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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צלם, 쩰렘)과 모양(דמות, 데무트)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양'은 히브리어 원어로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인데, 그 의미와 여러 해석들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단어 해설
창세기 1장 26절, 모양대로(דְּמוּת, 데무트, likeness) - 히브리어 원어 정리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over the livestock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히브리어 원어 성경의 창세기 1장 26절
וַ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에 대한 정리와 여러 의미들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는 여성 명사이며, 다마(H1819: 같다, 닮다, 유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닮음, 닮은 것, 유사(성), 같은 모양 likeness, similitud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5회 나온다.
1.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의 의미 - 닮은 것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는 명사로 '닮은 것, 같은 모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언급되는 두 구절(창 1:26, 창 5:1)에 나타난다. 창 1:26에서 "우리의 형상(첼렘)을 따라 우리의 모양(데무트)대로 우리가 만들고"라고 표현한다. 창세기 외에 어디서도 이 두 명사는 병행되거나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모양(데무트)은 형상(첼렘)을 한정한다. 인간은 바로 '형상'이 아니라, '닮은 모양이나 형상'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흙으로 된 인간 육체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생기를 부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영적, 지적, 도덕적으로 닮았다는 것이다(참조: 엡 4:24, 고전 1:30). 이러한 인간 창조는 틀림없이 인간이 특별한 피조물의 가치를 부여받았으며, 또한 인간이 특별한 영광(시 8:9)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이차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형체 없으신 하나님의 보이고 육체적인 대리인이다. 데무트는 인간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적당하고 충실한 대리인이 된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Clines). 그러나 창 1:26에서는 두 단어가 다 사용되지만 창조의 실제 행위를 나타내는 창 1:27에서 오직 첼렘만이 사용되며 데무트는 쓰이지 않는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뒤얽혀 데무트가 제외되어도 의미에서 손상되는 바가 없다. 데무트는 첼렘의 의미를 한정한다.
2.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의 의미 - 자기 형상 닮은 아들
창 5:3에서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도 "자기 모양"은 '가기와 같은 것(모양)'을 가리킨다.
3.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의 의미 - 생물의 형상
דְּמוּת(데무트, 모양, likeness)는 에스겔의 신의 현현 부분에서 생물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겔 1:5, 겔 1:10, 겔 1:13, 겔 1:16, 겔 1:22, 겔 1:26, 겔 1:28, 겔 10:1, 겔 10:10, 겔 10:21, 겔 10:22). 에스겔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가 하나님, 즉 엘로힘을 보았다고 말하면(사 6:1의 예언에서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이사야 환상의 대상 혹은 내용은 아도나이) 단지 하나님과 닮은 분 혹은 하나님을 둘러싼 측근들의 모양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관례에서 그는 다니엘(단 10:16)과 요한계시록의 요한(계 1:13)과 히 7:3(멜기세덱의 소개)과 비교된다.
앞의 모든 언급은 에스겔에서 눈에 보이는 유사한 것들을 언급하고 있으나 사 13:4은 데무트가 또한 들을 수 있는 유사한 것과 모형 혹은 모델이 된다는 의미에서 구조적 유사물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왕하 16:10, 타브니트와 병행됨)(V. P. Hamilton).
- 26절-28절 말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 귀중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것을 창조하실 때와 달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 안에서 의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문제를 두고서 하나님 안에서 의논하시는 모습이 본문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의논하셨습니다.
둘째는 우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절정이고 인간의 가치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고기나 공중의 새나 땅에 있는 모든 육축이나 기는 것들을 사람이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제안하시기를 '우리' 즉 하나님께서 라는 표현 그 자체이십니다.
본문 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을 창조하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 안에서 의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와 의논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천사와 의논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와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의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가운데 우리를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구원/말씀, 가운데 거하고, 낙원 -에덴 에 거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영육간에 강건하시를 원하시는 하나님 - 요삼:1-2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우리는 여기에 여섯째 날의 사역 중 더욱 중요한 또 다른 부분인 인간 창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을 위하여 적합한 처소를 예비하시고, 인간이 사용하고 안락을 누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을 창조하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말하자면, 그는 심사숙고하고, 반대하고, 의논하면서,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 관해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어법을 사용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가 만든 다른 모든 존재보다 우월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아직도 천국에서 증언하고 있는 세 가지 휘포스타시스, 즉 성부, 말씀, 그리고 성신은 모두 인간의 창조에 특별히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천사들이 비록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은 우주의 창조를 기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욥 37:4; 욥 37:7)이라고 기록되었지만, 그 책에는 하나님의 오로지 하나님의 일임을 증언하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없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좇아 같은 것을 의미하는 두 단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탁월함을 보게 되는데, 그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참으로, 짐승 같은 피조물들 위에 있는 그분의 탁월함과 그분의 높은 목적지는 그분의 몸의 형태 자체에서 명백히 드러나며, 그 몸의 직립 형상은 하늘을 향하여 그분의 기원과 끝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람의 혼은 영이며, 비물질적이고, 보이지 않고, 활동적이고, 지적이고, 자유롭고, 불멸하며, 처음 창조되었을 때 높은 수준의 신성한 지식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부여받았다. 성 바오로, 에베소서 4장 24절, 골로새서 3장 10절에 따르면,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은 주로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의 형상을 부여받았고, 그의 아래 모든 열등한 피조물들의 통치자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과 그들을—남자와 여자로, (여기서는 남자라는 단어로 이해되는) 그들의 후손과 함께 있게 하라.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며, &c. — 야생과 길들인 모든 피조물이 여기에 포함되며, 우리의 첫 조상은 비록 순진하지만, 땅의 생산물과 지구 자체에 대해 가졌던 것처럼, 그들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대로 그것을 경작하고 관리하기 위해 온전하고 완전한 능력과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편안함과 이점을 위해.
이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분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그래서 하느님은 그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자연스럽지만 특별히 도덕적인 형편으로, 그의 모든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습관적으로 순응하고, 그의 이해력은 분명하게 식별하고, 그의 판단은 전적으로 찬성하며, 그의 의지는 기꺼이 선택하고, 그의 애정은 그의 주요한 선을 진심으로 포용한다. 그의 지식에 오류가 없고, 그의 정욕에 무질서함이 없으며, 그의 식욕에 불규칙함이나 무례함이 없다. 그의 감각은 또한 지혜와 즐거움의 모든 입구가 되며, 그의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자신의 행복에 복종한다! 그러나 인간은 존귀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거하지 않고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영혼에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해야 하며, 모든 성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 것을 얼마나 부지런히 추구해야 하는가! 남자와 여자가 그들을 창조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이 비성경적으로 가르친 것처럼, 한 번에 또는 둘 다 함께가 아니라, 먼저 남자가 땅에서 나오고, 그 다음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둘 다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열매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다음의 말들이 명백하다: 그러나 여자의 창조의 특별한 역사는 더 많은 해명을 통해 나중에 들어온다. 그리고 결혼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여자를 지으시고, 온 인류가 한 쌍의 원래 한 쌍에서 후손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남자들의 모든 가족과 나라가 한 피가 되어 한 혈통에서 나왔으므로, 그들 스스로가 형제임을 알게 하고, 그들의 힘을 다해 서로 사랑하고 돕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이와는 얼마나 슬픈 반대의 일이 우리 눈앞에 예시되고 있는지 날마다 보고 있다.
- 창조에 관한 기독교 교리 - D. 그레이그, M. A.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차 창조와 2차 창조(창1장과 2장의 창조)
창조라는 주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1차 창조와 2차 창조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차적인 창조는 적절한 창조입니다. 그것은 태초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 그 웅대한 행위입니다. 반면에, 2차 창조는 섭리의 영역, 또는 유한한 세계의 역사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유한한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과정 동안 광대한 일련의 존재들이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세대는 지나간 시대에 존재해 왔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무수한 생물, 동물과 식물도 그와 같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제 우리에게 말하기를, 심지어 지구 자체, 태양, 달, 그리고 행성들까지도, 세계 역사 동안에 존재해 왔다고 말한다. 유한한 세계의 역사에서 태양, 달, 지구가 없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이 모든 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이전 상태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계 역사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이제, 이 모든 것의 기원 또는 존재하게 하는 것을 나는 창조라고 부른다. 창조는 지적인 존재의 작품이다. 그것은 지적인 존재에 의해, 이전에는 없던 존재에게 실존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존재를 받았고,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들의 기원은 창조이다.
I. 2차 창조에 관하여, 가장 큰 어려움은 이것이다 - 만약 당신이 내가 그것에 대해 당신에게 말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당신은 내 견해의 진실이 모든 것에 달려 있다는 것, 자연의 법칙만으로는 자연의 과정을 지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제시한 견해는 우리에게 자연의 법칙들 외에도 그것들을 결합하고 지도하기 위해 신성한 지성이 필요하다고 가정할 것을 요구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신의 지성이 결코 자연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이 바라보고 있는 위대한 목적과 목적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연을 인도하고 지시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많은 부류의 추론가들은 자연의 법칙만으로도 그리고 도움 없이 제시된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사실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면 그 부적절함을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논의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자연의 흐름이 곧 역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연의 흐름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만 지배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홈이나 순환을 따라 흘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둘 다 아닙니다. 자연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것이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두 개의 사건이나 두 물체가 모든 면에서 정확히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과정은 자유롭고, 질서 정연하고, 점진적인 순서, 또는 높은 목적과 목적을 향해 흐르고 도달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처럼 자연의 과정은 하나의 역사라고 고백되는데, 그것은 어떤 원리이며, 그것만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 문제에 대해 원하는 만큼 숙고할 수 있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것을 돌리고 비틀 수 있습니다.결국 너희는 그 목적을 위해 충분한 유일한 원칙은 지능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지능 이외의 어떤 다른 원리도 자연의 과정과 같은 자유롭고 다양하며 진보적인 전체의 질서를 설명할 수 없다. 세상사에 있어서 결코 멈추지 않는 섭리에 대한 확신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그토록 생생한 문자로 새겨져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의 과정이 역사라는 인식과 즉각적으로 도출되는 추론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지성에 의해 질서 부여되어야 한다. 그 결과, 자연의 과정은 신의 지성을 떠나서는 우리가 가능한 것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지성이 태초에 그것을 주관하였고 그 후로 계속 그 길을 인도해 왔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이제 이것에서 무엇이 뒤입니까? 따라서 창세기의 첫 장은 일반 영국 독자들이 이해하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태양, 달, 바다, 육지,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여전히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과정을 인도하여 자연이 자연의 생성에 도움을 주거나 방해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그분의 창조적 피앗에 빚지고 있다. 나는 이 견해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놀라운 결과들, 즉 그것이 자연에 부여하는 장엄함과 생생한 관심의 공기, 그것이 자연의 구석구석과 틈새에 비추는 신성한 빛을 지적하기 위해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단지 한 가지 점, 즉 이 견해가 어떻게 우리의 모든 종교적 열망을 만족시키는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주위와 우리 안에 모셔오십니다. 그러나 특히 종교적인 마음에 돌아오는 것은 이 견해가 우리에게 주는 확신, 즉 우리 개개인으로서는 우리의 존재가 죽고 지성없는 법칙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빚지고 있다는 확신이다. 우리 개개인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고 의도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II. 창조 - 그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다음으로 우리는 훨씬 더 어려운 일차적 창조를 고려해야 한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일차적 창조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세계를 존재로 부르신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점에서 2차 창조와 다르다:
첫째, 유한한 세계가 형성된 데 필요한 선재하는 물질이 없었다는 점,
둘째,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이 자연법칙의 과정이 아니라 지성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이 기본 교리에 대항하여 현대에 제기된 어려움들은 매우 컸으며, 그것들을 다루면서 나는 어떻게 여러분 중 일부에게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러한 어려움들 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창조를 연속성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연속성의 법칙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계의 각 상태가 이전의 상태에 선행했다고 가정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므로 이 법칙에 따르면, 물질계에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각 상태에 이전의 상태를 더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며,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짧게 멈춘다면, 우리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창조를 단지 멈추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율법의 위반에 불과한 것으로 배제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길, 창조는 이 거대한 사슬에 절대적으로 첫 번째 고리가 있다는 교리이며, 우리가 창조의 법칙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창조는 창조의 법칙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연속성 우리는 그것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전체적인 견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창조가 연속성의 사슬에서 첫 번째 고리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고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그 전에도 때가 있었고, 그 후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대는 그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창조적 과정이 완료되었을 때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간과 시간, 자연의 법칙, 그리고 연속성의 법칙은 모두 유한한 세계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었다. 유한한 세계 그 자체는 창조적 행위가 완성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창조적 행위를 생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연속성의 법칙을 초월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의 모든 법칙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조차도 초월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 행위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유한한 세계를 '신의 지성'과 관련해서만 바라보아야 하며, 그 지성은 그 산물이다. 일차적 창조에 관한 가장 큰 질문은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가지론자라고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그 단어에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부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창조를 자연 법칙의 과정과 잘못 비교해 왔으며, 이 비교에서 어떤 유사점도 찾지 못하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성급하게 내려 놓았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창조가 자연 법칙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것이 자연 법칙을 초월한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이 순전히 지능의 과정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제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마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매우 구체적인 개념을 제공할 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개념은 간단히 이것입니다. 유한한 세계는 전체로서, 그리고 그 세부사항 하나하나에서, 신의 지성 안에서 하나의 형상 또는 관념으로 형성되었고, 그 형성 행위 안에서 그리고 그 형성 행위에 의해 객관적이거나 실질적인 실체를 획득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처럼 그분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종이를 찾지 않으셨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재료를 찾으실 필요도 없었다. 그분의 절대적인 힘에 의해, 신성한 지성 안에서 형성된 세계의 이미지는 실제적이고 실체적이며 외부적인 세계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듯이 객관적 실재를 획득했다. 따라서 유한한 세계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도 아니고, 무한자로부터의 유한성의 타락도 아니며, 신의 본질로부터의 필연적인 진화도 아니며, 그것은 신적 지성의 객관화된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 행위를 우리에게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데 매우 작은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한 정신적 관념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외재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지적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전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무엇입니까 - 유한한 세계의 이미지가 신성한 지성 안에서 구성되는 행위와 그것이 객관적 실재를 획득하는 행위 중 어느 것입니까? 명백히 그것은 전자입니다. 유한한 세계가 그 첫 시작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전체 발전 과정에서, 신성한 지능 안에서 형상화되는 것은, 이 형상이 구체적인 객관적 실존으로 구체화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롭다. 따라서 가장 어려운 창조의 바로 그 지점이 우리 자신의 마음의 과정에 반영됨으로써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나를 형성하는 정도까지 창조할 수 있다NTAL 이미지. 우리 관념의 외재화 속에서만 우리는 조건에 갇히고 방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의 교리는,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 지능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측면 중 하나에서 무한하고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부적절하지만, 여전히 모든 면에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성한 지능에 대한 실질적인 개념을 제공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인간 지능에 의한 정신적 이미지나 사물의 계획의 기원 또는 생성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한한 세계의 계획이나 패턴이 어떻게 신성한 지성에서 기원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 요점, 즉 신성한 관념의 외재화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지능의 힘과 과정을 그들의 특별한 연구로 삼았던 그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동일한 어려움의 요소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 교리에 대해 더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은 유한한 세계에 대한 유일한 철학적 설명으로서 인간의 지식을 회복할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이 질문의 의미는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지성과 분리되어 유한한 세계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추론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순과 부조리에 빠지게 된다. 이것의 결과는, 우리는 먼저 불가지론에 빠지고, 그 다음에는 완전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신을 믿지 않고, 도덕적 세계를 믿지 않으며, 아니, 심지어 자연과학의 가장 확실한 결과조차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인간의 지식을 구하고자 한다면, 유한한 세계는 지능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성경과 피히테의 교리 사이에 놓여 있다. 유한한 세계는 우리 지성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성한 지성의 산물인가? 우리는 둘 사이에서 주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실의 논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결정되었습니다.
(D. Greig, M.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