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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9-03)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28-42절
당신의 신앙은 성숙하고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후퇴하거나 그냥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온전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신앙을 점검하고 더 성숙하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 자리 가운데로 나가는 건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점검하여 성숙의 자리로 성장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믿음을 숨기고 있던 요셉과 니고데모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후 그들은 더는 숨기지 않고 행동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새 무덤에 장사하고, 니고데모도 몰약과 유향을 준비하여 돕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28-3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와 불안과 두려움 우울증 불면증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복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28-30)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숨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일곱 마디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에는 두 마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안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목마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탈진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곧 우리 주님의 그 목마름의 고통이 곧 우리의 모든 목마름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스펀지에 적셔 우슬초 갈대 위에 꽂아 예수의 입에 대었습니다(29).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말한 것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준 것은 각각 시편 22:15과 69:21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영)을 주었다는 표현은 이사야 53:12 내용을 반영합니다. 앞부분처럼 예수님의 정체와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소개하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입에 대고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했습니다(30).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저주와 사망의 사슬에서 끊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구속의 완성이 이루어졌습니다. 반복적으로 드려지던 짐승 제사가 이제 끝이 나고 대제사장 되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해서 인류에게는 더 이상 사망과 저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은혜와 축복의 기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체셨으나 자신을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죽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이제는 그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빌 2:6-8).
우리 주님의 이 위대한 선언으로 인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고 우리 주님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새 생명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31-37)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살린 바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더는 목마르지 않게 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없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31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31-3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회의 일 그 자체에 매달리는 형식주의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의 여러 일들, 즉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구제 정도 등을 왜 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는가를 확실히 인식하여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1)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음(31-33)
예수의 육체는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 이제 시체 치리 문제가 남아있다. 로마인과 유대인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시체 처리법이 달랐다. 로마인은 반역자와 같은 중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했기에, 극도로 고통을 느끼며 죽도록 십자가에 그냥 놔두는 것이고, 죽었을 때도 독수리의 밥이 되게 했다. 하지만 율법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은 시체를 밤새 나무에 매다는 것이 수치였다. 특별히 유월절이 안식일과 겹치는 큰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에 시체가 밤새 나무에 매달려있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자들을 빨리 죽여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던 유대 총독이기 때문에, 특히 유대인의 최고 명절 기간인 유월절 기간에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자를 죽이는 방식은 다리를 꺾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숨 쉴 때 다리로 가슴을 밀어올려 숨 쉬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어 바로 죽게 된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들의 요청대로 예수를 제외한 두 사람의 다리를 꺾는다. 그 사람들은 그야말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가 꺾이지 않았다. 이 말은 예수가 분명히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죽었지만, 로마 사람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일관성 있게 기술하는 대로 예수는 죽음의 길을 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옴(34)
다리가 꺾이는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인에게 창으로 옆구리를 찔립니다. 전자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죽은 자에 대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는 관통되어 몸 안에 있던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었던 것입니다.
2세기 이후 가현주의자들의 문서를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애매모호하게 기술된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몸은 진짜가 아니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매우 분명하게 그의 시체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나왔다고 합니다. 그의 육체는 분명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3) 애제자의 증언과 성경의 성취(35-37)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것을 기술한 것은, 바로 이것을 목도한 사람의 증언에 의한 것이라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문맥에서 보면,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까지 따라가서 그것을 목도한 제자는 사랑하는 제자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증언자입니다. 이 증언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또 나중에 부활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고 옆구리가 찔린 것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구약 본래의 정황과는 약간 다르게 인용되기는 했지만, 요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요, 의미 없는 죽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의미 있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사람들(38-42)
신앙생활을 하면서 표나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과 교회를 위해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확실히 경험한 사람들은 선명한 헌신으로 새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누가 참 제자인지를 구분하는 리트머스 용지와 같습니다. 예수님 죽음 앞에 두 명의 숨어 있던 제자들이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38-42)
그동안 숨어서 신앙 생활하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신앙을 숨기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다 숨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당당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낸 것입니다.
(1) 아리마대 요셉(38)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대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갑니다. 요한복음에는 그가 비밀 제자로 활동했던 자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42에서는 이런 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일들 후에’(38), 즉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변합니다. 자신이 제자임을 드러내고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특히 과감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에 있는 대로 그는 공회 의원이었기에(눅 23:50), 빌라도에게 접근하여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일종의 반역자로 유대인들에게 고소되어 처형된 것이기 때문에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미묘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도 한패로 몰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전면에 등장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새 무덤에 장사지냅니다.
(2) 니고데모(39)
니고데모에게도 반전이 있습니다. 그도 유대 공회원으로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3장).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비상한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전통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3:10)로 책망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변화의 실마리는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에쑤님을 비판하는 상황에서 니고데모가 나타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1)고 반문하여 예수님의 편을 든 것입니다. 그 결말이 본 절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매우 많은 양의 향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가지고 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지칭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이 예수님의 시체 처리에 대한 아름다운 선행으로 기록된 것은 니고데모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체 처리(40-41)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는데, 그 양이 보통 사람의 장례에는 쓰는 양을 넘어선,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장례가 왕의 장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아사 왕이 죽었을 때도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그것을 위하여 많은 분향하였더라”(대하 16:14)라고 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이 죽었을 때도 오백 명의 노예가 향을 들고 군대를 따라 왕의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합니다(『유대고대사』,17,19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장례는 이러한 왕의 장례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새 무덤에 장사한 것도 일반인의 장례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은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니라 숨어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장사지냈습니다. 비록 연약해 보일지라도 모든 믿음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연약해 보인다고 깔보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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