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 모음
문학/시인마을 2016. 6. 5.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돌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오라.
청녹색
하늘도 푸르고 바다고 후르고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하나님은 청녹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청녹색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이 유익한 빛깔을 우리는 아껴야 하리.
이 세상은 유익한 빛깔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젊음을 다오!
나는 올해 환갑을 지냈으니 젊음을 다오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도 모르게 젊음이 다 가벼렀으니 어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내가 젊어서도 시인이 되겠지만 그러나 너무나 시일이 짧다.
다시 다오 청춘을! 그러면 나는 뛰리라. 마음껏 뛰리라.
곡 차
나는 무수한 우수한 사람들 아는데 이분들께 감사론 말씀 이는데 다만 묵묵부답이다.
나의 18번(十八番)은 그저 곡차(막걸리)마시는 것 뿐인데 저녁 6시에 한통 사면 옆의 처남 부르고 몇 시간이고 가니 어찌 술이라 하겠는가?
인생은 소중(所重)하고 고귀(高貴)한 것이니 함부로 헛되게 쓸소냐? 중국의 만만디이(慢慢的)란 말은 일을 서둘지 않고 급하거든 멀리 가라는 인생 탐욕인데 이 탐욕앞에서는 그저 허허 웃음뿐이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 쓰는 것 좋고 다 좋지만은 인생을 느끈하게 복되게 사는 것을
무슨 일 하고도 바꾸지 말 일이다.
술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맥주
나는 지금 육십둘인데 맥주를 하루에 두병만 마신다.
아침을 먹고 오전 5시에 한병 마시고 오후 5시에 또 한병 마신다.
이렇게 마시니 맥주가 맥주가 아니라 음료수가 다름이 없다.
그래도 마실때는 썩 마음이 좋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막걸리
나는 술은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원짜리 한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人生)의 최대목표(最大牧標)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맥주(麥酒) 두병주의
나는 오전 5시에 맥주 한병 마시고 오후 5시에 또 한병 마신다. 이렇게 마시니 참 몸에 좋다.
한병씩 마시니 음료수나 다름이 없다. 많이 마시면 병에 걸린다는걸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입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앞으로 이 주의(主義)를 지켜 나갈 것이다.
한가위 날이 온다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 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 하시겠지요.
청교도(淸敎徒)
나는 원체가 천주교도(天主敎徒)인데 신부(神父)라는 이름이 도통 안맞고 그리고 또 인공중절(人工中絶)을 금하다니 마음에 안들어서 내 혼자만의 청교도(淸敎徒)라고 자부(自負)하고 있소.
신부(神父)라니 하나님 아버지란 말입니까? 개신교(改新敎)의 목사(牧師)라는 말이 응당하다고 보아요.
오늘날 세계인구가 이렇게도 팽창하여 온갖 불합리(不合理)의 원인이 되어 있는데 왜 인공증절(人工中絶)을 금한단 말입니까?
청교도(淸敎徒)인 천주교도(天主敎道) 이것이 나의 신분증(身分證)입니다.
서울, 평양 직통전화 · 27
얍학하게 뭉클덮인 구름면이, 달빛으로 환하게 비친다. 정말이지 얍삭한 구름뭉치구나. 구름사이에 운하(運河)이듯한 하늘 강물이 푸르고, 마치 하늘나라 선녀(仙女)이기도 하고, 천사(天使)의 숨박꼭질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외출이기도 하고, 세계지도이기도 하고, 숲을 멀리 바라보는 듯도 하고, 도저히 구름이면서도 아예, 그런 냄새도 안나게 아름답다. 구름이 예술품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이것도 좋고 기쁜 소식은 혜존(惠存)이다.
西洋사람들의 나이와 우리들의 나이
서양사람들의 나이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인데 우리들의 나이는 잉태부터이다.
서양사람들의 나이는 저들이 만들어낸 태교(胎敎)를 괄시하는 말이고 동양사람들의 나이는 태교(胎敎)를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니 서양사람들의 나이는 가짜고 우리들의 나이는 정당한 나이다.
책을 읽자
일본이 경제대국(經濟大國)으로 세계를 제패하듯 하고 있는 것은 그 이유를 따지면 그들의 독서력(讀書力)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몇배나 더 독서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일본사람들의 베스트셀러는 5, 6백만부를 헤아린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책을 가까이 하여 독서를 생활화(生活化)함으로써 우리도 선진국에 끼이도록 하자!
초가을
'89년의 초가을은 세계 한민족 체육대회로 막이 오르고
그 폐회식으로 초가을은 갔어요. 우리 겨례가 기다리던 가을이 훌쩍 떠나버린 느낌입니다.
세계의 우리 동포여 아무쪼록 조국을 잊지 말아 주시오.
저물어 가는 가을은 온 겨레의 가슴에 풍성한 열매를 안겨주는 따스한 햇빛이며 행복의 미소입니다.
12월이란 참말로 잔인(殘忍)한 달이다.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殘忍)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아끼자 모든 것을
모든 걸 아껴 씁시다. 이 지구의 자원이 차차 줄어들고 있어서 인류의 앞날이 어둡습니다.
이젠 석유만 해도 중동(中東)지방에서만 나오고 있는 판국입니다.
모든 국민들이여 아껴 써야만 인류의 장래가 있습니다.
뭐 하나라도 꼭 쓰일 때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아예 욕심을 버립시다.
신부에게
온실에서 갖나온 꽃인양 첫걸음을 내디딘 신부여 처음 바라보는 빛에 눈이 부실 테지요. 세상은 눈부시게 밝은 빛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빛도 있답니다. 또한 기쁜 일도 있을 것이고 슬픈 일도 있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쓴맛이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은 괴로움만도 또한 아닙니다.
신부님곁에는 함께 살아갈 용감하고 튼튼한 신랑이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고 양보하며는 더 큰 복을 받을 테지요. 신부여, 성실과 진실함이 함께 한다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용기와 힘을 합쳐 보세요. 그러면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며 튼튼한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전국의 농민들이시여!
수고하시는 전국의 농민들이여! 정부에서도 국회에서도 농민들을 위한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언젠가는 풀릴 날이 올거라 나도 믿고 있고 여러분들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사는 일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한가지씩 노력하면서 풀도록 합시다. 천하의 농민들에게 다복한 날이 올 것이라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신세세(新世界)의 아가씨 사원들에게
'공작'의 89년의 86호를 우연히 보면서 읽으면서, 이 61살먹은 노인은 그저 지난 청춘이 다시 어떻게 좀 안될 지 모르겠다고 탄식할 뿐이다. 61살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주민등록증과 성적무능 력증(性的無能力症)에만 나타난 것 뿐인 줄 알고 느끼면 서 애오라지 무기력하게 살고 지내지만, 지금 금방 읽은 '신세계(新世界)'의 젊은 아가씨사원들의 청청(靑靑)한 청춘고백(靑春告白)통에 이 나의 무기력(無氣力)이 어찌 기력(氣力)이 될려고 요동하지 못하겠는가 이 말이오!
고향이야기
내 고향은 세군데나 된다. 어릴때 아홉살까지 산 경남 창원군 진동면이 본 고향이고 둘째는 대학 2학년때까지 보낸 부산시이고 세째는 도일(渡日)하여 살은 치바켄 타태야마시이다. 그러니 고향이 세군데나 된다.
본 고향인 진동면은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당산(堂山)이 있는 수려한 곳이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 나는 일찍부터 해수욕을 했고 영 어릴때는 당산(堂山)밑 개울가에서 몸을 씻었었다.
제2고향은 부산시 수정동(釜山市 水晶洞)인데 산중턱이라서 오르는데 힘이 들었다.
제2의 고향인 일본 타태야마시에서는 국민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살았는데 일본에서도 명소(名所)다. 후지산이 멀리 바라 보이고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요, 해군 비행장이 있어서 언제나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최저재산제(最低財産制)를 권합니다.
세계평화 위해서도 사회복지 위해서도 필자는 최저재산제(最低財産制) 권합니다.
최저임금제(最低賃金制) 있잖아요? 최저한도(限度)의 임금(賃金)을 말하는데 왜 최저재산제(最低財産制)가 있을 수 없어요? 박정희 정권때 박장군 쿠데타 모의(謀議)때 여러가지 인쇄물을 담당한 이(李)로라는 실업가가 박정권 성공 후의 비호를 받아 5백억환의 재산을 모았다는 보도에 접하여 나는 아연실색한 일이 있어요!
미국같은 선진국에서는, 부자는 부자대로, 많은 재산을, 대학이나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끊임없이 기부하면서 사회환원을 기어코 한다는데, 우리나라서는 그러지 못해요!
그래서 필자가 말씀드리는 것이 이 최저재산제(最低財産制)입니다요!
한 10억원 정도로 사유재산고(私有財産高)를 제한하는 것이 앞으로 유익한 자유주의체제가 될 것이며,
이북 동포들의 제국주의(帝國主義)소리도 줄 것이고 일반 노무자들도 큰 혜택을 보리라 생각합니다!
김형(金兄)
나는 일주일에 네번 다섯번은 기원(棋院)에 나갑니다. 김형(金兄)은 더 자주 나오는 사람인데 장애자에 속할 것입니다. 등이 약간 굽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김형(金兄)은 어찌 그리도 마음씨가 곱고 바둑도 아주 센 급(級)인데 꼭 이기겠다는 생각없이 여유있게 너그럽게 두기만 합니다.
UN이 올해는 '장애자의 해'라고 못 박았는데 휴머니즘이 드디어 발화(發花)했습니다. 인류가 비로소 눈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언제나 김형(金兄)은 떳떳하고 으젓하니 - 되려 내가 장애자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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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