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선생님의 성지 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에 나오는 황사영 알렉산델의 한 장면입니다. 조선천주교의 탄압을 막기위해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황사영 백서의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선생님은 황사영 알렉산델의 성덕을 고양하시면서도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버려진 듯 도대체 기념하고 지킬 줄 모르는 못난 신자들을 눈물어린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사고 통회하고 있습니다.
* 아래 글은 본래 책에 있던 글이지만 인터넷 카페에 올려진 글을 다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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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黃嗣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터전이 이 땅에는 세 곳이 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랐다고 알려진 강화도에 있는 그의 생가터, 그가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던 <황사영 백서(帛書)>를 쓴 배론성지 그리고 그가 묻혀 있는
경기도 양주군의 묘소가 그곳이다.
황사영은 창원(昌員) 황씬 판윤공파(判尹公派) 17대손으로, 정5품의 정랑직
(正郞職)을 지낸 아버지 황석범과 어머니 이윤혜 사이에서 1775년 유복자로
태어났다. 자는 덕소(德紹), 어머니 이윤혜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과 먼친척이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 정조 임금께서 친히 그의 손을
잡고 20세가 되면 좋은 벼슬자리를 주마 약속했던 뛰어난 젊은이였다.
그래서 그는 임금이 잡았던 손이라 하여 붉은 비단을 그 손목에 매고 다녔다
고 한다. 그러나 학문을 익히던 중 정약종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생애의 전환
기를 맞는다. 그는 스승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明連, 마리아)을 아내로
맞게 된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알렉산데르(Alexandel)라는 세례명으
로 영세, 입교한 후, 임금의 총애 속에 약속된 화려한 미래를 포기한 채
신앙생활과 전교에 온 힘을 기울인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승훈, 정약종 등이 순교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잡혀가면서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린다. 2월 초순 그는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 숨어들었다.
지금 '배론성지'에 재현되어 있는 그 토굴이다.그는 여기에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청원서 형식을 빌어 박해의 참상을 전하고 교회 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담을 글을 흰 비단에 써 내려간다.
교우 황 심(黃沁)이 이를 받아 옥천희(玉千禧, 요한)에게 전하여 북경 주교에
게 보내기로 했던 이 계획은 두 사람이 체포되면서 실패하고, 배론 토굴에서
황사영까지 잡히게 된다.
결국 그는 머리, 몸, 팔, 다리로 시신을 토막내는 극형, '능지처참'으로 27년
의 생애를 마감한다. 1801년 12월 10일(양력), 서소문 밖에서였다.
이어 어머니 이윤혜와 아내 정명련은 먼 남쪽 거제도와 제주도로,아들 황경한
(黃景漢)은 추자도로 그리고 숙부 황석필은 북쪽 경흥으로 흩어져 유배되었고,
재산은 물론 다섯 명의 노비마저 관노로 몰수되었다.
일가는 이렇게 잿더미로 변했지만...'남자 교우 중 최고의 교우요, 양반 교우
중 최고의 교우'로 칭송되었던 황사영.
'날마다 여려 차례 형을 가하여도 결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인물'이라고
정약용이 전하듯 그의 인품은 드높았다. 이 말을 증언하듯, 그에 대한 취조
기록인 '추국안(推鞫案)'에는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그의 인간됨이 가지는
크고 넓은 그릇이 드러난다.
영의정 심환지, 우의정 서용보 등이 자리한 취조 기록에는 이런 내용의 말이
몇 번이나 나온다
"너의 하는 짓이 몹시 교활하구나. 어제 문초할 때 네가 써 올린 40여 명의
명단은 이미 시골에서 체포되었거나 혹은 처형된 자들이 아니냐?"
단 한 사람의 교우라도 어떻게든 보호하려 한 그의 모습을 이처럼 웅변하는
말이 또 있을까. 그의 의연한 몸가짐이 이러하였다.
그러나...이 '늠름한 청년 순교자'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에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싶게 표지판 하나가 없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이 곳을 관할하는 '의정부 2동성당'의 교우들이 야속할 정도로 안내 표지는
커녕, 길을 알려 주는 판때기조차 하나 없다.
'북한산 국립공원 송추계곡'이라고 크게 써 있는 입간판 바로 맞은편이
황사영 묘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 갈 정도의
포장 도로다. 주위의 음식점 간판을 유심히 바라보며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민속가든'이라는 갈비집이 나온다.
그 건물 뒤편으로 비석이 서 있는 묘지가 길에서도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다.
황사영이 그 영혼의 옷을 벗고 떠나간 후 잠들어 있는 자리. 그의 묘지이다.
묘소는..그러나 이상하다. 하느님을 증거하다 치명의 꽃다발을 받았건만,
십자가 하나도 세워져 있지 않다. 성모상도 십자 고상도 없는 묘지이다.
묘소 앞에 네 개의 작은 돌 계단이 있지만 그곳으로는 묘지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정원수를 가꾸는 밭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땅 주인이 이곳을 찾아
오는 순례객들이 자기 땅을 밟지 못하도록 심어 놓은 나무들 같다.
봉분 오른편에 '창원 황공 알렉산델 사영의 묘'라고 씌어진,1988년 10월29일
한국 순교자 현양 위원회가 세운 비석이 있다. 묘소 앞에는 좌우로 주목이
네 그루씩 심어져 있지만 이것마저도 두어 그루가 성할 뿐,누렇게 잎이 변하
여 비실비실 죽어가고 있다.
그것뿐이다. 봉분을 감싼 돌과 석등에 새겨진 십자가가 겨우 그의 신앙을 묵
묵히 전하고 있을 뿐..그는 그렇게 잠들어 있다. 무엇을 기릴 줄 모르는 민족
이라는 자괴감이 치밀어 오르는데 주변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의 소음만이
귓가에 가득하다.
비문의 후반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가 묻힌 곳마저 찾지 못하여 안타까이 여겨 오던 중, 후손들과
연구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80년 3월에 그의 11대 선조인 한성판윤공 황침
(黃 琛)의 묘소 아래 이곳에서 그의 묘소를 발견하여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도로변은 온통 '먹자골목' 같다. 토속음식, 숫불가든, 가마골, 오리고기,
러브호텔... '민속야외'라는 말도 안 되는 식당 이름까지 보인다.
묘지 위쪽에서 까치가 울었다. 쳐다보니, 아카시아 나무에 까치집 세 개가
무슨 신호처럼 얹혀 있다.
봉분 위에는 무심하게 할미꽃이 드문드문 자라고, 반지꽃이 보랏빛으로 피어
있다. 어려서 저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끼곤 했는데..그 소년도 이제 오십을
넘은 나이가 되어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스물일곱에 죽은 이 청년의 두 배가 되는 세월을 나는 살고 있다.
무엇을 이루었나. 무엇을 남겼나. 이제부터다. 내일부터다. 그렇데 되뇌면서
살아온 세월만 무심하구나.
앞에 있는 식당에서 갈비 굽는 냄새가 풍겨 온다. 양념에 오래 재어 두었던 것
같은 그런 냄새다. 이런 냄새라도 풍겨 주니.. 우리 귀한 순교자, 헌헌장부
황사영이여, 이승에서 쫓겨 다니느라 배고팠던 나날에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라
접어 두고 노여워하지는 마소서.
묘비에는 그가 이 민족을 위해 죽었다고 새겨져 있다. 그를 숭앙함에는 이렇게
인색하면서 돌에 새기기는 그다지도 쉬웠던가. 그러므로 황사영의 묘소는 장엄
하다. 차라리 장엄하다.
이 잡스러움의 한옆에 버려진 듯 묻혀 있기에, 약속된 부귀와 벼슬길을 버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신앙에 휩싸여 빛나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간
그의 발자취가 더욱 그렇다.
,황사영 백서. 후반에는 북경 주교에게 간청하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아 있는 사람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혹은 장사꾼이 되어 돌아다니고 혹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데 이사를 가는 등 길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또한 '대재'와 '소재' 날을 당할 때마다 신자라는 것이 폭로되기 쉬우므로 감히
간청하오니, 현재 이 나라 교우들로서 여행하는 자에게는 대,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면제해 주셔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 생명을 보존하게 하심이 어떠
하겠습니까."
여기서 대재(大齋)란 절제의 한 방법으로 일정한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이고,
소재(小齋)란 육식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에
단식과 육식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테니 이것을 용서해
달라는 부탁인 것이다.
몸을 숨겨 도망을 다니는 그 황망한 가운데서도 우리 옛 선조교우의 몸가짐이
이러하였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지,묘소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서서 또 한 번 부끄러웠다.
묘소를 떠나며 나는 주변에 있는 보라색 반지꽃 서너 뿌리를 손으로 후벼 팠다.
그것을 비닐 봉지에 넣어 차에 싣고 돌아와, 그 날 저녁 나는 마당 한쪽에 그
세 움큼의 반지꽃을 심었다.
그리고 올해부터 마당에 심기 시작한 다른 양생 풀꽃과 구분지으려고 옆에
벽돌 하나씩을 놓았다.
내년에도 그 다음해에도...꽃이 피면 그때만이라도 잊지 않으리라. 황사영.
그가 남긴 큰 뜻을.
그의 생가터를 찾아 강화도로 갔다. 강화 시내로 들어서면 경찰서를 알리는
표지판 옆에 커다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황사영 생가터. 2.6km'라고
힘차게 그려진 화살표가 보인다.
그 표시를 따라 차를 달리면, 세 곳에 걸쳐 길이 갈라 질 때마다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친절하게 세워져 있다.
그러나 막상 생가터에 다다르면, 위풍당당한 창원 황씨 사당 건물 밑에
종회에서 세운 '장무공 황형 장군 신도비'가 거북 등에 얹혀서 거대할 뿐,
그의 생가터가 보이지 않는다.
묘지기의 집 같은 주택이 하나 있기는 한데 주인은 없고, 개만 두 마리가
쫓아 나와 악을 쓰고 짖어 댄다. 생가 자리가 어디쯤인지 몰라 주변을 어
슬렁거리는데 주택 뒤편에 조그많게 무슨 팻말이 서 있어서 다가갔다.
'황사영 생가터에 대하여 드리는 말씀'이라는 안내판이다.
"이 곳을 성인 황사영 생가터로 잘못 아시고 찾아오시는 천주교인 여러분과
표지판을 설치한 천주교 인천교구청에 대하여 민망스러움을 금할 수 없어,
족보를 근거로 하고 그 외의 고증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알려 드리니
성인 황사영의 생가터를 양주군 부곡면 장흥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황사영을 '성인'이라고 칭송(?)하면서 적어 놓은 내용은 이렇다.
생가터라고 알려진 이곳은 사당 중건 이전에 사당의 정면 10미터
앞이었으므로 주택이 있을 수 없는 위치이다.
황사영은 장무공의 8형제 중 한성판윤을 지낸 둘째 아들의 자손으로 12대가
되며, 이 가게의 거주지는 양주군 부곡면 가막골이며 시향(시향)도 거기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더욱이 편지글도 아닌데 '추신'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글은 경악에 가깝다.
"이곳을 성인 황사영 생가터로 오인하게 된 연유를 밝혀 드립니다. 장무공
황형 장군의 후손 중 인천에 거주하던 무지한 자가 허영심에서 분별 없이
허위 날조하여 전파한 것이오니 고찰하시기 바랍니다."
1998년 5월 1일 종회 회장 이름으로 세운 안내판이다. 종이에 써서 비닐로
싸서 세운 것으로 보아, 눈비에 젖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까지
하고 있다.
불갈비 굽는 냄새가 풍겨 오던 묘지,
어느 무지한 자가 허영심에서 날조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생가터.
황사영의 태어남과 죽음은 이렇게 오늘 능욕당하고 있어도 좋은 것인가.
이것이 진정으로, 빛나는 어른을 모시고 있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란 말인가.
입 안이 지걱거릴 정도로 불어 대는 거센 흙바람을 맞으며 망연히 서 있었다.
나는.
황사영. 그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는 지금 우리들에게서도 버림받아 피 흘리고 있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증거'는 아닌가.
첫댓글 "황사영 백서"를 찾아서 헤매기 십년만에 바티칸에서 찾아내는 한 피디분이(전세권) 쓴 "피의 증거"라는 프포르타지 소설을 참고삼아 소개합니다. 황석두 루가서원에서 만들었습니다. 십년간 취재 사년간 집필했다고 합니다................................
현양분과 아우구스티노 형제님 감사합니다 함께나눌수있는글 자주 부탁드립니다
비딸리아노 회장님, 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꼭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