가 바로 환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화를 감당 못하고 있다. 매우 간단한 예로 빅뱅이론은 137억년 전에 한 점, 점 하나가 폭발하여 시작된 우주 팽창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고 하는데 왠지 믿어 지지 않는다. 1초 동안에 우주의 크기가 20억 곱하기10억 킬로미터로 팽창 했다고 했는데 이게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어느 세계에 지금 살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힌다. 익히 아는 바대로 우리들 몸속 에너지원인 세포가 60조에서 100조라고 한다. 우리 몸의 부분마다 하루에도 이들 세포분열이 상상할 수 없는 수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기의 얼굴이 최소한 28이면 완전히 세포가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눈은 그걸 못보고 어제와 내가 무섭게 분리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산다.
변화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이제 이런 무상의 앎은 상식이 됐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인습은 이 변화의 등 뒤를 전혀 못 보고 있다. 바로 우리들 옆에서 과학기술은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내닫고 있는데 어제가 오늘의 나인 줄 알고 그대로 안주하고 있다. 실은 1초도 같은 존재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지” 이 한탄을 차분히 이론적으로 풀어 보면 이 세상은 모든 만물이 얽혀 전혀 독립된 존재로 살수 없다는 자기 존재의 위상에 전혀 무지하다는 자백이다. 만물이 같이 숨 쉬는 공기가 공유된다는 이 초보적인 이해만 해도 내가 왜 괴로운가를 알 수 있다. 인간도 한 동물이다. 홀로는 어느 무엇도 먹고 살 수가 없기에 내 뜻대로 될 리가 없다. 어떤 존재와도 분리 불가능하다. 거미줄보다 우리는 더 얽혀 산다. 우주의 이치 또는 원리를 알려 하지 않고 있기에 나만 고립중인 걸 한탄 한다. 천리, 또는 천도, 이들이 널려있는 천연의 천문을 바로 옆에 두고도 읽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자연의 우주의 천리 속에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세상의 존재들은 이미 자신의 본질 존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철학적로도 확인되었는데도 나만 모르도 있다는 반성을 해 볼 일이다.
이 글의 표제로 내 세운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리고 “망작(妄作)”은 단순하게 보면 문학적 수사의 하나라고 보기 쉽지만 필자는 어쩌면 이 작은 점 하나처럼 보이는 것 저 진화의 빅뱅처럼 폭발력을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수사적 용어가 역경 연구자들의 학문적 태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역경의 음양오행 이론이나 불교의 핵심인 무아와 공성과도 통하고 특히 문학 창작의 천문과 천도에 통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두 말 할 것 없다. 그러면서 역시 현대 물리학의 과학기술이론에도 적중되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한 이해가 일상에서 뿐 아니라 문학 창작에서 너무 멀어져들 산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 참 빨리 변한다고들 하면서도 나는 안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낡아도 한참 낡았다. 내가 무엇이든 다 안다고 하는 착각으로 텅 빈 나를 모시고 산다고 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가 확실히 안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이것을 안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피조물이다. 인간 밖의 더 위대한 어떤 능력, 힘, 절대의 성역에서 이 우주로 내 보낸 일개 동물이라는 뜻도 있다 싶다. 시문을 짓든 무슨 글이나 무엇을 만드는 모든 것은 최초 처음 무엇을 지은 창조자는 인간이 아님을 깨우쳐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학 영역에서 창조란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누구의 최초 발견, 발명, 최초 연구 등등의 태도를 갖는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고 아무리 창조하려 해도 불가능 하다.”는 이 생각은 필자의 확신이다. 그래서 글짓기라는 말은 실은 오만하다. 백번 양보해서 글쓰기는 그래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시가 천문이라는 뜻이 아니고 시는 천문이라야 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용감하게 시집 이름을 내 걸고는 아무도 그간 하지 않는 시집에 ‘앞 글’이라는 이름으로 장황한 천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시집의 뒤편 표지에 다시 시는 짓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단 한마디로 광고 까가지 고집을 부렸던 것이 생각난다. 혹자는 천문학에서나 쓸 용어를 너무 우겨 쓴 것 아니냐 했지만 나는 소크라테스 식으로 인문의 한계에 대한 대위 언어로 천문학도 천문이지만 인간의 모든 문화도 천문학이라는 오만을 부린 것이다. 각설하고,
술이부작과 망작 논제로도 다시 돌아가서, 태극의 천도 문제를 다룬 역경 정신과 천문의 동일시를 통해서 요즈음의 여려 작문들(시, 시조, 수필, 소성 아동문학 등등)에 대한 시각의 한 틀을 잡아 보자는 뜻이다. 기존 관념들 다시 먼지 털며 나서자고 하고 싶다.
아마 1960년대 문학 입문자들은 망작의 용어는 차지하고라도 술이부작이란 이 말은 선배들에게 가끔 귀 동량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역경에 대한 연구자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본래 경이란 어느 누구의 한 이론이나 견해, 학설이 아니라 성경, 불경 등등 경자 붙은 것은 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많은 이해와 견해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이루어진 법과 같은 것이 경이다. 천지 이치의 근본에 대한 문제들을 다룬 것은 동양식으로는 다 경이라 했다.
큰 우주의 근본에 문제를 전제로 하고야 그 근본 도를 다루기에 아마 역경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을 다루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절로 지켜야 할 기본 연구 법도의 경계 말씀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도란 너무 멀리 있어도 안 보이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게 그리 큰 도인줄 모르고 산다. 어떤 쓰린 시련이 닥쳐 올 때야 절감하며 깨닫는 것이다. 모래 한 알에도 도가 있고 바위에도 도가 있다. 그 크기는 관계없다. 천리는 똑 같은 크기다. 큰 집이나 개미집이나 그 천도 똑 같다. 우주적 시간의 집을 짓고 나오는 동물의 털옷집이나 인간의 소위 저간의 사주라는 이름의 시간의 집은 같다.
이제 이 단락에서 이 술이부작의 이론을 필자의 중언부언 없이 바로 아래 인용을 통해 직접 보도록 한다
“요즈음 道에 근접한 易書가 얼마나 되는가! 道는 求하는 것이지, 作하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道를 作하지 않고, 註解라는 형식으로 또 그 위의 어른에 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을 잃어 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니 어떤 것이 道를 述한 것인지, 생각을 註한것 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道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 책을 내어 道를 作하고, 그것이 다시 후학을 통해 전해져 作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미 5,000년전에 황제내경에서는 망령되이 作한다고 했습니다. 망작(妄作)에 대해 기백은 `황제내경 소문 徵四失論`에서, "受師不卒 妄作雜術 謬言爲道 更名自功"(스승의 지도를 받음에 급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망녕되이 잡술을 作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말을 道로 삼아 다시 스스로 功이라 이름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잡술을 作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술이부작(述而不作) 한동석은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대성 공부자도 述而不作이라고 하였거늘 필자가 어찌 이와 같은 과감한 모험을 할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도 易을 서술(述)하였지, 만들지(作) 않았는데, 어찌 필부가 역을 만드는가 경고하고 있습니다.--중략--- 일단 求하는 자세부터 배웁시다. 이를 守傳 일부는 `정역`에서, "无人則守有人傳"(사람 없으면 홀로 지키고, 사람 있으면 전하리라)라고 진리를 전하고 지킨다. “이런 분이 소위 스승이라는 것이다. 옳은 것으 비록 홀라도 지킨는 자가 스승스이라는 것이다. ”
( 2000-10-02 2004-07-01 지지연구소 [출처] 술이부작(述而不作)과 망작(妄作)|작성자 마중물)
각주를 버리고 이 글 입론 본문에 직접 긴 인용으로 그 내용을 옮겨 보이는 것은 이것이 문학의 도가 돼야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예증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꼭 그 온전한 진의를 이해기 위해서 역시 다시 주해 내지 부연이 매우 필요하다. 노파심이기도하다.
우선 <술이>란 뜻의 이해이다. 여기서 ‘술이’는 한자 뜻은 그대로 본래 천도는 내가 만들어 짓거나 주장하는 대상이 아니고 오직 천리에 가장 접근해서 깨달아서 풀이하고 해석해 내는, 그래서 진의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술이 의 ‘이’자는 말을 잊는다는 뜻이다. 말을 잊는다는 것은 탐구해서 더 그렇게 인정하고 넓힌다는 뜻이다. 천도의 뜻을 어떻게 하면 보다 잘 알아차린다는 뜻인데, 이는 천리의 그 뜻이 실은 매우 심오하고 오묘해서다. ‘술’자 역시 제 주장대로 지어서 펼친다는 것이 아니라 잘 해석한다는 뜻이다. 부작이란 감히 인간이 제 맘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 것을 경계하는 지적이다. 이는 어떤 대상을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망을 넓히면 넓힐수록 심오해지고 변화하는 조건들 따라 그에 따른 해석이 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사유체계의 배경에는 태극의 음양 이론이 기반이 되어 있고 오행(목화토금수)이란 생상상극의 변화와 반전 행위가 음양과 조화를 이루어 존재를 이룬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모두 미적 의미의 사유체계인 것은 아무도 부정 못한다. 그 사유체계에 걸맞게 언어 표현이 돼야 하기에 여기에 동원되는 언어 하나하나가 음양오행이란 소위 행위자 연결망의 고리라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운행 원리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시에 동원되는 모든 사유 대상은 다 음양오행이란 운행 원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비유로 대표되는 구체적 형상화는 정서나 정념의 유기적 분리 불가능의 미적 성격을 보다 ‘술이’ 하고자 하는 방편일 뿐이다. 천도나 천리, 천문은 이미 절대적 과학 힘의 영역에서 빅뱅으로 지어져 주어진 것이니 어떻게든 잘 베껴 써야 진실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작>이란 일개 인간이 제 맘대로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소위 오감이나 육감의 감각 질료로 판단한 오성능력이나 이성적 인식은 안 된다는 것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불입문자의 경지에서 미감의 오묘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에서 선비들의 문장의 정도에서 소위 천의무봉을 논한 것과 같다. 이미 문자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문은 부작이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천문이란 사물 속에서 진귀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어떻게든 사물을 옳게 해석해 내야 한다는 뜻이다. 모래 한 알로 도와 문도를 깨닫고자 하는 시인 묵객들에게는 이런 글쓰기의 기본 계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이 인용문에서 깨닫자는 것이 필자의 의도이다. 그간 제 생각대로 자기신변 잡기를 글이라고 마구 쓴 글들을 통렬하게 반성하자는 뜻이다.
역시 위 인용문에서 여기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많은 데, "无人則守有人傳"(사람 없으면 홀로 지키고, 사람 있으면 전하리라)라고 한 진리 지키기의 선비적 태도이다. “이런 분이 소위 참 스승이라는 것이다. 옳은 것은 비록 홀로라도 지키는 자가 스승이라는 것이다.” 수전이란 전을 지키는 것이고 앞의 정역이란 말도 옳은 의미 세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다 작시에서나 모든 글쓰기에서 스승이란 자기 정도를 지키는 자를 일러 부르자는 말이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옳은 것은 홀로라도 지키는 자이다. 문학은 본래 선견자라는 선비정신에 있다고들 한다. 이데아계가 혼탁한 현상계를 수정 교정해야 한다는, 소위 쓸 만한 것들을 온전히 지키려는 장인정신에 문도가 있다는 것이다. 문학 하는 자의 도리이다. 우리들 현실에서는 도리를 벗어나는 일이 너무 많다. 적당히 살아야 탈이 없다는 이념 없는 자들은 문인이 안 되는 상식이 형편이 돼야 한다.
여기서 역경에서 다루는 사주란 천도에 대한 내 해석을 아주 간단하게, 한 가지만 참고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아마 사주란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사주란 한자를 유심히 보다가 왜 이 글자를 사용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주()자는 기둥이란 뜻이고 이는 우리가 의지하는 집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란 바로 집이라는 직설 표현이다. 동양철학은 이런 첫 시각부터가 위대하다. 기둥이 집을 받혀 주는 것이라면 사주란 시간으로서 인생, 시간의 집 기둥이란 것인데 우주란 공간의 시간 운행이 곧 생명이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낮은 단계의 태어난 생시, 그 앞 시간의 생일, 그 위의 더 큰 집 생월, 그 위의 더 큰 집 생년의 시간 기둥(집)으로 무장하고 이승이란 새로운 우주 공간으로 탄생해 나온 인간이다. 우주를 떠받고 당당히 생을 출발하며 고고성을 울린 셈이다. 역경은 이를 경으로 본 것이니 천도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인간은 절대 천리질서의 영역의 어떤 힘 즉 천도의 점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모든 철학도 이에 대한 이론은 예외가 없다. 실존주의에서 기투 되었다 하여 인간은 누구에 의해 던져졌다고 한다. 이 세상 천도 즉 시간의 천도를 따르기 위해서다. 누구도 소크라테스 손바닥이 아닌 천리의 손바닥 안이다. 인간이 이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왜 겸손해야 하는 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래서 음과 양의 태극이론과 오행의 천지운행 이론을 역경은 핵심으로 한다. 심지어 우리들의 자연 수까지 천지수라고 하연 양수와 음수로 그 조화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1,3.5.7.9는 천도의 천수고 2,4,6,8,10은 땅의 원리인 지도의 수라고 하여 양과 음으로 그 기능을 달리하여 이기의 주도 수와 보필의 수로 그 조화의 원리를 찾고 있다. 가령 한 그로 나무는 천수가 기의 운동을 주도하여 나무 내면에서 이끌면 땅은 지도를 발휘해서 나무의 외모인 형상을 만들어 보필하는 천리를 해석해 내고 있다.
요즈음 소설이나 시에 입문하는 수강생들에 작품을 필사키기는 지도를 얼핏 생각하면 괜찮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본은 옳다고 못 본다. 나는 강단에 선 이래 어디서고 초보자들에게 자연의 대상물이 무엇이든 베껴 써보라고 했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것은 이미 누가 일찍이 다 써 놓은 천문이기 때문이다. 누가 자연의 소나무 한 포기를 베껴 쓰도록 했다면 인간이 과연 감당할 가능이 있느냐는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문장 쓰기에도 그 도리가 깔려 있다. 누구나 비가 오면 이를 베껴 쓸 경우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거나 온다.” 고 밖에는 달리 쓸 수가 없다. 만일 이런 베껴 쓰기를 불교에서 선문답으로 주었다면 이는 바로 화두를 준 것이 될 것이다. 왜 베껴 써라 고 했는지를 다 알 때 까지 선승은 기다릴 것이다. 며칠을 두고도 묵묵부답일 것이다. 과연 하늘에서 비거 오는 것이나 내리는 것이 맞는 가를 누가 안다더냐고 물으면 인간은 모른다는 대답할 수밖에는 없다. 그럼 왜 글로 대답을 그리했느냐고 하면 이는 관습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언어는 일종의 추론된 존재의 집일뿐이다. 그래서 기존의 누구 작품을 베껴 쓰는 데는 일리만 있다. 모방하여 속성 재배하려는 계략이 숨어있다 고 할 수는 있으나 이는 오히려 큰 오산일 수 있다.
주지하는 바대로 현대철학은 그 저변이 어쨌든 실존주의가 바탕이다. 현상학이다. 불교의 무상이론과 그 기본은 똑 같다. 언어는 어떤 것이든 다 기존의 관습적 개념의 일종일 뿐이다. 한 순간도 멈추는 고정적인 형상이란 없는 실존에서 지금의 실존을 어찌 인간 언어가 가두느냐는 문제가 제기 되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새 잎을 키우며 오랜 잎은 떨어드린다. 그리고 그 성장의 메커니즘을 누구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 눈의 한계 안에서만 안다고 언어화 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천리란 이런 모르는 것을 모두 안고 있는 무거운 언어이고 그 책임을 스스로도 지고 있다.
그래서 천리는 인간의 정신적 작용 또는 기능의 오묘한 메커니즘의 일종이라 할 수있다. 인간의 정신을 인도하는 앞선 시적인 선험능력이다. 일찍이 미학자 칸딘스키는 점, 선, 면의 기하학적 순수형태의 형식을 자연의 천도라 보고는 입장을 취했다고 본다. 그의 추상미술의 가장 기본으로 한 위대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수학적으로 기하는 구체적 불필요한 요소인 겉 형상을 사상하여 어떤 근원의 정신을 형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칸딘스키는 자기 미술에 어떤 영혼을 위한 정신을 담는데 전력을 했다. 정신이란 내적인 것의 전달', '물질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 실재성',을 위하여 사물의 외양은 간과될 수 있는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내적 필연성'이란 원칙에서 비대상회화로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모든 대상에서 내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도록 유도되고, 이렇게 표현된 색채와 형태는 각각의 내적 표현으로 저절로 추상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이치이다. 색과 형태를 마구 만들어서 내면의 본질을 덮지 말라야 한다는 미학이다. 미학은 이미 이 세상에 다 나와 있는데, 이를 발견하는 것이 한 점 야욕 없이 순심에서 추상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기하학적인 표현을 통해서 회화 양식의 탈바꿈을 시도했다. 초승달 모양, 마름모꼴, 날카로운 각과 반달, 원 등으로 칸딘스키는 기하학적인 순수형태를 만들기로 그의 순수미학을 이루었다. 이렇게 시작한 기하학적인 양식은 그의 순수 미학적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다. 특히 여러 색의 남용으로 본질인 점, 선, 면을 마구 덮어버리는 인간 욕망을 매우 절제하여 추상미술을 개척, 발전시켰다.
그야말로 술이 하였지 부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변화 속에 산다. 그 속에서 문학을 한다. 글쓰기로 천도를 알려 하고 혼돈에 저항하고 정의가 사살되지 않도록 하여 인간성을 어쨌든 옹호하려고 한다. 어느 작시 된 한 편도 비인간성을 숭상하는 반 휴머니즘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망작(妄作)이란 기백의 지적처럼 "受師不卒 妄作雜術 謬言爲道 更名自功"(스승의 지도를 받음에 급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망녕되이 잡술을 作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말을 道로 삼아 다시 스스로 功이라 이름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잡술을 作하지 말라고 충고한 점을 상기할 수 있다. 망작이란 이 말이 막대기로 패대는 꾸중임을 우리는 다시 미독해야 한다. 망작의 뜻을 국어사전애서 매우 볼품없거나 보잘 것 없는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미 저간에 써온 무지막지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受師不卒”이란 지적처럼 스승에게 배우는 것을 졸급증 내지 말아야 한다. 대충 알았다고 하고 깊이 궁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편의 문학작품은, 개인의 일상 속 삶속의 한 삽화에 불과한 것을 그래서 불과 신변잡기에 다름이거나 신세 한탄인 것을 그대로 그야말로 망작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일기 수준의 잡기를 내 생각대로라며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은 천문과 천도에 이르려는 술이 부작과 같은 너무 정도에 멀다.
이정도로 첫 권두 비평 도론으로 하고
이제 천문이 어떤 것이며 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많은 작품을 다 섭렵한 선별이라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 작품이면 거의 다 한 수준 천문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서 마침 며칠 전 모 강의에서 가장 편한 자료 시 한편을 감상해 본 것을 제시하면서 술이 부작의 천문 한 단면을 미독 대상으로 제시한다.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 시가 명작이냐 평가 개념은 차치한다. 우선 이 시의 시적 시각과 시적 에이도스 즉 이데아의 진수를 천문이나 천리의 관념에다 걸어 놓고 고찰해 보고자 한 것이다. 천문이나 천리는 우선 앞에서 논한 바대로 술이하고 부작 해야 한다. 이미 천연(자연)이 천리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술이 하는 정도를 걷는 것이다. 억지로 시인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조작해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천리가 묘하게 잔잔히 떨림을 일으키는 풀잎에 있는 즉물적 이해와 발견으로 이루어지는 작시 태도이다. 그야말로 하찮은 모래알 하나에도 천도가 있다는 태도이다. 시인이 아니 시가 길게 든 짧게 든 베고 눕는 머리와 몸통이 최소한 어느 시간의 어디라야 하는 가를 보자는 것이 핵심이다. 키 낮은, 파르르 떠는 풀들의 고요한 떨림에 이 시의 머리를 우선 먼저 눕힘으로써 이하의 시적 시각은 순리의 사유체계를 밟은 다는 것이다. 결국 우주가 한 귀퉁이를 지금 막 그 위대한 발자국으로 밟는 순간이 풀려 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인생을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는
것으로 이 시의 에이도스로 보는 천리안이다. 언젠가는 누구도 한줌 흙으로 가는 우주 원리가 이런 한 순간과 같고 인생도 같다는 것이고 또 이런 시각이 시적 미학이라는 것을 암시하고도 있다.
이 시는 우선 자연이 어느 한 순간에 쓰고 있는 것을 잘 이해하여 베껴내는 태도이다. 그 다음은 화려한 수사들로 마구 덧칠해서 대 폭발이 가능한 한 점을 깔보고 인간 제 욕심대로 조작해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천리를 보는 눈이 높고 깊으면 천의무봉처럼 온갖 바느질 자리를 보이지 않고도 정곡을 딱 집어 들게 된다. 잘 안 보이거나 못 보니까 동원할 수 있는 수사를 다 끌어와 중언부언 하며 변명을 하는 꼴이 일어나는 이치와 같다. 시를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까 제 나름대로 짐작해서 이게 유행이라 여겨 흉내를 내는 시가 매우 난해한 이유도 이래서다.
시는 제가 안 쓰고 천문이 써 놓은 것을 어느 곡진한 곳에서 줍는 것이 더 큰 시이다. 요즘말로 잘나가는 어느 시인은 <내가 쓴 것은>이란 시제로 내가 안 쓴, 자연이 쓴 시를 보이는 놀라운 시각을 보인 바 있다. 또 다른 어떤 그분의 시 <어떤 평화> 시도 길가다 우연히 이미 쓰여 져 있는 시를 주운 시이다. 시 눈이 밝으면 천문은 어디서든 어느 순간이든 시를 줍는다.
공자가 시경에 시 삼백다섯 편을 추려 놓고 다 이 시들은 “사무사”라고 굳이 부연 한 까닭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시는 인간이 사특함을 버리고자 쓰는 고귀한 문화영역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천리를 노래하다 생을 마치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고 산자의 가장 빛나는 생명형상이다. 결국 이 글,
‘술이 부작’이 입론 하려는 시론(문학)은 곧 천문을 얻는 것이 근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전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