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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군(桃平君) (1402~1439)
조선 제2대 정종(定宗)의 열두 번째 서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장인.
공소(恭昭)@도평군 말생(末生)@이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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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皇明惠宗建文元年己卯。 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諱曔。字光遠。初諱芳果。敬事供上曰恭。寬樂令終曰靖。○肅宗辛酉。追上廟號。加上謚懿文莊武。 丁酉 元順帝至正十七年。高麗恭愍王六年。 七月朔日。誕降于咸興歸州洞。仕高麗。
官至將相。太祖壬申。封永安君。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 八月。冊封王世子。九月受禪。庚辰 皇明惠宗建文二年。十一月。傳位于太宗。己亥 皇明成祖永樂十七年。我世宗元年。 九月二十六日戊辰。昇遐。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有 十五男八女。厚陵。在豊德興敎洞。誌文卞季良撰。有行狀及表石。
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金氏。籍慶州。○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天瑞女。○定宗卽位。初封德妃。太宗卽位。尊號順德。○肅宗辛丑。追謚溫明莊懿。 乙未 元順帝至正十五年。高麗恭愍王四年。誕降。戊寅 皇明太祖洪武三十一年。我太祖七年。 冊封德嬪。尋進封王妃。壬辰 皇明成祖永樂十年。我太宗十二年。 六月二十五日。昇遐。春秋五十八。無嗣。厚陵。與大王陵。同原
一男義平君元生。池氏出。○娶鐵原崔氏。監務致崇女。生五男三女。
二男順平君群生。奇氏出。謚忠簡。○娶淳昌薛氏。判司宰監事存女。生二男二女。
三男元尹義生。娶南陽洪氏。司直宿女。無后。
四男宣城君茂生。池氏出。○娶迎日鄭氏。參議宗誠女。生一女。後娶安康金氏。上護軍仲約女。生一男。
案文氏出。 五男從義君貴生。贈君。○娶楊口柳氏。正贈贊成守濱女。後娶海豊張氏。主簿均女。有繼子。
六男鎭南君終生。李氏出。謚夷簡。○娶宜寧南氏。上護軍深女。生四男一女。
案淑儀尹氏出。 七男守道正德生。娶礪山宋氏。府使繼性女。生三男一女。
案尹氏出。 八男林堰正祿生。娶高靈朴氏。少尹溥女。生一男二女。
九男石保正福生。娶原州金氏。判中樞戴敬公連枝生。生三男五女。
案池氏出。 十男德泉君厚生。謚積德。○娶長水李氏。長川府院君良厚公從茂女。生四男五女。
案池氏出。 十一男任城君好生。贈君。○娶平昌李氏。郡守繼童女。有繼子。
案池氏出。 十二男桃平君末生。娶龍川李氏。府使守綱女。後娶全州崔氏。司直洙女。生一男一女。
案尹氏出。 十三男長川都正普生。娶和順崔氏。郡事自海女。生四男一女。
案淑儀奇氏出。 十四男貞石都正隆生。娶忠州權氏。直長敦女。生三女。
案淑儀奇氏出。 十五男茂林君善生。奇氏出。謚昭夷。○娶南陽洪氏。司正興善女。生二男四女。
按璿系作池氏出。 一女咸陽郡主。奇氏出。○駙馬知敦寧朴賡。生一男。○密陽人。父少尹得中。
按淑儀奇氏出。 二女淑愼翁主。駙馬判敦寧良平公金世敏。生四男四女。○慶州人。父都觀察使謙。
三女德川郡主。駙馬行江陵府使邊尙服。生三男二女。○原州人。父都捴制頤。
四女高城郡主。駙馬知中樞金澣。生三男三女。○安山人。父蓮城君威靖公定卿。
五女祥原郡主。駙馬司直趙孝山。生一男一女。○平壤人。父義方。
六女▣▣郡主。駙馬司直李希宗。生三男一女。
七女仁川郡主。駙馬行府使李寬植。生五男三女。○全義人。父少尹成幹。
八女咸安郡主。駙馬知敦寧李恒信。生一男。
故實 己卯。還都松京。
庚辰。朴苞之亂。苞誘懷安大君芳幹。擧兵作亂。苞伏誅。芳幹安寘。
錄勳 錄定社功臣。戊寅。以平鄭道傳南誾之亂。錄義安大君和等二十九人。○十一人。後罪削。
配享 益安大君芳毅。安襄公。太祖朝大君。
相臣 成石璘。前朝文科。己卯。拜右政丞至領議政。李舒。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再致仕。再還卜。閔霽。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左政丞。河崙。前朝文科。庚辰。拜右政丞。至領議政。致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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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 1월 25일 甲申 1번째기사 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후원에서 관사하고 입번한 내금위에게 소형명을 써 습진케 하다
도평정(桃平正) 이말생(李末生)ㆍ거평정(居平正) 이복(李復)ㆍ진례정(進禮正) 이형(李衡)ㆍ병조 판서 홍달손(洪達孫), 지중추원사 양정(楊汀)ㆍ홍윤성(洪允成)ㆍ박강(朴薑), 승지 등과 행 호군(行護軍) 민발(閔發)ㆍ겸사복(兼司僕) 등이 입시하였다.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0월 4일 丙午 2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중궁과 더불어 황해도·평안도를 순행하다
도평정(桃平正) 이말생(李末生)ㆍ무림정(茂林正) 이선생(李善生)ㆍ율원령(栗元令) 이종(李徖)ㆍ제천령(堤川令) 이온(李蒕)ㆍ부윤령(富潤令) 이효숙(李孝叔)ㆍ계천령(溪川令) 이계(李誡)ㆍ은산 부령(銀山副令) 이철(李徹)ㆍ고정감(古丁監) 이겸(李謙)ㆍ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ㆍ좌찬성(左贊成) 황수신(黃守身)ㆍ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ㆍ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원형(朴元亨)ㆍ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ㆍ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ㆍ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ㆍ동지중주원사(同知中樞院事) 이윤손(李允孫)ㆍ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礩)ㆍ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극감(李克堪), 행 상호군(行上護軍) 김처의(金處義)ㆍ김한(金瀚)ㆍ한종손(韓終孫)ㆍ민발(閔發)ㆍ이비(李埤)ㆍ이징규(李澄珪)ㆍ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 인순부 윤(仁順府尹) 윤사흔(尹士昕), 상호군(上護軍) 정종(鄭種)ㆍ이사평(李士平)ㆍ봉석주(奉石柱)ㆍ유사(柳泗), 병조 참의(兵曹參議) 구신충(具信忠) 등이 호종(扈從)하였다.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24일 己丑 3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죄를 부실하게 조사하여 안험하지 않은 형조의 해당 관원을 국문하게 하다
사헌부(司憲府)에 전지하기를,
“김천(金遷)이 납세(納稅)할 때에 정업원(淨業院) 종[奴] 김말생(金末生) 등이 대납(代納)한 물건은 본래 강제로 납입(納入)하게 한 것이 아닌데도 도평정(桃平正) 말생(末生)이 망령되게 이를 핵저(劾詆)하였다. 그런데 형조(刑曹)에서 이것을 다시 마감해 그 죄를 조사해서 안험(按驗)하지 않았으니, 형조의 해당 관원을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1월 7일 癸亥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한계희·임원준·유자광·홍응·홍상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이말생(李末生)을 도평군(桃平君)으로, 이청(李倩)을 천읍군(川邑君)으로, 이선생(李善生)을 무림군(茂林君)으로, 이창(李昌)을 수성군(壽城君)으로 삼았다.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1일 丙辰 1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영창전에 나아가 삭제를 행하다
내금위 장(內禁衛將)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과 겸 사복장(兼司僕將)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을 문죄(問罪)케 하였다가, 곧 명하여 논죄(論罪)하지 말게 하였다.
성종실록 7권, 성종 1년 9월 19일 甲午 3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선정전에 나아가서 일본 국왕의 사신연을 베풀다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ㆍ하동 부원군(河凍府院君) 정인지(鄭麟趾)ㆍ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ㆍ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ㆍ인산 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ㆍ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조석문(曹錫文)ㆍ남양 부원군(南陽府院君) 홍달손(洪達孫)ㆍ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ㆍ우의정(右議政) 한백륜(韓伯倫)ㆍ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변(李邊)ㆍ어효첨(魚孝瞻),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수온(金守溫)ㆍ좌찬성(左贊成) 노사신(盧思愼)ㆍ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ㆍ우찬성(右贊成) 윤필상(尹弼商)ㆍ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입시(入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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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沙先生文集卷之十九 / 記 / 孝子李公旌閭記
孝爲彝性。而少有求知之心則僞耳。其眞心而無僞。吾於源圖齋李公云爾。公諱圭翊字子淳。李氏派于璿璜。桃平君末生爲繼別之祖。三世襲封。醉翁芮貽謨遺安。南下家龍城。忘世堂希芬淵源師友。經行著世。後贈冬官貳卿。竹菴馠丙子有義蹟。贈承旨。忠義衛震慶有隱德。稱南州高士。寔其五世。公生純祖己卯。良知愛敬。定省溫凊。不敎而能。樵山漁水。甘旨常足。以小學,孝經。爲平生受用。嘗侍癠。禱天乞代。血指延縷。喪致其哀。廬墓終制。當膝成坎。有虎衛雉馴之異。慈癠。刲股延數日縷。臨命謂公曰。汝年向衰。廬墓非時。公每夜上塚。及晨而還。風雨寒暑不能尼。洋夷之亂。收率同志。至日下。聞寇退而還。李召募歎其移孝之忠。鄕道儒擧其行於道繡宗伯。公聞之。索其狀而火之。此爲不求人知之實心。身後以公議薦聞。贈童蒙敎官。命表其宅。子孫窶甚。不能以時擧行。今年壬子。依已降指揮。伐石爲閭。曾孫濟夏求爲文。余老且病。不敢擔夯。而公於吾先人爲同庚。故有感愴。不辭而序次之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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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9년 임신 > 3월 28일 > 최종정보
고종 9년 임신(1872) 3월 28일(임자) 맑음
09-03-28[21] 성이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성이호(成彝鎬)를 형조 참판으로, 김익정(金益鼎)을 돈녕부 도정으로, 이돈하(李敦夏)를 병조 참지로, 김학성(金學性)을 판의금부사로, 유치숭(兪致崇)을 지의금부사로, 남정룡(南廷龍)ㆍ성재옥(成載玉)을 동지의금부사로, 조경호(趙慶鎬)를 동지경연사로, 이용학(李容學)ㆍ유성환(兪鋮煥)을 동지춘추관사로, 왕성협(王性協)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유규동(柳奎東)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임백은(任百殷)을 기장 현감(機張縣監)으로, 유용함(柳龍䤴)을 금교 찰방(金郊察訪)으로 삼았다.
증(贈) 수도군(守道君) 이덕생(李德生) 희정공(僖靖公), 증 임언군(林堰君) 이녹생(李祿生) 혜안공(惠安公), 증 석보군(石保君) 이복생(李福生) 정혜공(靖惠公), 증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 정희공(靖僖公),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혜녕군(惠寧君) 이지(李祉), 후녕군(厚寧君) 이간(李衦),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 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 의평군(義平君) 이원생(李元生),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 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에 대해 영종정경(領宗正卿)과 그에 따른 예겸을 계급은 없이 봉작(封爵)하라고 전교하였다.
증 수도군(守道君)에 이덕생(李德生)을 단부하고, 증 임언군(林堰君)에 이녹생(李祿生)을 단부하고, 증 석보군(石保君)에 이복생(李福生)을 단부하였으며, 증 정석군(貞石君)에 이융생(李隆生)을 단부하고, 증 장천군(長川君)에 이보생(李普生)을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영종정경(領宗正卿)과 그에 따른 예겸을 계급은 없이 봉군(封君)하고 봉작(封爵)하라고 전교하였다.
봉상시 직장에 김홍교(金洪敎)를 단부하고, 교서관 정자에 백낙흥(白樂興)을 단부하고, 교서관 부정자 두 자리에 이동상(李東相)ㆍ최정헌(崔鼎獻)을 단부하고, 정릉 참봉(定陵參奉) 가설(加設)에 하태진(河泰鎭)을 단부하고 덕릉 참봉(德陵參奉) 가설에 도필면(都必冕)을 단부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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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一蠹 鄭先生 墓表銘 幷序〕
선생은 휘가 여창(汝昌), 자가 백욱(伯勖)이며 하동(河東)이 본관이다. 증조부 지의(之義)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조부 복주(復周)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으며, 부친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32)에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친께서 의주 통판으로 계실 적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명설(名說)을 지어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선생은 통곡하다 죽을 뻔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선생은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삼년상이 끝나자 임금이 좌윤을 위국공신에 책록하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선생은 부친의 패전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짓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차마 견디지 못하여 사직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을 봉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친이 하시는 일이라면 불의한 일이 아닌 한 감히 어기지 않았고, 모친 역시 의롭지 않은 일로 자식의 뜻을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자 모두가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뜻을 굽히고 따르는 잘못이 없어서 사람들이 ‘의리를 행하는 집안’이라고 칭송하였다.
모친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자 곧 태학에 들어갔는데,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이 모두 선생을 존경하였다. 남쪽으로 돌아와 모친께 문안을 드리려는데, 친가(親家)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선생더러 집밖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선생은 곧바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통곡하다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 속설에 좋지 않다고 하여 꺼리는 일이 많았으나 선생은 곧이곧대로 행하고 개의치 않았으며, 습렴(襲殮)과 빈전(殯奠)을 모두 예에 맞추어서 행했다. 역병이 저절로 가라앉고 선생도 끝내 아무 탈이 없자, 사람들은 역병도 선생은 침범할 수 없다고 여겼다. 장례를 치를 때가 되자 방백이 군수에게 일러 장례 물품을 마련해주도록 하였는데, 선생은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면 돌아가신 모친이 원망을 듣게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군수 조위(曺偉)가 그 뜻에 감동하여 직접 가서 조문하고 제문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도우려하는 것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부친의 묘를 모친의 묘와 같은 자리에 합장하였는데, 삼년 동안 발걸음이 묘지가 있는 산을 벗어나지 않았고 눈으로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상(大祥)을 마치고 두류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마치 뭔가 찾는 것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허전해 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을 몰랐다. 군수가 직접 가서, 선왕이 법도에 맞게 정해 놓은 제도이니 감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들어 권하자 그제야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성종이 특별히 소격서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사람의 자식으로 직분에 맞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소장을 올려 고사하였다. 성종이 그 소장의 말미에 쓰기를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지금도 이와 같이 사양하니 이것이 그대의 훌륭함이다.”라고 하였다.
형제자매들이 전답과 노복들을 나눌 때에 선생은 그 중에서 척박한 땅과 늙고 쇠약한 노복들을 자기 몫으로 하였다. 그런데도 형제 중에 오히려 마뜩해하지 않은 사람이 있자, 다시 자기의 몫을 그에게 주었다. 성종 경술년(1490, 성종21)에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시강원 설서에 보임되었다. 정도로 보좌하고 인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자 즉시 외직을 청하여 갑인년(1494, 성종25)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다. 백성의 질고(疾苦)를 알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니, 일 년 만에 온 고을이 두려워하여 감히 아무도 속이지를 못하였다. 관찰사가 깊이 신뢰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옥사는 반드시 선생께 묻고 의논하였는데, 곧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를 말하지 않았으니, 불리한 판결을 받은 자들도 모두 귀신처럼 밝고 지혜롭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사를 보는 여가에 고을 자제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뽑아서 몸소 가르치니,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료역(庭燎役)에 배정되자,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어올 때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냈으니, 환난 속에 처했으면서도 자득한 면이 있었다 하겠다. 종성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 예로부터 문풍이 없었는데, 선생이 부지런히 가르치니 오래지 않아 진사과에 합격한 자가 있었다. 유배지에서 지낸 것이 7년이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 여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영구(靈柩)를 함양으로 모셔와 승안동 부친 묘 옆(昇安洞) 모좌 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만력 38년 경술(1610, 광해군2) 8월에 국왕이 관리를 보내 가묘에 사제하였는데 그 제문에서 “진정한 선비”, “백 세의 스승”이라 칭하였다. 선비들이 군의 동면에 서원을 세우자 임금이 남계(灆溪)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니 선생의 도덕은 이에 더욱 드러났다.
선생의 학문은 독실하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매일의 공부 과정으로 삼았다. 은은한 덕의 실상은 살아계실 때 채워지고 쌓여서, 드러난 아름다움은 돌아가신 후에 저절로 빛났다.
아아! 우주는 다함이 없는데 복희(伏犧)와 황제(黃帝)로부터 송(宋)ㆍ원(元)대에 이르기까지 몇 사람을 남아라 할 수 있으며 그 남아 중 성현은 몇이나 되는가? 더구나 우리나라는 성인의 시대로부터 멀고 땅도 궁벽하여, 도학은 밝지 못하고 선비들이 취향도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훈고(訓詁)에 빠져들고 사장(詞章)에 뜻을 빼앗기며, 성망과 습속으로 핍박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리하여 자신의 덕을 안으로 감추어도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서, 속된 학문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전혀 없거나 겨우 남아있다.
선생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를 표준으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은 유학이었고 자신이 되고자 했던 것은 성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 섬기고 돌아가시면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일을 예에 맞게 한 것은 평생토록 행했던 모든 예의 근원이었다. 형제에게 지성으로 대하고 친구들에게 신뢰를 받았던 것은 많고 많은 일 가운데 하나였다. 고을을 다스릴 적에는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사랑하여, 그들이 오래될수록 잊지 못했던 것은 시혜를 베풀었다는 단서이다. 아쉽도다! 선생의 도덕은 세상에 두루 전해지지 못하고 한 고을에 치우치고 말았을 따름이니.
선생은 종실 도평군(桃平君)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니 정종(定宗)의 손녀이다.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희직(希稷)이고 차남은 희설(希卨)이다. 희직은 적실에 후사가 없어서 다시 양가(良家)의 딸을 맞이하여 아들 여산(如山)을 낳았지만, 어머니 집안이 현달한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희설이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그 후로도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았다. 여산은 아들 천수(天壽)를 낳았고 천수는 아들 원례(元禮)를 낳았는데, 원례가 명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비로소 참봉에 제수되었다. 계수(桂壽)는 아들 흥례(興禮)를 낳았는데 역시 참봉에 제수되었다.
맏딸은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가서 아들 언청(彦淸)을 낳았다. 사위는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다. 차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다. 셋째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다. 넷째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선생의 묘역에 아직 묘표가 없어서 계수(桂壽)가 장인(匠人)에게 일을 시켜 일을 시작하였다. 원례는 사당을 세워 영령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고 있으니 뒷일은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주나라 기산에 봉황이 날아오니 / 鳳來周岐
가신 후에 본보기를 남겼도다 / 去後遺儀
기린이 노나라 교외에서 노니 / 麟遊魯郊
나도 머무르며 따르네 / 僕且留蹤
아아, 우리 선생이시여 / 惟我先生
동방의 봉황과 기린이로다 / 鳳麟于東
승안동 옛 고을에 / 昇安舊洞
물결은 넘실대고 산은 높아 / 水洋山崇
이에 비석을 세우니 / 爰樹之石
세 가지가 무궁토록 전하리라 / 三也無窮
[주-D001] 정여창(鄭汝昌) : 1450~1504.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0년(성종21)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ㆍ세자시강원 설서ㆍ안음 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술로 《일두집》이 있다.[주-D002] 장녕(張寧) : 1460년(세조6) 2월에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世祖實錄 6年 2月 6日》[주-D003] 습렴(襲殮) :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염포(殮布)로 묶는 일을 말한다. 염습(殮襲)이라고도 한다.[주-D004] 빈전(殯奠) :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시체를 안치하고 제사를 올리는 일을 말한다.[주-D005] 조위(曺偉) : 1454~ 150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5년(성종6) 문과에 급제했다. 함양 군수를 지낸 적이 있다. 무오사화로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술로 《매계집》이 있다.[주-D006]
도평군(桃平君) : 1402~1439. 정종(定宗)의 12남으로, 자는 계회(季悔), 호는 규은, 이름은 말생(末生)이다. 정여창의 부인은 도평군의 둘째 부인 전주 최씨 소생이다.
[주-D007] 최호문(崔浩文) : 저본에는 '조호문(趙浩文)으로 되어 있으나, 《일두집(一蠹集)》 유집 권3 〈행장〉, 《동계집(桐溪集)》 권4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8] 세 가지 : 입덕(立德), 입언(立言), 입공(立功)의 삼불후(三不朽)를 말한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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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안길로 들어가는 곳에 홍살문(紅─門)을 만나게 된다.
발걸음은 서서히 느슨해지고 지친 마음은 여타한 욕심들이 사그라지는 시간들이 찾아오고 있는 모양인지
주변의 여타한 것들에 대해 관심들이 멀어져 가고 있다.
그나마 홍살문 안쪽을 들어가면 향토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하여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잠시 들러서 허울 같은 인증을 담고 간다.
홍살문 안길로 들어가면 효헌사와 이규익지려라는 향토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지라 선답자들의 글을 무단 복사해서 올린다.
효헌사(孝憲祠,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1호)는
조선 정조대왕의 12번째 왕자인 도평군과 두 부인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왕인 정종이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자
‘제가 하늘에서 천도복숭아를 따다가 아버님께 바치고 싶습니다.’라는 시를 남겼다고 해서
‘복숭아 도(桃)’자를 넣은 ‘도평군(桃平君)’이란 시호를 받았다.
1901년 고종은 이런 도평군의 일화에 감탄하여 다시 ‘효 헌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규익지려(李圭翊之閭,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21로)는
그는 부친의 병 치료를 위해 자신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병든 부친을 3일간 더 살게 하였고,
6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여 그 효성이 하늘에 닿아 꿩이 묘막에 들어오고
호랑이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에 고종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