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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시대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4월은 사춘기 소년 소녀들처럼 무언가 몽롱하고 초조하고 아득하고 설레고 서럽고 울컥거리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소곤거리듯 보드라운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가 하면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일어 산과 바다와 들판을 회오리 속에서 흔들리게 한다. 종잡을 수 없도록 사면팔방으로 휘젓고 다니는 미친바람 속에서도 동물들은 짝을 찾아 나서고 식물들은 새싹을 틔우 며 환하게 꽃을 피워 올린다.
불그레한 진달래도 좋고 하얀 매화 목련 벚꽃도 좋지만 아무래도 4월은 노랑꽃의 시대인가 보다. 비탈이나 울타리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개나리도 그렇고 마른 풀잎 사이로 돋아난 버성긴 초록 이파리 사이로 수줍게 꽃대를 올린 민들레도 참 소박하고 해맑고 예쁘다. 노랑색은 사람들의 마음을 희망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듯하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4월 12일, 화백회 퇴직교사 일곱 명은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곰소 격포와 대천 해수욕장을 향하여 한가로운 소풍 길에 나섰다. 물론 퇴직을 안 한 교사들은 새 교실 새 학생들과 어울려 부푼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쯧쯧, 차려준 밥상도 못 찾아먹고.......”
차 안에서 선거 이야기가 도마에 올랐다. 처음에는 100석도 못 건질 거라고 울상을 짓던 빨강당은 150석을 넘기면서 의기가 양양해졌다. 처음에 너무 몸집이 비대한 거대야당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노랑당은 2등으로 뒤처지면서 풀이 폭삭 죽었다. 하기야 변변한 상품들이 있어야 사든지 말든지 하제. 빨강당이나 노랑당이나 색깔만 다른 뿐 오십 보 백 보였다. 삼천리금수강산은 노랑색 천지였지만 노랑당은 차려놓은 밥도 못 찾아먹고 콧대가 내려앉은 꼴이었다. 어떤 이들은 되바라지지 않고 참신한 파랑당에 성원을 보내기도 했지만 목포의 파랑당 후보는 15%를 얻는 데 그쳤다.
하얀 목련 붉은 진달래 모두 좋지만
소박한 노랑 민들레 참으로 예쁘구나.
올봄도 노랑꽃 보며 부푼 희망 노래하자
군밤타령
봄 햇살이 나붓이 내려앉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던 승용차는 고인돌 휴게소로 들어갔다. 자판기에서 양촌리 커피를 뽑으려고 천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는데 아무리 요쪽저쪽 뒤집고 방향을 바꾸어 들이밀어도 주둥이를 앙다물고 쓰르륵 쓰르륵 심술궂게 토해냈다. 임 박사가 자기 돈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에야 임 박사가 드디어 돈이 들어갔다고 함성을 질렀다.
망할 놈의 기계 같으니라고. 기왕 받아먹을 거면 단번에 공손히 받아먹을 일이지 꼭 사람 골탕을 먹이고서야 시치미를 떼다니. 어린 시절 마당 아무데나 구멍을 파놓고 자치기나 구슬치기로 해를 넘기던 우리 세대는 컴퓨터를 위시해서 기계 나부랭이에는 태생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역정을 내기 일쑤다.
총무 류 박사가 매점에서 꽈배기와 군밤을 사 왔다. 군밤을 먹다가 터키 생각이 났다. 사람 먹고 살기는 어디나 비슷한지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부근에서도 군밤을 팔았다. 그저 그렇고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고인돌 휴게소 군밤은 맛이 달랐다. 자잘한 알밤들이 까지기도 잘 까지고 맛도 썩 좋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쥐밤이라 부르는 작은 밤이었다.
자판기야 까불지 마라 어른들한테 공손해야지
어찌 이리 봄볕도 좋다냐 산천경개 유람 다니세
달고 고소한 쥐밤 까먹으며 남은 인생 줄기더라고
주꾸미 축제
명색이 지금이 곰소 주꾸미 축제 기간이다. 사실 이번 여행도 주꾸미 축제를 겨냥한 나들이였다. 물론 목포에서도 주꾸미는 먹을 수 있지만 어쩐지 곰소 주꾸미가 더 맛나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건 바람을 쐬고 싶어서 지어낸 핑계인지도 몰랐다. 예전에 가까운 술벗들과 머나먼 곰소까지 달려가 주꾸미를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향수인지도 몰랐다.
옛날에는 싸고 흔한 것이 주꾸미요 전어였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여 유명세를 타면서부터는 칙사 대접을 받고 값도 껑충 뛰었다. 요즘에는 중국산 주꾸미까지 들어온다던가 어쩐다던가.
잔뜩 기대를 안고 곰소에 이르렀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바닷물 온도에 따라 해마다 어황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맘때쯤 주꾸미 축제를 여는 것으로 아는데 곰소 횟집들은 썰렁했다. 아무데에도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은 보이지 않았다. 축제 기간이 지났을까? 주꾸미 가격도 예상보다 두 배 가까이 비쌌다. 우리들은 크게 실망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곰소를 빠져나왔다.
격포에 이르렀다. 우리는 대규모 수산물 시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더라고 좀더 싸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시장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수요일이 정기 휴일인데 어제는 선거 날이라 손님을 받고 그 대신 하루 밀쳐서 오늘 쉬는 모양이었다. 수산물 시장 곁의 횟집으로 들어갔더니 아이고메, 곰소보다 더 비쌌다. 우리는 임 박사가 추천한 어시장 가게로 가서 겨우 가장 싼 값으로 주꾸미 2킬로를 주문했다. 가끔은 주꾸미 머리통 속에 쌀밥 같은 알들도 씹혀 먹을 만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서비스로 조개도 푸짐히 삶아주었다.
관광지 횟집 아무데나 들어가지 마시기를
하찮은 주꾸미도 가격이 천차만별
바가지 안 쓰고 먹는 주꾸미라야 맛도 쫄깃쫄깃
구공탄을 아시나요
우리 화백회 안내인 전 박사는 아는 것도 많고 가본 곳도 많다. 전 박사가 여행 일정에 석탄 박물관을 끼워 넣은 덕분에 우리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물론 지금은 폐광했지만 보령 탄광은 옛날에 꽤 많은 석탄을 생산했단다. 많은 광부들이 갱 안에서 희생되고 때로는 많은 광부들이 서독으로 몰려가 외화를 벌어들이기도 했지만 같은 화석 연료라 해도 석탄은 석유보다 훨씬 우리와 친근한 땔감이었다. 석유는 우리나라에서 한 방울도 안 나지만 석탄은 여러 곳에서 생산되었다. 지금같이 고유가 시대에는 더욱 석탄이 그리워진다. 지난겨울에도 우리 내외는 기름 값이 무서워 석유 보일러를 아껴 때느라 추위에 벌벌 떨며 지냈다.
석탄 박물관에 들어서자 고맙게도 안내인이 등장하여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석탄의 생성 과정, 석탄의 종류, 석탄층에서 발견된 암모나이트와 식물 잎사귀 등의 화석, 갱 안에 압축 공기를 밀어 넣는 거대한 기계, 광부들이 쓰던 여러 가지 기구들, 막장에서 발파 작업을 하고 석탄을 캐는 모습을 재현한 광부들의 모형, 석탄과 광부들을 실어 나르던 차량, 우리나라 탄광들의 위치, 탄광을 방문하여 광부들을 격려하던 옛날 대통령들의 사진.......
박물관을 견학하니 문득 석탄이 그리워졌다. 조개탄을 때던 증기기관차가 그립고 집집마다 가득 쌓아놓고 때던 구공탄 연탄이 그리웠다. 그 소박하고 남루했던 검정의 시대, 얼굴에 온통 검정 칠을 하고 흑인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던 연탄배달부의 미소,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어지러울 때마다 마시던 동치미 국물
핵 발전 좋아 말고 태양 발전 힘쓰자
석탄보다 기름이 더 좋다고 함부로 쓰지 말자
연탄난로 은근한 불땀 안 쬐 본 사람이 어찌 알 것이여
특실
대천에 이르렀다. 전에는 몰랐는데 보령과 대천은 한 통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천 해수욕장은 보령시의 일부분이었다. 숙소를 조금 싸게 옹색한 방으로 얻을 것인지 비싸더라도 넓고 편안한 방으로 얻을 것인지 고민이라는 전 박사 걱정에 내 의견을 말했다. “우리가 다 늙어 가지고 아쉽고 구차하게 들어갈 필요가 뭐 있겠어요? 좀 더 주더라도 당당하게 묵읍시다.”
내 의견을 참작했던지 전 박사와 총무 류 박사가 카운터에서 한참 흥정을 하더니 드디어 한화 리조트에서 가장 비싸고 넓은 특실을 얻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제일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졌지만 요즘 사람들은 ‘밥 묵고 산다’ 아니면 ‘돈으로 산다’는 식의 즉물적인 대답을 태연히 내뱉는다.
꽤 비싼 숙박료를 지불한 덕분인지 16층에 자리 잡은 특실은 넓고 포근하고 대천 해수욕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여 전망이 훌륭했다. 나그네들이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더 없이 만족스러웠다. 거기에 여장을 풀고 둘러앉아 의좋게 딸기를 먹었다. 그냥 딸기만 먹었더라면 좋았을 걸 류 박사가 내놓은 독한 보드카를 몇 잔 마셨더니 뱃속이 알딸딸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사느냐고 돈으로 살지
비싼 특실 들어가니 거 참 좋기는 좋네
오늘은 두 다리 쭉 뻗고 신명나는 꿈꾸자.
철 지난 해수욕장
나는 시끌벅적 사람들이 들끓는 여름보다 고즈넉하고 을씨년스러운 봄철의 해수욕장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백사장에 덩그마니 올라앉은 외로운 조각배를 찍었던 것인데 나중에 살펴보니 무슨 용도에 쓰이는지 바퀴까지 달려있어 미소를 짓게 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우리네 인생은 궁극적으로 홀로 가는 길이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래서 외롭다. 퇴직한 교사들끼리 왁자지껄 몰려다녀도, 심지어는 수많은 군중들이 앉아 있는 극장 속에서도 외로움을 곱씹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그 외로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해수욕장이 아닌가 싶다. 때문에 나는 조각배 한 척 덩그렇게 놓여 있는, 한 때는 인파로 북적거렸을,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철 지난 대천 해수욕장을 사랑한다. 거기에 서면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철학자가 되어 삶의 의미를, 회한에 가득 찬 지나간 삶을 되돌아볼 법도 하다.
나의 인생은 왜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을까. 나는 왜 번번이 어설프고 어리석었을까. 왜 나는 그 많은 시간들을 헛되이 흘려보냈을까. 왜 나는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쁨을 던져주지 못하고 번번이 안타까움과 실망만을 안겨주었을까. 왜 나는 엄벙덤벙 흐리멍덩 혼몽 상태에서 인생
의 종착역에 다다르고야 말았는가.
조각배 얹혀 있는 외로운 해수욕장
쌀쌀한 저녁 바람 물보라 휘날린다
돌아본 나그네 자취 몰려드는 아쉬움
대천 앞바다 브래지어
저물어가는 해수욕장을 걸으며 한참 동안이나 우왕좌왕하다가 겨우 덜 비싸 보이는 횟집을 정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 해수욕 철이 아니어서 조용하고 한산하기는 횟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유명 관광지라 회 값이 목포보다 좀 비싼 듯해서 내심 억울했는데 차려나오는 것을 보니 꽤 격식에 맞고 정성스러워서 금방 기분이 풀렸다. 나중에는 술이 얼큰하게 달아올라 종업원 아줌마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기도 하였다.
1박2일 여행 일정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만찬이라 모두들 기분이 상기하여 목청도 올라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참인데 누군가가, “어, 누가 부라자를 저기다 벗어놓고 갔지?”
나는 어떤 넋 나간 여자가 길바닥에 브래지어를 내동댕이쳐 놓은 줄 알고 유리창에 코를 박고 아래층 길바닥을 열심히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데도 브래지어는 없었다. 하하하하,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낭자했다. 그 때에서야 나는 그 브래지어가 횟집 유리창 너머 대천 앞바다에 봉긋 떠 있는 작은 섬을 빗댄 표현임을 깨달았다.
유방을 닮은 산봉우리가 하나둘일까만 저녁 으스름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는 그 섬을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브래지어라고 상상하고 볼작시면 영락없이 딱 들어맞는 형상이었다. B컵 아니면 C컵 정도, 그것도 한쪽 봉우리는 좀 높고 한쪽 봉우리는 좀 낮아 젖으로 치면 짝젖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빵빵하지 않고 풀이 죽어서 내용물이 빠져나간, 누군가 벗어놓고 갔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그 섬을 카메라로 찍어놓지 않은 게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바다도 어머니 산도 우리 어머니
대천 앞바다 브래지어 너 또한 반갑고녀
아득타 광원면막(廣遠綿邈)에 깊어가는 객수
웃음
화투놀이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서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끝내 내가 가게를 찾아가서 화투를 한 몫 샀다. 도박 중독 증세가 무섭지 어쩌다 한 번씩 여행길에 점잖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은 화투놀이는 그보다 더 즐거운 오락이 없을 정도다.
화투의 매력은 일행들한테 번번이 숱한 웃음을 안겨준다는 데에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서 한국 사람들의 실태를 조사했는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이 텔레비전 시청이고 그 다음은 근심 걱정하기이고 그 다음은 화장실 가기이고 맨 꼴찌로 짧은 시간이 웃기였다고 한다. 세상에나! 웃는 시간이 화장실 가는 시간보다 적다니.
내가 여행 다닌 곳은 중국과 인도네시아 발리와 터키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소득이 낮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평안하고 태평스러운 눈빛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나라보다 경제 사정이 좋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날마다 근심 걱정에 잠기게 하고 웃을 줄 모르게 만들었을까.
문 박사가 일곱 명 모두 화투놀이에 참가해야 한다고, 숫자가 적으면 삥똥보기는 재미가 없다고 열렬히 주장하였지만 세 사람은 끝내 화투를 거부해서 하는 수 없이 네 명만 화투를 치기로 하였다. 돈 따먹기 고스톱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궁리 끝에 삼봉을 치기로 하였다. 한 판이 끝날 때마다 종이에 승자와 패자의 성적을 누적해서 적어 내려가는데 1등이 1500약이 넘으면 판을 끝내기로 했다. 1등은 공짜, 2등부터 4등까지는 차등을 두어 돈을 내는데 그 돈으로는 무슨 기념품이라도 사기로 했다. 화투놀이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의무적으로 만 원씩 갹출했다. 결과적으로 화투를 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꼴찌가 2만 원을 냈으므로 크게 억울할 것까지는 없는 셈이었다.
화투를 치지 않은 세 사람은 좀 일찍 잠자리에 들고 화투판은 새벽 두 시쯤 끝났다. 물론 화투놀이는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우리는 한 보따리씩 웃음을 보듬고 대천 해수욕장 리조트 특실 편안한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몸을 눕히자마자 덜커덩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 웃음은 행복의 원천
웃으면 웃을수록 좋은 일 많이 생겨
삼봉에 홍단 니조리 박장대소 화투판
돌아갈까 돌아가
꿈도 꾸지 않고 참 편안하게 잘 잤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이 깼다. 부지런한 전 박사 류 박사 벌써부터 아침밥 준비에 바쁘다. 식탁을 깨끗이 닦고 집에서 가져온 묵은지 내놓고 류 박사가 가져온 조개로 국을 끓였다. 그러잖아도 과음한 뱃속이 쓰라린데 따끈한 바지락 국물이 들어가니까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떠나오기 전부터 시작한 감기 기운이 자고 나니 훨씬 심해졌다. 목이 꽉 잠겨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바지락 국물에 묵은지에 아침을 맛나게 먹고 아침 연속극 ‘복희 누나’를 보았다. 나만 즐겨 보는 줄 알았더니 문 박사도 애청자인 모양이었다.
빨강당 당수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고 외쳤지만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과거는 돌아볼수록 회한만 쌓이고,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야만 싹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며 그 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 마련인 것을.
복희 누나의 시대적 배경은 1978년 무렵이다. 전라북도 진안군의 덕천 양조장. 목포 출신의 탤런트 배동성이 양조장 집 사위로 나와서 미운 짓을 일삼아 시청자들의 부아를 돋운다. 고아원, 바보, 사기꾼, 사랑과 미움, 노망....... 이야기는 3,40년 전의 힘들었던 시절을 바탕 삼아 풋풋하고 훈훈하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978년이면 나 서른 세 살이었다. 완도여중에 근무했다. 나의 큰아들은 네 살이었고 둘째아들은 세 살이었다. 무슨 일론가 자전거 안장에 한 명 앉히고 자전거 뒤쪽 짐칸에 한 명 앉히고 땀 뻘뻘 흘리며 끌고 가는데 누군가 한 녀석이 자전거 위에서 꾸벅꾸벅 졸아서 떨어질까 봐 애간장을 태웠다. 서른 세 살의 젊음, 세 살 네 살의 아이들. 정말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아! 옛날이여! 연속극 ‘복희 누나’는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새록새록 일깨워 주어서 향수를 자극하고 누선을 자극한다.
고아원 출신 복희 누나 마음씨도 참 고와
양조장 아들 태주 바보인가 천재인가
그립다 그 때 그 시절 가고파라 가고파
돌아가는 길
아침 먹고 좀 쉬었다가 리조트 특실을 나와 대천 항구로 갔다. 해수욕장에서 2킬로쯤 떨어진 곳인데 실은 거기가 수산물 시장도 크고 먹거리도 훨씬 풍성해보였다. 항구에서는 유람선도 다니는데 시간이 안 맞아 포기하고 죽도 항구를 구경했다. 언덕에서 바라본 선창은 배들이 다정하게 모여들어 봄 바다의 따스한 분위기가 완연하였다.
죽도에서 나와 무창포로 갔다. 전 박사의 말에 의하자면 무슨 주꾸미 도다리 축제를 한다 했는데 벌써 잔치가 끝난 모양이었다. 백사장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피운 듯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잔치는 화려하고 가슴 설레지만 잔치가 끝난 뒷마당은 어쩐지 쓸쓸하고 애잔하고 서럽다. 우리들의 나이가 바로 잔치 끝나가는 나이다. 두보 시인은 인간 칠십 고래희라고 읊었지만 우리 나이가 벌써 고희를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었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이 인생으로 치자면 축제 기간이다. 예순 일흔이면 잔치가 끝나고 마당에 흩어진 허섭스레기들을 치울 때다. 자기의 인생을 매조지하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부처께서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니었다. 존재처럼 착각했지만 실은 영구불멸하고 부동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공을 타고 흘러가는 변화의 한 과정, 반짝 나타났다 스러지는 한 때의 현상에 불과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없음’이다. 우리는 살짝 ‘없음’에서 ‘있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영원한 고향인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죽는 것을 ‘돌아가신다’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불멸이다.’라고 일갈했지만 사실 곰곰 따져보면 죽지 않고 무한정 살아간다는 것도 그것처럼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있음’이란 오래 버틸수록 닳아지고 추레해지고 퇴색하고 흉해지기 마련이다. 자, 이제 우리는 무창포 해수욕장처럼 잔치를 마치고 백사장을 곱게 쓸어 깨끗이 매조지하고 개울을 건너뛰듯 가볍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게 과연 생각대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는지.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있음’이요,
없어야 할 때에 없어야 할 곳에 없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 ‘없음’이라,
어디서 무엇이 되어 우리 다시 만날까. (끝)
첫댓글 아~!!참 감칠맛나는 짧은 여행글 잘 읽었습니다..
황혼의 여유로운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집니다~^^
곱디고운 붉은 석양이 갯벌에 늘어져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