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형제 동화 Part 4 세상과의 대면 / 2021.9.7. / 곽진아
Chapter 11 옛이야기가 예언하는 충격적인 미래 사회학
슬기로운 인간생활 : 사회탐구영역
인간들은 왜 '과잉'의 시대를 만들어 가나?
'비대해진 자아'가 많아진다는 것은?
내가 없는 현실세계, 가상세계에서 찾는 실제 '나'
가면을 쓴 가짜의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가상이다.
이야기도 학문도 인간이 만들어낸 휴먼스토리다. 그 이야기나 지식들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다. 신동흔교수의 책 목차를 보면 이야기에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진리가 담겨있고 인간의 성장과 독립, 사랑과 성공을 통해 슬기로운 인간생활을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가를 볼 수 있다. 이번 챕터는 인생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할 사회라는 ‘숲’을 탐구한다. 더군다나 미래사회를 예견한 그 옛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가상현실, 증강현실을 우려하는 것과 유사한, 거의 예언 수준이다,
많은 (남자)주인공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 집을 나와 미지의 숲으로 떠난다. 이야기 속 숲은 곧 우리가 마주해야할 사회를 말한다. 숲으로 떠난다는 것은 세상과의 대면을 뜻한다. 숲은 모험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두려운 공간이기도 하다. 숲이 무서운 이유는 마녀와 거인들이 살고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숲’의 생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높고 어두운 숲에서 냉혹한 현실을 겪기도 하고 서로 돕고 소통하는 따뜻함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나의 존재감과 잠재력을 알게되고 그 힘으로 고귀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니 숲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숲은 남자들이 떠나는 모험의 공간처럼 보인다. 인류학에서도 비밀지를 얻기 위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을 위해 남자들은 밖으로 떠난다. 자연지를 알고있는 여자들은 남자들이 의식이 끝나서 돌아올때까지 안에서 기다린다. 애써 떠날 필요가 없다. 그림동화에서도 여자주인공들은 숲으로 떠났던 외부의 남자들을 만날때까지 집이나 성에서 머물러 있다. 물론 백설공주처럼 집에서 쫒겨난 경우에는 여주인공도 숲으로 가기는하지만 대체로는 한 곳에 있는 편이다.
이런 음양의 조건으로 보더라도 숲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대면하는데 여성들은 취약한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남성들이 건설한 남성중심의 숲에서 여자들이 설 자리는 적어 보인다. 그러나 남녀 모두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남자들의 제국도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고, 이제 가상현실은 장자의 호접몽처럼 캐릭터가 나인지, 내가 캐릭터인지 모를 아바타의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 비약적인 미래로 도약중인 지금 미래라는 가상 숲의 생태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알지 못하는 미래는 두려움과 불안, 부정적인 우려가 앞서기 마련이다. 신동흔 교수는 미래의 모습을 발견한 옛이야기 속에서도 대부분 부정적인 화소(모티브)와 도구, 플랫폼으로 해석한다. 앞선 정보와 능력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사회구조는 비슷해 보인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외눈박이 두눈박이 세눈박이>이야기. 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두눈박이는 눈이 두 개라서 ‘천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유로 두눈박이 둘째딸은 구박을 받는다. 반면 외곬의 전문가형 외눈박이 언니와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너형 세눈박이 동생은 엄마의 과시욕을 충족시켜준다. 요즘시대도 마찬가지다. 평범함은 가라. ‘너를 표현해 봐, 너의 끼를 펼쳐봐. 너를 드러내봐.’라며 자기표현욕구를 끌어내는 것을 넘어 타인의 시선을 끌기위해 튀는 행동과 관종끼(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높은 병적인 상태)로 온갖 미디어가 비정상 상태다. 그렇게 비대해진 자아가 오히려 정상상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점점 자존감이 낮아진다.
세눈박이에 대한 신동흔교수의 해석이 놀랍다, ‘두 눈은 감고 잠들었으면서도 나머지 한 눈을 살짝 뜨고 주변을 살피는, ..,뭐 하나라도 더 보려고..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면서 tv나 언터넷을 헤매는 사람들..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살펴보는 사람들이 바로 세눈박이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요.’(p341) 특별한 비정상이 되기위해 자신이 평범한 정상임을 거부하는 접속자들, 왠지 뜨끔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남들에게 인정받을만한 특별함을 과시해야 할까? 권력욕일까?
<군소: 열 두 개의 요술창문>이야기 속 공주는 열두 창문으로 세상을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다. 그 공주는 모든 걸 볼 수 있기 때문에 거만했고 자기가 찾을 수 없게 숨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남편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어 수많은 남자들을 죽게 만들었다. 공주의 열두 창문은 흡사 제레미 벤담이 제안했다는 파놉티콘과 유사하다. 공리주의자인 벤담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비용, 최소한의 감시로 최대의 효과(간수의 감시의 시선을 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는 것)를 누릴 수 있는 파놉티콘은 이상적인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았지만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한 명의 권력자가 다수를 감시하는 '규율 사회'로의 변화를 상징하는 근대적 감시원리로 해석했다. 현대에는 다양한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시선’에서 ‘정보’로 변화됐는데, 이를 ‘정보 파놉티콘’이라 한다. 세눈박이 공주가 열두 창문으로 24시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CCTV, 카드결재나 인터넷 개인정보의 수집, 유튜브 알고리즘 등이 그 예이다. 국가권력기관이나 최고경영자, 글로벌IT기업들은 이제 세계인의 시선과 정보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지오웰 <1984>의 빅브라더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개인의 정보를 국가차원에서 수집하여 물리적, 신체적으로 통제를 한다. 인터넷의 편리는 개인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한 덕분에 얻었지만 그리하여 우리는 통제의 시선 또한 얻게 됐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과잉의 정보를 요구했을까?
2. 빅브라더라는 21세기의 독재
<동물의 언어>에서 목동은 뱀을 도와준 덕으로 맹독을 가졌을 뱀 왕과 3번의 입맞춤을 통해 ‘동물의 언어’를 자기것으로 소화하게 되면서 빅브라더가 된다. 그러나 발설하면 죽는다는 조건이 있다. 음지의 동물인 뱀은 유혹과 은밀한 비밀지, 음모론적인 정보를 연상하게 한다. 사실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세계와 타자를 이해하는 소통을 위한 훌륭한 도구이다. 다만 그 언어 사용자가 누구냐,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다른 세계의 ‘언어’가 정보가 되고, 정보가 능력과 권력이 되는 순간 인간의 지배욕은 쉽게 절제력을 초월한다. 어른과 아이 사이만 보더라도 정보와 돈, 힘을 가진 어른들은 약자인 아이들에게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기란 너무 쉽다.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비밀정보까지 입수한 목동은 동물들을 몽둥이로 지배한다. <하얀 뱀>에서 남몰래 뱀 고기를 먹는 왕 또한 모든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게 된 정보독재자 빅브라더의 원형이다. 이러한 인간의 지배욕망은 사회의 구조를 만들고 사회 구조는 또 인간을 컨트롤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내에서 현실에 매몰된 채 외눈박이, 세눈박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혹은 두눈박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각각 어떤 삶의 의미를 지닐까? 이게 정말 현실일까? 가상현실일까?
3. 신세계가 되는 플랫폼, 지옥이 되는 플랫폼
<마량의 신기한 붓>은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살아서 실제로 움직여 현실에서 움직인다. 증강현실을 넘어선 첨단미래기술이다. <신기한 해골>에서도 소나 개가 해골바가지를 쓰면 예쁜 각시로 변신한다. 신동흔교수는 이 붓과 해골바가지가 지금의 메이크업, 성형수술이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메타버스에서의 캐릭터처럼 가상의 나로 변신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고보면 이러한 이야기 속에 모티브를 토대로 아마 첨단 도구와 플랫폼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예로 <호랑이 눈썹>이 있는데, 눈에 호랑이 눈썹을 대면 그 사람의 숨은 모습, 타고난 숨은 본성이 나타나 서로에게 맞는 부부를 바꿨다는 이야기이다.
신동흔은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자기서사를 투시함으로써 자기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옛이야기가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세월의 검증을 거친 인류의 원형적 유산인 옛이야기가 인간의 내면을 비춰주는 도구이자 플랫폼’으로 실용화 될 수 있도록 ‘MMSS(mirror for story-in-depth of self)진단지’를 개발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이런 문학치료, 서사상담을 통해 비정상의 외눈박이, 세눈박이가 열 두 창문을 좀 닫고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그렇게 보면 인류에게 이야기가 필요했던 이유는 자기서사를 통해 ‘자기’를 찾기 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