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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과 같은 모세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은 모세로
2012-3년도 송구영신예배 / 사도행전 7:22-36
행 7:22-36 /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건장하며 웅변을 잘하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23) 40세의 생일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24) 그들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못살게 굴고 있는 것을 보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그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25) 모세는 자기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동족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6) 이튿날 모세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이스라엘 사람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싸움을 말리며 `여보시오, 한 핏줄끼리 이렇게 싸우면 되겠소? 이게 무슨 짓들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27) 그러자 동료를 괴롭히던 사람이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라고 대들며 말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28)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일 작정이오?' 29)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애굽을 나와 미디안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그의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30)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모세가 시내산 근처 광야에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한 천사가 가시나무 덤불 불길 속에 나타났습니다. 31) 이 광경에 놀란 모세는 무슨 일인가 자세히 알아보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32)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움으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습니다. 33)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을 벗으라. 34) 나는 내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왔다. 가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낸다.' 35)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하고 동족에게 배척받은 바로 그 모세를 애굽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배자요, 해방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36) 모세는 수많은 놀라운 이적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냈으며 홍해를 건넌 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나무를 태우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 숯입니다. 이 숯의 원소는 탄소(C)입니다. 탄소라는 원소로 만들어진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고 결혼할 때 신부들이 끼고 싶어하는 다이아몬드 반지입니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똑같은 원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원소가 하나는 사람들이 만지기 싫어하는 숯덩이가 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보석이 되었을까요?
다이아몬드는 지구 깊은 곳, 맨틀에서 만들어집니다. 지구 표면 아래 약 150 km의 압력은 우리가 사는 곳보다 3만 배 정도 높습니다. 이곳의 온도는 400℃ 정도입니다. 탄소 덩어리가 이렇게 높은 압력과 높은 온도 속에 놓이게 되면 다이아몬드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탄소는 저절로 압축되지는 않습니다. 압력이나 온도가 이보다 낮으면 탄소는 그냥 숯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있을 때 지구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일단 탄소가 압축되어 다이아몬드가 된 뒤에는 압력이나 온도가 낮아져도 다시 숯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 방법 외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구 속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인공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공 다이아몬드는 천연 다이아몬드보다 결함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탄소가 촘촘하게 연결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탄수가 대충 모이면 숯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회사에서 숯에 150만 파운드의 압력과 5천도의 열을 가해서 인공 다이아몬드를 만든다고 합니다. 설령 숯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든다 할지라도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진 인생을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 태초에 탄소 형제가 공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제 너희의 공기 생활은 끝났다. 저 땅 밑으로 들어가 살아야 할 때가 되었다.” 형은 침묵한 반면 아우는 반항했습니다. “싫어요. 땅 밑은 엄청난 고통일 텐데 어떻게 살아요? 저는 도망해서라도 지상에서 살겠어요.” 이내 천둥이 쳤습니다. 벼락이 쳤습니다. 폭풍우가 몰려왔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순명(順命)한 형은 땅속 깊숙한 곳에 묻혔습니다. 거기서 어마어마한 압박과 뜨거운 열을 견뎌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지상을 원한 탄소네 아우가 눈을 떴습니다. 그는 그제야 자기가 시꺼먼 숯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숯은 아무도 견줄 수 없는 무적의 보석이 나타났다고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가 된 숯의 형이었습니다.
‘어떻게 생성되느냐?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해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겠습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누구나 닮고 따라야 할 인생의 정도(正道)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며, 결코 숯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을 잘 가꾸어서 다이아몬드같이 귀한 가치를 소유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다이아몬드가 숨어 있어 이제나 저제나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고통은 바로 숯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압력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해주는 축복입니다. 이제 막 씨앗을 뿌려놓고 열매부터 따겠다고 덤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싹이 자라는 봄철과 뜨거운 여름 햇빛을 거쳐야 비로소 토실한 가을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최선의 노력에 있으며,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까지 다하여 철저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가는 2013년에는 언덕도 있고, 개울도 있고, 진흙탕 길도 있습니다. 쇠가 달구어져야 강철이 되고, 추위를 견뎌내야 나무가 봄에 꽃을 피듯이 시련 속에서도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2013년에는 값지고 귀한 풍성한 열매를 맺히시기 바랍니다.
1. 인내력을 기르십시오.
■ 한 여인이 꿈속에서 시장을 갔습니다. 시장에는 새로 문을 연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신(神)이었습니다. 여인은 이곳에서는 무엇을 파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인은 말했습니다. “당신의 가슴에서 원하는 무엇이든 팝니다.” 너무나 놀란 여인은 생각을 하다가 인간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가게를 잘못 찾아 오셨군요. 이 가게에서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 뿐이지요.”
성공의 결과물이 있기까지 견디어 내야하는 고통의 시간에 대한 인내가 없으면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끝내 숯에 머물고 맙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육체의 소욕과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와 빛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으로 인해 존재 가치를 높이십시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시며 2013년을 최선으로 시작하여 최선으로 마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창세기 26:12-25에 비춰지는 이삭의 삶은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온유와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삭의 인생 가운데 물질의 복도 허락하셨습니다. “그해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다른 해보다도 백배나 더 소출을 거두어들였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신 까닭이다. 그는 농사가 계속 잘 되어 재산이 자꾸 불어나 큰 부자가 되었다.”(창 26:13)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모든 대적자를 언제나 잠잠케 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삭의 삶은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방대해진 소와 양을 위해 우물을 찾는 여정 속에, 블레셋은 이삭이 판 우물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참을만큼 참다가 이삭은 그들과의 다툼을 피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했습니다. 그가 판 우물이 에섹[다툼]이 되었을 때 그는 길을 떠났습니다. 다신 판 우물이 싯나[대적함]가 되었을 때도 참을만큼 참다가 그는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다툼과 대적의 우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이삭을 [르호봇]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르호봇은 숨 쉴 공간, 풍성한 땅을 의미합니다. 르호봇은 온유한 자가 받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시 37:11, 마 5:5)을 생각나게 합니다. 물론 여기서 ‘온유함’은 부드러운 선천적 기질이 아니라, 인내와 시련 그리고 연단을 통하여 다듬어진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삭은 더 중요한 가치체계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덜 중요한 것을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인 룻과 오르바는 한 가정의 며느리로서 둘 다 일찍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에게 평안을 주고자 친정집으로 돌아가라고 적극 권합니다. 이때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나갔지만 룻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며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룻은 시어머니의 지혜로 베들레헴에서 부자이며 총각으로 사랑이 많은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였으며, 결국 다윗의 조부인 오벳을 낳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놀라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룻은 자기 평생에 시어머니를 공궤하기로 작정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아닌 1년도 되지 않아 보아스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에 임하는 룻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처럼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자세라는 것을 깨달아 사랑과 선으로써 스스로를 가치있는 그릇, 복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 주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데 순간순간 자아가 살아서 혈기와 분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상대방의 무질서하고 배려하기 못하는 말과 행동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과를 받고 상대가 잘못을 시인하고 그리 풀어졌지만 그래도 그 순간 올라오는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요동치는 자아속에 나를 보았습니다. 늘 언제나 평온함과 인내와 온유가 삶 속에 배어 나와 그리스도의 살아 역사하심으로 인해 숯이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가치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2.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참으로 험난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히브리 사람이었는데,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300년 이상을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민족이 날로 번성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태어난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 불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태어난 모세는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총 속에서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고, 더구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는 특권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문과 문화를 배우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당시 최강대국의 심장부인 애굽의 왕궁에서 무엇 하나 부럽지 않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세의 가슴 속에는 깊은 갈등과 고민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그런 갈등이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왕궁에 계속 남아서 그에게 주어진 특권과 권리를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험난한 고난의 길이지만 그래도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특권과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하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왕궁에 계속 남아 있기로 결단한다면 그는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엄청난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아닌 히브리 민족의 피를 받은 그가 애굽의 왕궁에서 높은 지위와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엄청난 재물로 인해 안락함이 보장된 삶의 여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애굽 왕 바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인 공주에게도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왕궁에 머물러 있으면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애굽 왕은 태양신 ‘라’의 아들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 이상을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는 말입니다. 모세에게 바로 그런 자리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렸을 때부터 가슴 깊이에 새겨진 자기 민족을 위해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왕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합니다.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냐? 노예생활을 하는 동족과 함께 험난한 고생의 길을 갈 것인가?’ 모세는 결단하고 선택해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차이를 천국과 지옥과 같은 차이라고 합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의 보화나 부귀영화보다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능욕을 받으며 고생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 - 심지어 왕좌까지도 버리고 자기 백성들처럼 노예로 전락해서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11:25-26 /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모세는 이 땅에서 누리는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실 상급을 더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의 상급이 주어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표현을 합니다(히 11:24).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이런 길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길, 부귀영화가 주어지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다리는 길 -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 심지어는 신앙인들조차도 세상에서의 행복과 명예와 부귀영화의 자리를 너무 쉽게 선택해버리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마치 하늘나라의 소망이나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들로 만족함을 얻으려는 신앙 없는 모습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모두 얻으려는 욕심쟁이의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밭에 감춰진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처럼 하늘의 복과 상급을 위해서 세상에서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 손에 움켜쥐고서 두 개를 모두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마 7:13-14 /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약속하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세상의 정과 욕심을 버린 사람은 이 땅에서 백배의 상을 받을 뿐 아니라 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마 19:29).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혈기를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좁은 길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 내게 주어진 세상적 욕심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다짐한다 하더라도 종종 결심과 선택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40세에 ‘내 민족을 위해서 일하겠노라’고 왕궁의 화려함과 풍요, 편안함과 부귀영화를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살고 있는 백성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백성 가운데 가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에게 학대받는 장면이었습니다. 모세는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그것이 자기 민족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독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 애굽의 왕궁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서 부귀영화를 다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쓰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왕궁의 편안함과 명예를 포기하고, 자신의 삶에 주어질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린 엄청난 결단을 하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모세를 왜 하나님은 쓰시지 않습니까? 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세상적인 것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길인데, 왜 그 길에 실패를 경험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겠노라고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다짐하고 결단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모세의 뜻대로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을 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정착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종족을 위한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과 소금이 되는 택한 백성과는 거리가 멀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천박한 히브리 사람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한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세가 히브리인들의 리더가 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40세의 생일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못살게 굴고 있는 것을 보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그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자기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동족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이스라엘 사람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싸움을 말리며 “여보시오, 한 핏줄끼리 이렇게 싸우면 되겠소? 이게 무슨 짓들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를 괴롭히던 사람이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라고 대들며 말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일 작정이오?”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애굽을 도망쳐 나와서 미디안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애굽을 도망쳐 나오지 않고 계속 애굽에 머물며 출애굽을 준비하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나온 과거니 되돌리지 못하겠지만 아이성에서의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처럼 모세는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모세가 그곳을 도망쳐 나온 것이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만일 모세가 고통을 당하는 자기 동족의 모습을 보고 처소로 돌아와 하나님께 더 부르짖어 기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40년이란 긴 세월이 아닌 몇 년 아니 길어보았자 10년이 못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킬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약 1:19-20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말은 적게 하고 듣기를 즐겨하며 화는 잘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0) 분노는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모세의 실수는 우리가 또 다시 겪지 말아야 할 경우입니다. 철저한 경건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많은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혈기는 생각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발생이 됩니다.
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온유해 지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철저한 영적 무장을 통해서 만이 온전한 신앙생활과 주어진 사명을 감당케 될 것입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 생각이나, 내 뜻이나, 내 경험의 지배를 받으면 언제나 혈기가 나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절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혈기가 오르고,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심겨진 온유한 말씀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는 말을 하다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합니까? 모세는 온유함이 이 땅에서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지만(민 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화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그토록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그 무대가 바로 광야 여정 가운데 므리바의 물 사건입니다(민 20:7-13). 모세는 물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백성들을 향해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에게 백성을 모으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그들을 마시게 하리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혈기가 오른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한 순간의 분노와 혈기로 인해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4. 모세의 믿음에는 참된 가치관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26절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주전 약 1500-1500년 전 인물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살았더니 성경은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은 것과 같은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과 애굽의 모든 보화, 모세는 이 두 가지를 각각 저울에 달았습니다. 저울의 한편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아야 할 능욕을 올려놓고, 반대편에는 애굽의 모든 보화와 재물을 올려놓았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히브리 사람과 고난의 길을 택하는 모세가 미친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의 눈에는 신앙으로 인해 받는 고난이 애굽의 모든 보화나 모든 재물보다 압도적으로 가치 있게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빌 3:7-8 /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빌 3:9-11 /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0)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많은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았습니다. 명문 지파였던 베냐민지파 출신이었고, 순수 히브리 혈통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대 율법의 최고권위자였던 가말리엘이라는 스승 밑에서 공부하였고, 종교적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이 내세워 왔던 것, 지금까지 자랑스러워했던 것, 성취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선언을 한 것일까요? 그리고 형벌 도구에 지나지 않은 십자가만을 그토록 자랑하고 그 십자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목숨을 건 순례의 길을 자청한 것일까요? 그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 그분만이 바울의 삶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반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한다고 책망을 받았던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고백한다고 하지만 참된 가치관의 변화, 참된 가치관의 전환(轉換)은 없습니다. 아예 이런 사람은 근본부터가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이 ‘주여! 주여!’하는 것은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눅 18:11-12)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들어내려는 기도를 했을 뿐이지 세리와 같이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는 자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눅 18:13) 교회는 나오지만 세상적인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이 무가치한 것으로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은총과 하늘나라의 상급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명예, 쾌락, 재물, 행복도 아무 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의 변화가 있습니까? 이런 점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매 삼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해야 하며, 내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따라 갈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고백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가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서 가신 선지자나 사도들이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까지도 불사하였던 것은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5. 세상에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시오.
■ 18세기 초에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우렌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우렌 경이 영국의 바울 성전이라고 하는 큰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전을 잘 설계해서 이제 공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어느 날 우렌 경은 그 공사 현장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순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만난 석공에게 우렌 경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석공은 묻는 이의 얼굴도 쳐다보지 아니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섯 자 길이 석자 폭의 돌만 깎고 있지요.” 라고 퉁명스럽게 답변을 했습니다. 우렌 경은 다시 다른 곳으로 걸어가다가 다른 석공을 만나서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석공은 아니꼽다는 눈치로 무뚝뚝하게 “입에 풀칠하게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우렌 경은 다시 한참을 걸어가다가 또 한사람의 석공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때 그 석공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는 데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렌 경의 지휘 밑에서 거룩하고 장엄한 바울사원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저로써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렌 경은 매우 고무되어서 모든 어려운 역경을 잘 극복하면서 바울 대 사원을 공사를 잘 마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관점,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나 개인을 위해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라고 하는 그런 것보다도 한층 더 높은 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청소를 할 때도, 그리고 내가 자연을 가꿀 때도 ‘하나님의 집을 청소한다... 하나님의 정원을 내가 가꾼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의 자세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생각의 차이가 그만큼 삶의 자세를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우리 개인의 명예와 우리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하는 그런 훈련을 계속 길러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어디에서 있던지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 .로렌스 수도사의 영성 / 400여 년 전, 프랑스 한 수도원에는 로렌스라는 수도사가 살았습니다. 그는 십대 때 전쟁으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어 55세 때까지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다가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부엌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요리사로 일하면서 틈만 나면 수도원 식구들의 신발을 수리해주는 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탁월한 영성이 있었는데, 일상 속에서 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부엌에서 음식에 소금을 넣을 때에는 “주여, 세상에 소금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또 수도사들의 옷을 세탁할 때에는 “주여, 내 마음 속에 있는 더러운 죄를 주님의 보혈의 피로 씻어 주시고 주님의 의로운 옷으로 입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어두운 방의 불을 켤 때마다 “캄캄한 세상에 빛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항상 기도하면서 부엌일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는 듯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일터인 부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도원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똑같은 일, 하찮은 일이라도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 순 없을까요?
▣ 하나님께서는 숯과 같은 우리를 다이아몬드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가운데 때로는 압력을, 때로는 열기를 주십니다. 이러한 일을 만날 때, 우리 눈으로 보면 짓눌려 견딜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더 영광스럽고 찬란한 삶을 만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연단은 우리를 다이아몬드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암석이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것이 흙이고 이 가운데 미립자가 비교적 균일하게 뭉쳐진 것이 점토입니다. 점토를 이겨 모양을 만들어 말린 다음 불에 구워내면 토기가 됩니다. 점토에 규사를 약간 섞어 1200도 안팎의 고온에 구워낸 것이 석기입니다. 물론 돌을 쪼아만든 선사시대의 석기와는 전혀 다른 석기입니다. 일반 점토 보다 양질의 점토를 1200도의 고온에 구운 다음 유약을 발라 900도에 한 번 더 구운 것이 도기이고, 타일도 도기류에 속합니다. 또 도기의 원료 보다 점토가 적은 고품질의 점토를 90도 온도로 초벌구이 한 다음 유약을 발라 1,200∼1,400도의 고온으로 한 번 더 구워내면 자기가 됩니다. 모두 흙으로 빚는 토기, 석기, 도기, 자기의 차이점은 흙의 품질과 구워내는 방법,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숯과 같은 모세가 다이아몬드와 같은 모세로 되듯이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꾼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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