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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태후는 가짜였다 백의 여승이 한 자루의 화섭자를 던지자 그 화섭자는 소매 바람에 날려 천천히 촛불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더니 놀랍게도 네 자루의 촛불에 일 일이 불을 밝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허공에서 그 화섭자를 쥐고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백의 여승은 소맷자락을 안쪽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한 줄기의 흡 인력이 화섭자를 빨아당겼다. 곧이어 오른손을 뻗쳐서 그 화섭자를 받 아서는 가볍게 숨을 내불어 불을 꺼뜨리더니 품속에 갈무리했다. 위소보는 그와 같은 광경에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 으며 진심으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태후는 혈도를 짚여 땅바닥에 쓰러 져 있었는데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졌다가는 갑자기 창백해지곤 했다. 그녀는 노해 나직이 부르짖었다. [빨리 나를 죽여라!]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대가 일신에 사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이상한 노릇이야. 깊은 궁궐 속의 귀인이 어떻게 신룡교와 관계를 맺게 되었지?] 위소보는 속으로 히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모르는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이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후는 말했다. [나는 신룡교라는 것이 뭔지 모르오. 나의 이 하찮은 무공은 궁의 한 태감에게 배운 것이오.] 백의 여승은 말했다. [태감이라구? 궁 안의 태감이 어찌하여 신룡교와 관계가 있지? 그의 이 름이 뭐지?] 태후는 말했다. [그는 해대부라고 하지만 이미 죽었소.] 위소보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늙은 갈보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만약 그녀가 이곳에 내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감히 그와 같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의 여승은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해대부라구?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는 걸. 조 금 전 그대는 나에게 일곱 장을 휘둘렀는데 장력이 음침했다. 그것은 무슨 장법이지?] 태후는 말했다. [저의 사부님께서는 무당파의 재간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 이름은 유운 장(游雪掌)이라고 부르더군요.] 백의 여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것은 화골면장이야. 무당파는 명문정파인데 어찌 이와 같이 음흉하고 악랄한 무공을 쓰겠는가?] 태후는 말했다. [사태의 말씀이 옳습니다. 유운장이란 우리 사부님이 말한 것이지요. 저는, 저는 모릅니다.] 그녀는 백의 여승의 무공이 절묘하고 심후할 뿐만 아니라 견문이 넓은 것을 보고 속으로 더욱 두려운 마음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말투도 더욱 공손해졌다. 백의 여승은 물었다. [그대는 이 장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가?] 태후는 말했다. [저는, 이 후배는 깊은 궁궐에서 자랐고 무공을 익힌 것은 그저 몸을 건강하게 하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 번도 사람을 해친 적이 없습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정말 낯가죽도 두껍다. 빌어먹을 년! 밑천이 들지 않으니까 멋대로 씨 부렁거리는구나!) 이때 그녀는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사태께서는 밝혀 살피시옵소서. 이 후배는 항상 곁에서 보호해 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평생 남에게 손을 쓴 적이 없습니다. 이 후배가 배운 무공은 알고 보니 전혀 쓸모가 없군요.] 백의 여승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무공은 대단한 편이지.] 태후는 말했다. [후배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오늘 만약 사태의 절세신공을 보지 못했더라면 어찌 하늘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오, 하더니 물었다. [그 태감 해대부는 언제 죽었지? 누가 그를 죽였지?] 태후는 말했다. [그는,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며 나이가 많아 병들어 죽었습 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대 자신은 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대들 만주 오랑캐 들은 우리 대명나라 강산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대명나라 천 자를 죽도록 했다. 그대는 초대 오랑캐 황제의 처이고 두 번째 오랑캐 황제의 어머니이니 결코 너를 용납할 수가 없다.] 태후는 깜짝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 사태. 당금 황제는 결코 이 후배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친 생모는 효강 황후인데 이미 죽있습니다.] 백의 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랬었군. 그러나 그대는 순치의 아내가 아닌가? 순치는 우리 수 천만 한나라 백성들을 잔혹하게 죽있는데 어째서 그대는 한마디도 충고 하지 않았지?] 태후는 말했다. [사태께서 굽어 살피시옵소서.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그 불여우같은 동 악비만을 총애했습니다. 이 후배는 과거 돌아가신 황제를 한번 만나기 조차 어려웠으니 충고를 드릴래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의 여승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도록 하지.] 태후는 말했다. [사태께서 죽이지 않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후배는 금후 반드시 매일같이 독경을 하고 염불을 하겠습니다. 그 한 권의 불경은 사태께서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이 사십이장경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이지?] 태후는 말했다. [후배는 경건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리려고 합니다. 금후 살아 생전에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독경을 하겠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사십이장경은 매우 흔한 경전이다. 어느 절간이라 하더라도 열 권 정 도는 갖추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반드시 이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 태후는 말했다. [사태께서는 잘 모르십니다. 이 경서는 돌아가신 황제께서 과거 밤낮으 로 읽던 것입니다. 후배는 옛정을 잊을 수 없어 경전을 돌아가신 황제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렇다면 잘못되었군. 독경을 하고 예불을 드릴 때는 반드시 마음가짐 을 밝게 하고 아무런 잡생각이 없어야 한다. 정이니 인연이니 하는 감 정을 추호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한편으로는 독경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죽은 남편을 생각하고 있으니 독경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 이 있겠느냐?] 태후는 말했다. [사태께서 친히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이 후배는 우둔하여 그와 같은 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백의 여승은 두 눈에 갑자기 신광을 번쩍하더니 물었다. [도대체 이 경서에는 어떤 야릇한 점이 있는 거지? 그대는 나에게 솔직 히 털어 놓도록 해라.] 태후는 말했다. [실로 이 후배가 정에 얽매여서 그러는 것이조 돌아가신 황제께서 이 후배에게 잘 대해 주지는 못했지만 저는 시종 그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 다. 매일 그 한 권의 경전을 대한다면 그리움에 고달퍼지는 심정을 조 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의 여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고집을 피우니 하자는 대로 내버려둬야겠다.] 그녀는 왼손의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소맷자락의 끝이 태후의 어느 곳 을 슬쩍 건드리게 되있다. 그러자 짚혔던 혈도가 대뜸 풀어졌다. 태후 는 말했다. [사태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나는 무슨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화골면장이 다 른 사람의 몸에 적중되면 어떻게 되지?] 태후는 말했다. [그 태감은 저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장법은 매우 대단하여 천하에서 능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으리라고 말했습니 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음, 조금 전 그대가 나에게 일곱 장을 후려치게 되었을 때 나 역시 맞 받아치지는 않았다. 다만 그대의 화골면장의 장력을 모조리 되돌려 보 냈을 뿐이다. 이 장력은 그대의 몸에서부터 나왔으니 그대의 몸으로 되 돌아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고약한 죄업은 그대 스스로 지은 것이 니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받도록 하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라.] 태후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녀는 물론 화골면장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장력을 맞게 된 이후에는 전신의 뼈마 디가 녹아버리며 뼈 마디마디가 부러져 끝내는 온 몸뚱이가 솜처럼 흐 물거리고 손가락 하나 쳐들 힘마저 없어지게 된다. 과거 그녀는 이 장 력으로 동악비 자매와 동악비의 아들인 영친왕을 쳐 죽이지 않았던가? 세 사람이 죽을 때의 참상을 자기가 친히 목격한 바였다. 이 백의 여승 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고, 또한 적의 장력을 적에게로 되돌려 놓는 수법 역시 무학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고 보면, 그녀의 말이 결코 거짓 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일곱 장의 화골면장을 자기 몸에 때린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된 것이다. 조금 전 손을 쓸 때 그녀는 혹시나 매섭지 못할까봐 한평생 쌓은 힘을 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장이라도 맞으면 견뎌낼 수 없 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잇따라 일곱 장을 후려쳤으니 어떻게 될 것인 가? 삽시간에 그녀는 공포가 극도에 달하게 되어 땅바닥에 꿇어앉아 부 르짖었다. [사태께서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백의 여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업을 스스로 만들었으민 반드시 스스로 풀도록 해야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태후는 큰절을 했다. [아무쪼록 사태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백의 여승은 말했다. [너는 매사를 속이고 사실을 털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밝은 길은 분 명히 바로 너의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너는 굳이 그 길로 가지 않겠다 고 마다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내 비록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 해 도 나는 우리 한나라 동포에게 베풀겠다. 그대는 만주 오랑캐이고 나와 는 깊은 원한이 있는데, 오늘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으로 이미 커다란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태후는 이 마지막 기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 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의 여승이 떠나기만 한다면 자기 는 수일 안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동악 비가 죽을 때 고통스러워하며 침대 위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던 정 경이 삽시간에 그녀의 망막에 떠올랐다. 그녀는 그만 전신을 부르르 떨 며 부르짖었다. [사, 사태, 저는 오랑캐가 아닙니다. 저는, 저는..] 백의 여승은 물었다. [그러면 뭐지?] 태후는 말했다. [저는, 저는 한인(漢人)입니다.] 백의 여승은 냉소했다. [이 순간에도 터무니없는 말만 지껄이는구나. 오랑캐 황후를 한인이 하 는 경우가 어디 있다더냐 ?] 태후는 말했다. [저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당금 황제의 친생모 동가씨( 佳氏)의 부친 동도뢰( 圖賴)는 한군기 출신으로서 바로 한인입 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녀는 자식 때문에 귀하게 된 어머니이다. 소문에 듣건대 본래는 비 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녀는 한번도 황부가 되어 본 적이 없 다고 했다. 아들이 황제가 된 후에 그녀를 황태후로 추봉한 것이 아닌 가?] 태후는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렇습니다.] 그녀는 백의 여승이 다시 걸음을 옮겨 떠나려는 것을 보자 급히 말했 다. [사태, 저는 정말 한인입니다. 저는 오랑캐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습니 다.] 백의 여승은 물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지?] 태후는 말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비밀입니다. 저는 원래 말하지 말아야 합니 다. 하지만....] 백의 여승은 말했다. [말하지 말아야 한다면 말하지 않도록 하게.] 태후는 초조한 나머지 당장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했으며 나머지는 돌 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라는 태후는 가짜입니다. 저는....저는 태후가 아닙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백의 여승은 어리둥절해졌으며 침대 뒤에 숨어 있던 위소보 역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의 여승은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으며 물었다. [어째서 가짜라는 거냐?] 태후는 말했다. [저의 부모님은 오랑캐에게 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랑캐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저는 강요에 못 이겨 궁으로 들어와 궁녀가 되있으며 황후 를 시중들게 되있습니다. 그 후에 제가 황후로 가장했습니다.] 위소보는 들으면 들을수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늙은 갈보는 거짓말하는 데 거리낌이 정말 없구나. 그와 같은 괴상 한 말을 지껄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군. 늙은 갈보는 아직 백룡문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사부이신 소백롱의 허풍 치는 재간을 모조리 배 운 모양이로구나. 내가 황궁으로 들어와 소태감으로 가장했는데 설마하 니 그녀 역시 정말 궁 안으로 들어와 황후로 가장했다는 말인가?) 태후는 다시 말했다. [진짜 태후는 만주 사람입니다. 성은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이라하며 과이심(科爾心) 패륵의 딸입니다. 후배의 부친은 성이 모(毛)씨이며 절 강 항주에 사는 한인으로, 바로 대명나라 대장군 모문룡(毛文龍)입니 다. 후배는 모동주(毛東珠)라고 합니다.] 백의 여승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대가 모문룡의 딸이라구? 과거 피도(皮島)를 지키던 모문룡 말이 냐?] 태후는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의 아버님과 오랑캐는 매년 싸웠지요. 저의 부친 은 후에 원숭환(袁崇煥) 대원수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기실, 기실 그것 은 오랑캐의 반간계(反間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아, 하고 말했다. [그것 참 희한한 소문이군. 그대가 황후를 가장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 르는 동안 어떻게 발견되지 않았느냐?] 태후는 말했다. [후배는 황후를 다년간 시중들었습니다. 그녀의 말하는 소리나 행동거 지를 제가 그럴싸하게 흉내낼 수 있었지요. 저의 이 얼굴 모습 역시 가 짜입니다.] 그녀는 화장대 옆으로 가더니 한 조각의 비단 손수건을 들어 금으로 만 든 곽 안에 넣었다가 꺼냈다. 그 수건은 젖어 있었는데 얼굴 위에 갖다 대고 힘주어 몇 번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뺨에서 두 조각의 사람 가죽 으로 만든 물건을 뜯어냈다. 그렇게 되자 얼굴 모습이 크게 변했다. 본 래 오동통한 둥근 얼굴이 갑자기 수척하고도 갸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 리고 눈두덩이 아래는 움푹 꺼져 있었다. 백의 여승은 아, 하더니 매우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대의 얼굴이 정말 크게 달라졌군.]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녀는 입을 일었다. [그러나 황후로 조작한다는 것은 역시 수월한 노릇이 아니다. 설마하니 그대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알아보지 못하더란 말이냐? 그리 고 그대의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더란 말이냐?] 태후는 말했다. [저의 남편이라면?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그저 그 불여우 같은 동악비 한 사람만을 총애했습니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황후의 거소에서 하릇 밤도 머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진짜 황후를 한번도 돌아본 적이 없었 지요. 그러니 가짜 황후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 몇 마디 말의 어조는 매우 쓸쓸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제가 거의 비슷하게 화장한 것은 고사하고 설사 전혀 닮지 않았다 하 더라도 그는 흥, 그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황후를 시중들던 태감과 궁녀들도 설마하니 알아보지못하더 란 말이냐? ] 태후는 말했다. [이 후배는 황후를 제압하자마자 자녕궁의 태감과 궁녀들을 모조리 새 사람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저는 밖으로 나갈 때가 지극히 적었습니 다. 간혹 가다 부득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때는 궁 안의 규칙이 엄해 서 태감과 궁녀들은 감히 정면으로 저를 쳐다보지못했습니다. 설사 멀 리서 힐끔거린다 하더라도 어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듯 말했다. [틀렸어. 그대는 노황제가 그대를 돌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대는, 그 대는 공주를 한 명 낳았지 않았는가?] 태후는 말했다. [이 딸은 황제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공주의 부친은 한인입니다. 때로 몰래 궁 안으로 들어와서 저와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궁녀로 가장하 곤 했지요. 그 사람은 얼마 전에 불행히도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도홍영은 위소보의 손을 한 번 꼭 쥐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생각했다. (가짜 궁녀로 변장한 남자는 정말 있었지. 다만 병사한 것이 아닐 뿐이 지.) 위소보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공주가 그토록 거칠고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했구나. 원래 그 가짜 궁녀가 낳은 잡종이었구나. 노황제께서는 매우 자상하시고 온화하 시니 낳은 딸이 결코 그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의 여승은 생각했다. (그대가 갑자기 아기를 잉태했다가 딸을 낳았으니 노황제가 만약 그대 와 한 방을 같이 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의심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규방의 사사로운 일에 대해서 그녀는 처녀로 출가한 몸이라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황후로 가장했다가 일단 잉태를 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자 어찌 되었든 간에 감출 수 있는 방법을 강 구했을 것이니 그와 같은 일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그리 진실하게 들리진 않는군.] 태후는 급히 말했다. [선배님, 이와 같이 부끄러운 일을 저는 솔직히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 니 나머지 일을 무엇하러 속이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진짜 태후는 그대에게 죽음을 당했겠군. 그대의 손에 묻 힌 피가 적지 않겠구나.] 태후는 말했다. [후배는 독경을 하고 예불을 하는 몸입니다. 오랑캐에 대해서 깊은 원 한을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진짜 태후는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에 침대 앞과 침대 뒤쪽의 세 사람은 모두 다 뜻밖이라 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그대는 비밀이 누설될까 두렵지 않은가?] 태후는 벽에 걸어 놓은 휘장 앞으로 가더니 휘장 옆의 양털로 만든 허 리띠 같은 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걸렸던 융단이 천천히 위로 말 려 올라가더니 커다란 장롱이 드러났다. 태후는 품속에서 황금 열쇠를 꺼내더니 자물통을 열고서는 장롱의 문을 열었다. 한 여인이 드러누워 있었다. 몸에는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다. 백의 여승은 놀라 나직이 물 었다. [그녀가, 그녀가 바로 진짜 태후인가?] 태후는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녀는 손에 촛불을 들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백의 여승은 그녀의 용모가 매우 초췌하고 핏기라고는 전혀 없었으나, 그 모습은 확 실히 태후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 여자는 눈을 살짝 떠보더니 곧 감으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대는, 그대는 빨리 나를 죽여요.] 태후는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를 죽이겠어요?] 그러면서 장롱 문을 닫고 휘장을 내려놓았다. 백의 여승은 물었다. [그녀를 이곳에 가둔 지 오래 되었는가?] 태후는 말했다. [예.]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대는 그녀에게 무엇을 물었지? 그녀가 꿋꿋하게 버티며 말하지 않았 기 때문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게 아닐까? 그녀가 일단 말을 하게 된다 면 그대는 즉시 그녀를 죽였겠지. 그렇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후배는 불문에서 으뜸가는 계율이 살생이라는 것 을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 종종 소채만을 가지고 밥을 먹으며, 결코 그 녀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백의 여승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그대는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아는가? 내가 그대의 심사를 모를 줄 알고? 황후를 이곳에 가둬두고 있으니 시시각각 위험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녀를 죽이지 않는 것은 반드시 어떤 도모하는 바가 있는 게 틀림없다. 만약 그녀가 장롱 안에서 소리 를 지르면 어쩔 셈이지?] 태후는 말했다. [그녀는 감히 소리를 지를 수 없답니다. 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만 약 이번 일이 들통나면 나는 먼저 노황제를 죽이겠노라고. 노황제가 죽 은 이후 저는 소황제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 오랑캐 여인은 두 황 제에 대해서 정말 충심이 대단했으며 결코 그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도대체 그대는 그녀에게 무엇을 다그쳐 물으려고 했지? 그녀가 말하지 않았을 때 그대는 어째서 황제의 목숨으로 위협을 하지 않았지?] 태후는 말했다. [그녀는 제가 만약 황제를 해치게 된다면 즉시 음식을 끊고 자결하겠다 고 했습니다. 그녀가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제가 황제를 해치지 않겠 다고 응낙했기 때문이지요.] 백의 여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와 가짜 태후 가운데 한 사람은 단식으로 자결하겠다고 위협을 했 고 한 사람은 황제를 해치겠다고 위협을 했다. 각기 꺼리는 바가 있어 다년간 대치하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그녀가 진짜 태후가 궁 안에 살아 있도록 조처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한 가지 중요한 비밀을 캐어내지 못 했고 또 태후가 시종 그 사실을 실토하지 않은 까닭이다. 따라서 비밀 의 중대함도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물있다. [내가 그대에게 묻는 말에 대해서 그대는 언제나 이러쿵 저러쿵 둘러대 며 대답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떤 비밀을 물으려고 했지?] 태후는 말했다. [예, 예. 이것은 오랑캐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느냐 쇠약해지느냐 하는 커다란 비밀입니다. 오랑캐가 요동에서 크게 일어나서 우리 대명나라의 천하를 차지한 것은 바로 그들 조상 무덤의 풍수지리가 더없이 훌륭했 기 때문입니다. 후배는 요동 장백산 속에 애신각라(愛新覺羅) 용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 용맥을 파서 끊어 놓는다면 우리 들은 비단 한나라의 산천을 되찾게 될 뿐만 아니라 오랑캐들은 모조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그 말을 도홍영의 말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그 용맥은 어디에 있는가?] 태후는 말했다. [그것이 바로 커다란 비밀입니다. 돌아가신 황제께서 임종시 소황제가 나이가 어려 철이 없었고 또 돌아가신 황제께서 가장 총애하는 동악비 는 자기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 커다란 비밀을 황후에게 말해 주어 장성하게 되었을 때 소황제에게 전해 주도록 한 것이죠 그 당시 후배도 황후를 시중들고 있는 궁녀로서 돌아가신 황제와 황후의 말하는 소리를 엇듣게 되었으나 모조리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저도 그저 이 큰일을 알아낸 다음 한 몌의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 장백산으로 가서 용맥을 파 헤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대명나라는 다시 광명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풍수와 용맥의 일은 허황묀 일들로서 믿기가 어렵다. 우리 대명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것은 역대 조정의 정사가 곱지 못하고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관가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한 탓이다. 이와 같 은 도리는 근년에 이르러 내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겨우 깨달은 것이 다.] 태후는 말했다. [예, 사태께서는 사리를 통찰하고 계시니 물론 이 후배가 미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나라 천하를 되찾는 데는 그 풍수설과 용맥에 관한 일을 믿었으면 믿었지 없다고 불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용맥을 파혜쳐서 영험한 효과가 있다면 천하 수천만 백성을 깊은 물 속에서, 뜨거운 불 속에서 건져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갑자기 얼굴 표정이 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도대체 정말 영험한지 모르는 일이지만 설사 무익 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손해를 입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을 천하 에 알린다면 오랑캐의 군신들은 용맥의 일을 깊이 의심치 않을 것이니, 그들은 마음속으로 먼저 기가 죽게 될 것이고 우리들은 나라를 되찾자 는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가 진짜 태후에게 다그쳐 묻는 것이 바로 이 비밀이었느냐?] 태후는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계집년은 그녀의 자손과 가업에 관련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어라 하고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이 후배가 계책을 써서 속이려 하고 강제적인 수단으로 위협을 하는 둥 이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온갗 방법을 동원했습니다만 그녀는 시종 죽었으 면 죽었지 말을 하지 않고 버텨왔습니다.] [그대가 그녀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나머지 몇 권의 경서가 어디에 있 느냐 하는 것이겠지?] 태후는 깜짝 놀라서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선배님은.... 선배님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백의 여승이 말했다. [그와 같이 커다란 비밀은 바로 이 경서 속에 숨겨져 있지 않는가? 그 대는 몇 권을 얻었지?] 태후는 말했다. [사태의 법력은 정말 신통광대하셔서 모르는 것이 없군요. 후배는 감히 속일 수가 없습니다. 본래 저는 이미 세 권을 얻었습니다. 첫 번째는 돌아가신 선제께서 동악비에게 내린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 이곳에 남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권은 간신 오배의 집에서 몰수한 것입 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누군가가 궁 안으로 들어와 저를 찔러 죽이려 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가슴팍에 한 칼을 찌른 이후 그 세 권의 경서를 모조리 훔쳐 갔습니다. 사태께서는 보십시오.] 그녀는 겉옷을 벗고 내의를 풀어 헤치더니 가슴팍의 커다란 상처 자국 을 드러냈다. 위소보는 크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더 묻게 된다면 사태는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때 백의 여승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찔러 죽이려고 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코 그대의 세 권 경서를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세 권의 경서를 만약 도홍영이 가져갔다면 그녀가 결코 말하 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태후는 놀라 말했다. [그 자객이 경서를 훔쳐가지 않았다구요? 그렇다면 그 세 권의 경서는 누가 훔쳐갔지요? 이건 정말 이상하군요.] 백의 여승은 말했다. [사태께서는 오랑캐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는 데다가 또 법력 이 신통하시니, 이 커다란 비밀을 능히 선배님에게 넘겨서 선배님이 대 국을 이끌어 가도록 하고 오랑캐의 용맥을 파헤치게 된다면, 저로서는 바라고 바라던 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후배가 어찌 다시 속이 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덟 권의 경서는 반드시 함께 손에 넣어야 용맥의 소재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한 권은 이미 사태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니, 후배에게 설사 다른 세 권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 습니다.] 백의 여승은 냉랭히 말했다. [도대체 그대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도 추측할 수가 없다. 그대가 바로 모문룡의 딸이라면 신롱교와는 지극히 깊은 관 계가 있겠군!] 태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관계는 없습니다.] 백의 여승은 그녀를 잠시 노려보더니 말했다. [내 그대에게 한 가지 화골면장의 독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전수해 주도 록 하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그 방법으로써 나무를 후려치되 81일 동안을 계속하게 된다면 어쩌면 그대의 몸 속에 스며든 화골면장 을 해소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태후는 크게 기뻐서 다시 꿇어 엎드려서 사의를 표했다. 백의 여승은 즉시 구결을 전수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로 그대가 내력을 돋구어 손으로 사람을 해치게 된다면 전 신의 뼈마디가 즉시 끊어질 것이고 그 누구도 그대를 구할 수 없을 것 이야.] 태후는 나직이 대답했다. [예.] 그녀의 표정은 매우 침울했다. 위소보는 속으로 느굿해졌다. (이후 늙은 갈보를 만나게 되고 설사 나에게 오룡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백의 여승은 옷자락을 떨쳐 그녀의 혼혈을 짚었다. 태후는 대뜸 두 눈 을 까뒤집고는 땅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백의 여승은 나직이 말 했다. [이제 나오너라.] 위소보와 도흥영은 침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태, 이 여자는 말을 함에 있어서 삼 푼 정도는 정말이지만 칠 푼 정 도는 가짜이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백의 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서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비단 오랑캐의 용맥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금은 보화도 있건만 그녀는 일부러 들먹이지 않았 지.] 위소보는 말했다. [제가 다시 찾아 보기로 하죠.] 그는 일부러 이곳저곳을 뒤지는 척했다. 그러다가는 이불과 요를 들추 었다. 그러자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상자 뚜껑의 구리 고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기뻐서 부르짖었다. [경서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는 그 비밀리에 만든 격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은밀히 만 들어진 격자 안에는 적많은 보물과 은표가 들어 있었으나 경서는 없었 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서가 없군요. 보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말했다. [보물을 모두 꺼내게. 이후 의거를 일으키고 명나라의 천하를 되찾으려 면 매사에 돈이 필요하다네.] 도홍영은 보물과 은표를 한 조각의 비단에 싸서 백의 여승에게 건네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갈보는 이번에 크게 손재를 당했군.)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어째서 지난 번에 은밀히 만든 격자 안에는 은표와 주보가 없었을까? 그렇지. 지난 번에는 경서를 넣었으니까 다른 물건을 넣어둘 수 없었겠 지. 애석하군. 애석해.) 백의 여승은 도홍영에게 말했다. [이 여인이 태후로 가장한 것은 십중팔구 달리 도모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은밀히 이 궁에 숨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 라. 다행히 그녀는 무공을 상실하게 되었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도홍영은 대답했다. 옛날 주인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차 헤 어져야 하다니 그녀로서는 매우 아쉬운 노릇이었다. 백의 여승은 위소 보를 데리고서 담장을 넘어 궁을 나섰다. 그들은 객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경서를 꺼내 살펴보았다. 이 경서는 겉장이 노란 비단으로 되 어 있었는데 바로 순치 황제가 위소보에게 내주면서 강희에게 건네주라 고 한 것이다. 백의 여승은 책장을 들추었다. 책장 머리에는 영불가부 (永不加賦)라는 넉 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1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소보에게 말했다. [오랑캐 황제가 영원히 세금을 추가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는 과연 이곳 에 씌어 있군.] 그리고 한장 한장 펼쳐 갔다. 사실 이 장경의 경문은 무척 짧은 편이었 다. 매 일장마다 그저 간단하게 몇 줄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체가 매우 컸다. 이 경문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런데도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어 보았다. 원래의 경문과 한 자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책장을 촛불에 비추어 보았으나 겹장으로 된 그 안쪽에 글자가 씌어 있는 흔적 역시 발견할 수가 없었 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갑자기 맑은 물에 겉장을 담아 적 셨다. 그리고는 가볍게 뜯어내었다. 그러고 보니 안에는 두 겹의 양피 가 있었고 사변은 촘촘하게 실로 봉합이 되어 있었다. 그 실들은 뽑게 되자 두 겹의 양피 사이에는 백 여 조각의 지극히 엷은 양피가 들어 있 었다. 위소보는 기뻐서 부르짖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이것이 커다란 비밀입니다.] 백의 여승은 그 조각조각난 것들을 탁자 위에 늘어 놓았다. 그러고 보 니 매 조각들은 크고 작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네모진 것도 있었고 둥 근 것도 있었으며 혹은 세모 꼴의 모양도 있었고 또는 육각의 모양도 있었다. 그리고 껍질 위에는 많은 구불구불한 붉은 선들이 그어져 있었 고 따로 검은 먹으로 써 놓은 만주 글자가 있었다. 모든 그림과 글은 이미 가위로 잘려져 완전하지가 않았으며 백 여 조각이나 되었지만 각 기 조각난 양피들은 서로 맞붙일 수 있는 것이 없어 좀처럼 맞출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원래 매 한 권의 경서에는 조각난 양피를 숨기고 있었군요. 여덟 권의 경서를 모조리 얻어야만이 한 장의 지도를 짜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군.] 그녀는 조각난 양피를 원래의 두 겹의 양피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 고 비단 보자기에 싸서는 주머니에 갈무리를 했다. 이튿날 백의 여승은 위소보를 데리고 북경을 나서서 서쪽으로 걸어갔 다. 그리하여 창평현(昌平縣) 금병산(錦屛山) 사릉(思陵)에 이르게 되 었다. 이곳은 바로 숭정 황제를 안장한 곳이었다. 능 앞에는 잡초가 우 거져 있어서 그 모습이 무척 황량했다. 백의 여승은 길을 오는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제 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능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위소보 역 시 엎드려서는 큰절을 했다. 갑자기 옆에 기다란 풀이 움직였다. 고개 를 돌려 바라보니 시야에 와 닿는 것은 녹색의 치마였다. 이 녹색의 치 마를 위소보는 낮에 몇 천만 번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고 밤에는 꿈에 서 몇 천 번을 껴안고 뒹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 을 발견하게 되자 가슴이 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혹시나 또 꿈 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일시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이때 부드럽고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끝내 돌아오셨군요. 저는 이곳에서 사홀을 기다렸어요.] 곧이어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바로 녹의 소녀의 음성이 아닌가. 이 한 마디의 부드럽고도 간드러진 음성이 귀에 와 닿자 위소보는 대뜸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흔들흔들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너무나 좋 아서 온몸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예, 예. 그대가 이미 저를 사흘이나 기다렸다구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기로 하죠. 나는 슬퍼하지 않겠 소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먼저 망막에 비쳐든 것은 바로 녹의 소녀의 아름 답기 이를 데 없는 귀여운 용모였다. 그런데 그녀의 부드러운 안색이 그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웃었다. [나 역시 그대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랫배가 아파왔다. 그 순간 몸이 붕 떠올랐 고 뒤로 일 장여 밖으로 날아가서는 심하게 땅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그녀에게 발길질을 당한 것이다. 그 소녀는 유엽도(柳葉刃)를 쳐들더니 그의 머리 위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는 급히 몸을 굴렸다. 퍽, 하는 소 리와 함께 그 칼은 땅바닥을 후려치게 되있다. 그 소녀는 다시 칼질을 하려고 했다. 백의 여승은 호통을 내질렀다. [손을 멈추어라!] 그 소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고 칼을 던지더니 백의 여승의 품속 으로 뛰어들며 울부짖었다. [저 나쁜 사람은 전문적으로 저만 괴롭혀요. 사부님, 빨리 그를 죽이세 요.] 위소보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으며 또한 겸연쩍기도 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사태의 제자였구나. 조금 전 두 마디 말은 결코 나한테 한 것이 아니있구나.) 그는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다시 생각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나는 그저 죽어라 하고 좋은 사람처럼 행동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태를 속여 크게 자비심을 베풀게 해서 저 녹의 소녀를 나에게 짝지워 주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게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다가가 그 소녀에게 깊이 읍을 하고 말했다. [소인은 우인히 소저에게 죄를 짓게 되었으니 소저는 대인의 아량으로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저가 나를 때리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손을 쓰도록 하시오. 다만 소저는 소인의 목숨만은 용서해 주도록 하시 오.] 그 소녀는 두 손으로 백의 여승을 얼싸안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발을 들어서는 발 뒤꿈치로 위소보의 아래턱을 걷 어찼다. 그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더니 낑낑 거 리면서 일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아가(阿珂), 너는 어째서 불문곡직하고 이 사람을 만나자마자 두번이 나 발길질을 하느냐?]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너의 이름은 아가였구나. 끝내 알아내게 되었군.) 그는 백의 여승을 시중든 지 이미 며칠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공손하 고 겸허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앞에 서는 더욱더 손해를 볼수록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말했다. [사태, 소저의 두 발길질은 원래 제가 걷어채여 마땅하답니다. 실제로 저의 잘못이기 때문에 소저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녀가 저를 다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걷어찬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요.] 아가는 흐느끼며 말했다. [사부님, 저 소화상은 나쁘기 짝이 없어요. 그는 나를 업수이 여겼어 요.]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가 어떻게 너를 업수이 여기더냐?] 아가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는 나를 여러 번 업수이 여겼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사태, 어쨌든 간에 제가 명청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공도 소저보다 훨씬 뒤떨어졌습니다. 그날 소저는 소림사로 놀러 왔었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네가 소림사로 갔다구? 여자애가 어찌 소림사로 갈 수 있다더냐?] 위소보는 속으로 다시 기뻐했다. (그녀가 소림사로 간 것은 원래 사태의 분부가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더욱 잘되었다.) 그는 말했다. [그것은 소저 스스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한 분 사저와 함께 간 것이랍니다. 소저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해서 함께 동행을 하게 된 것이죠.] 백의 여승은 말했다. [너는 또 어떻게 알고 있지?] 위소보는 말했다. [그때 저는 오랑캐 황제의 명을 받고 그를 대신하여 소림사에 출가하여 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한 분의 소저가 소림사로 걸어오 고 있고 소저가 바로 뒤에서 걸어오는데 내키지 않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아기(阿琪)가 너를 데리고 갔느냐?] 아가는 말했다. [예.]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냐?] 아가는 말했다. [그들 소림사의 화상들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그들의 규칙은 여자들에게 절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나요.]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그 규칙은 정말 나빴죠. 어째서 여시주들이라고 해서 절로 들 어갈 수 없단 말입니까? 관세음보살도 바로 여자가 아닙니까?]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게냐?] 위소보는 말했다. [소저는 상대방이 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그냥 돌아가자고 했 지요. 그런데 소림사의 네 명의 지객승은 예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하여 두 분 소저에게 죄를 짓게 되었는데 주제 넘게도 무 공도 훨씬 뒤떨어지는 것들이 거드름을 피운 거죠.] 백의 여승은 아가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상대방과 손을 썼구나?] 위소보는 서둘러 말했다. [그것은 모두 소림사 지객승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제가 친히 목격한 것입니다. 그들은 손을 뻗쳐 두 소저를 밀려고 했습니다. 사태께서는 생각해 보십시오. 두 분 소저는 천금지체(千金之體)인데 어찌 네 화상 의 더러운 손이 그녀들의 가슴에 닿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소저 는 자연히 몸을 날려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화상은 터무니없 는 손짓을 하다가 그만 손과 발을 산 정자의 기둥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래서 약간의 통증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소림사의 무공은 무림을 영도할 지경인데 어찌 그토록 형편이 없 더란 말이냐? 아가, 너는 손을 쓸 때 어떤 초식을 썼느냐?] 아가는 감히 속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설명했다. 백의 여 승은 말했다. [너희들은 네 명의 소림 승려를 모두 때려 눕혔느냐?] 아가는 위소보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증오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자까지 합하면 다섯 명이죠.] 백의 여승은 말했다. [너희들 정말 간이 적지 않구나. 소림사로 가서 상대방 다섯 분의 소림 사 승려들의 손과 발을 비틀어 관절을 뽑아 놓았다니!] 그녀는 두 눈에 번개와 같은 빛을 띠우고는 아가의 전신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아가는 놀라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백의 여승은 그녀의 목에 붉은 상처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 칼자국은 절의 고수가 낸 것이냐?] 아가는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 그..]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위소보를 흘겨보았다. 갑자기 두 뺨이 빨갛게 물 들더니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는, 그는 정말 저에게 부끄러움과 모욕감을 안겨 주었어요. 제자는 스스로 칼을 휘둘러 목을 자르려고 했으나 죽지 못했어요.] 백의 여승은 처음 두 명의 제자가 소림사로 올라가서 터무니없는 망나 니 짓을 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노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에 칼자국 상처가 매우 기다랗게 나 있는 것을 보고 연민의 정이 끓어 을랐다. [그가 너에게 어떤 수모를 주있지?] 아가는 왁, 하니 을음을 터뜨렸다.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저의 커다란 잘못이있습니다. 저는 말을 함에 있어서 아래위도 없었고 분수도 없었습니다. 소저는 그저 저를 잡고서 놀려 주려고 저의 두 눈을 뽑겠다고 말했을 뿐 진짜로 눈을 뽑겠다는 것이 아닌데도, 저 는 간이 적어 그만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서 두 손을 뒤로 획 돌려서 는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조심하지 못하고 소저의 몸에 손이 닿게 되었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소저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아가의 예쁜 얼굴은 부끄러움에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러나 눈초리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빛이 떠올랐다. 백의 여승은 몇 마디 당 시 손을 쓰게 된 초식을 물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짐작 할 수 있었는지 말했다. [그것은 무심코 저지른 과실이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네 가 이미 유연귀소(乳燕歸巢) 일초로 그의 두 팔을 비틀어 놨으니 이미 그에게 벌을 준 셈이다.] 백의 여승은 아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는 아직은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태감의 신분 인데 뭘 그리 걱정하느냐?] 아가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어째서 어린애란 말이야? 그는 기녀원에 들어가서 나쁜 짓 까지 했는데.) 그러나 그 말은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사부가 다그쳐 묻게 된다 면 자기가 사저를 따라 기녀원으로 들어가 사람을 때리게 되었다는 사 실이 들통나지 않겠는가? 위소보는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큰절을 하며 말했다. [소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면 다시 나에게 몇 번 발길질을 해서 화를 풀도록 하시오.] 아가는 발을 구르며 울었다. [나는 오히려 차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손을 들어 철썩철썩, 하니 자기 얼굴에 따귀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백의 여승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 일은 그대의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다. 아가, 우리들은 너무 사람 을 못살게 굴어서는 안 된다.] 아가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가 나를 업수이 여기고 못살게 군 거예요. 나를 잡아가서는 절 안에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백의 여승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소저의 호감을 사 려고 그녀를 절 안으로 모시고 들어간 것이죠. 저는 속으로 이 일은 어 찌 되었든간에 소저가 소림사로 들어와 구경을 하는 데서 비롯되었고 절의 화상들이 그녀에게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그녀가 화를 내는 것 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용기를 내어서는 소저 를 모시고 반야당으로 들어가 놀도록 한 것이죠. 그리고 한 노화상이 소저를 모시고 말동무가 되도록 해드렸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했구나. 정말 두 어린애가 터무니없는 짓을 했 어. 그 노화상은 누구냐?] 위소보는 말했다. [반야당의 수좌 징관 대사입니다. 바로 사태께서 청량사에서 그와 일장 을 교환한 바 있죠.] 백의 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대사의 무공은 정말 뛰어나더구나.] 그녀는 다시 아가의 어깨를 두들기고 말했다. [좋다. 그분 대사는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많으셨다. 소보 가 그를 모시고 와 너의 말동무가 되게 해주었다고 하는 것은 너를 억 울하게 대접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차후 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아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악인은 실로 나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많은 일에 있어서 말하기가 거북하다. 그렇지 않을 때 사부가 따지고 들게 된다면 사저와 나도 꾸 지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했다. [사부님은 모르세요. 그는..] 백의 여승은 그녀를 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숭정의 무덤을 향하여 앉은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위소보는 아가에게 혀를 쑥 내밀어 보이며 용용 죽겠지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가는 너무 화가 나서 그 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위소보는 그녀가 설사 화를 낸다 하더라도 아름 답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그는 옆에서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 다.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머리카락, 눈썹은 물론, 손가락 하나 하나 지극히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가는 곁눈질로 그를 힐 끔 쳐다보았다. 그가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백의 여승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부님, 그는 나를 훔쳐 보고 있어요.] 백의 여승은 그저 음, 했을 뿐이있다. 마음속으로는 과거 궁중에서 보 내던 정경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 마디 말을 전혀 듣지 못하 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중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뉘엇뉘엿 넘 어갔다. 백의 여승은 여전히 부친의 무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위소 보는 그녀가 그렇게 열흘이고 보름이고 줄곧 앉아 있기를 바랬다. 그저 눈을 들어 아가를 볼 수만 있다면 밥을 먹지 않아도 상관 없을 것 같았 다. 아가는 위소보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온 몸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기의 몸을 훑어보고 있다 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으며 또 한차례 울화가 치밀기도 해서 생각했다. (저 소악인은 교묘한 언변으로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부님 을 속여서 언제나 자기를 감싸도록 하고 있구나. 좋다. 사부님께서 계 시지 않을 때 내가 그를 반드시 혼내 줘야 되겠다. 사부에게 꾸지람과 벌을 한바탕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나를 이토록 부끄럽고 모욕되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다시 한 시간 남짓 흐르게 되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백의 여승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가자.] 그날 밤 세 사람은 한 농가에서 자게 되었다. 위소보는 백의 여승이 깨 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먼저 그녀들 두 사람의 그릇과 젓가락을 뜨거운 물로 씻었다. 그리고 그녀들 두 사람이 앉은 걸상과 밥 먹는 탁자를 닦아서 티끌 하나 묻지 않도록 하는가 하면 침대 위도 깨끗이 정돈하는 등 그녀들 두 사람이 머무는 한 칸의 방을 깨끗하게 치워 주있다. 그는 언제나 게으른 편이었다. 이토록 부지런히 일을 한 것은 한평생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백의 여승은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 로 생각했다. (저 애는 정말 부지런하구나.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때는 그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훨씬 편리하겠구나.) 그녀는 열다섯 살 전까지는 깊은 궁궐 안에서 세윌을 보냈고, 어릴 적 부터 궁녀와 태감들의 시중 받는 것이 버릇이 된 몸이있다. 그러나 나 라를 잃고 강호를 떠돌아다니게 되면서 일상의 기거와 음식은 자연 전 과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위소보는 태감 노릇이 몸에 밴 사람이고 또 한 진심으로 비위를 맞추고자 했기 때문에 백의 여승으로 하여금 옛날 공주였을 때 누렸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도록 할 수 있었다. 백의 여승은 출가하여 불도를 닦게 된 만큼 옛날의 호화스러움에 대해 서는 물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어릴 적에 어떻게 세월을 보냈 느냐 하는 것은 한평생 깊이 뇌리에 박혀 있기 마련이고 다시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공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으나 위소보는 그야말로 그녀를 공주처럼 시중 들어 주니 그녀로서는 자연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저녁밥을 먹은 후 백의 여승은 아기의 행방을 물었다. 아가는 말했 다. [그날 소림사 밖에서 이후 다시 사저를 만나 보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미 그에게 해침을 당해 죽었을 거예요.] 그녀는 눈을 들어 위소보를 홀겼다.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저는 아기 소저가 몽고의 갈이단 왕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라마들과 오삼계 휘하의 총병도 함께 있었습니다.] 백의 여승은 오삼계의 이름을 듣자 대뜸 안색이 확 변하여 입을 열었 다. [아기가 어째서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닌단 말 이냐?] 위소보는 말했다. [그 사람들은 소림사로 오는 길에 아마 아기 소저와 우연히 만나게 된 모양입니다. 사태, 사태께서 그녀를 찾고자 하신다면 제가 모시고 가도 록 하지요. 그렇게 된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건 어째서인가?] 위소보가 말했다. [그 몽고인들과 라마들, 그리고 운남 군관의 얼굴 모습을 저는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일을 처리하기가 쉽 지 않겠습니까?] 백의 여승은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를 따라 함께 찾도록 하자.]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말했다. [사태, 정말 감사합니다.] 백의 여승은 의아하여 물었다. [네가 나를 도와 일을 처리하니 마땅히 내가 너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거늘 네가 왜 나에게 인사를 하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매일같이 사태를 따르는 것이 더없이 즐겁고 기쁩니다. 영원히 사태를 곁에서 모시게 되었으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설사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하루라도 더 모시게 되면 하루가 더 기쁠 것 같습니다.] 백의 여승은 말했다. [그런가?] 그녀는 아기와 아가 두 사람을 제자로 삼게 되었으나 평소 그 두 제자 에 대해서 줄곧 냉랭히 대해 왔었다. 두 소녀는 그녀를 존경하고 두려 워했으며 한 번도 자기네들의 심사를 털어 놓는 적이 없었다. 또한 위 소보처럼 그토록 교묘한 언변에다가 달콤한 혀를 휘두를 수 있는 능력 이 없었다. 백의 여승은 성격이 엄하고 차가운 편이었으나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 역시 흐뭇한 노릇인지라 불현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아가는 말했다. [사부님, 그는, 그는, 그는 결코....] 그녀는 위소보가 자기의 사저를 열심히 찾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태를 따르게 된다면 역시 즐겁고 기쁘며 영원히 사태의 곁에서 모셨으면 가 장 좋겠습니다는 등의 말들은 기실 그 마음속의 참 뜻과 대조를 해 본 다면 마땅히 사태라는 두 글자를 아가라는 두 글자로 바꾸어야만 옳았 다. 백의 여승은 그녀에게 두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 결코 아니라는 것이냐? 네가 또 어떻게 남의 심사를 안단 말이 냐? 내 예전에 너희들에게 종종 말했지만 강호의 인심이 험악하고 간사 하여 그 사람들의 말을 모조리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어린 사람은 나를 며칠 동안 따랐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믿을 만 하다. 또한 나이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강호의 사내들과 일 괄적으로 함께 논할 수 있단 말이냐?] 아가는 감히 더 말할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가, 훌륭한 마누라야. 너의 낭군은 물론 여느 사람과 다르다. 어찌 강호의 사내들과 일괄적으로 논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의 사부의 말을 듣도록 해라. 그러면 결코 손해보지 않을 것이다. 암! 내가 보장하지! 기껏해야 나에게 시집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내가 그대를 순순히 놔 줄 줄 아느냐? 아무쪼록 마음을 푹 놓도록 해라.)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