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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에게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 ‘의의 사람’, ‘진용의 사람’, 그리고 ‘애국자’였다. 선지자의 성격의 하나로 애국을 들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애국자는 의의 사람, 진용의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함석헌의 선지자 표상을 종합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애국자’와 ‘하나님의 사람’은 조화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구약 성서의 선지자들에게 민족은 곧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의 사람’과 ‘애국자’는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함석헌은 구약 성서를 20세기 조선의 현실에 놓고 읽고 있다. 이 경우 ‘애국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하나님의 사람’이 따라야 할 가치는 충돌할 수 있었다. 함석헌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선지자의 애국은 단순한 자민족의 이익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선지자의 애국은 한갓 열정의 애국이 아니었다. 공도야 어찌 되었든 자국민의 이익만을 위하였으면 그만이요 진리야 어찌 되었든 자민국의 소유면 진선진미盡善盡美라는 편견적 국수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의 애국은 유일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근본 국시國是로 하고 영원의 진리, 보편의 정의에 의하여 하는 애국이었다.
<성서조선> 4호, 1928. 4. 34쪽.
선지자는 ‘선민다운 백성을 지으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눈앞의 결점을 비판하기보다 문제의 근본을 충격하는 사람이었다. 또 선지자는 동포를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뜻대로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은 조선에 이런 선지자가 많이 나기를 고대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함석헌의 선지자 표상은 우치무라 간조의 모습과 겹쳐 있었다. 함석헌의 글 「선지자」의 곳곳에서 우치무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함석헌이 예레미야를 말하면서 이와 겹쳐 떠올린 것은 아마도 ‘우치무라 불경 사건’과 그의 ‘비전론非戰論’이었을 것이다. 이 둘은 우치무라의 선지자적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함석헌과 <성서조선> 동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1861년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우치무라 간조가 도쿄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삿포로 농학교를 거쳐 3년 반 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온 것은 1888년 5월이었다. 1889년 메이지 정부가 ‘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천황제가 강화되었고, 이듬해인 1890년 10월에는 천황에 대한 멸사봉공을 내세운 ‘교육칙어’가 발포되었다. 이 무렵 우치무라는 도쿄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1891년 4월 학교에서 거행된 ‘교육칙어 봉배식’에서 교육칙어에 쓴 천황의 서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것을 강요받게 되자 이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내가 죽고 ‘국적’(國賊)으로 비난을 받는 등 고초를 겪게 된다. 이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저술 활동을 이어오던 우치무라는 1903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전운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전쟁폐지론’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우치무라는 ‘요로즈호’의 주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주장으로 인해 결국 ‘요로즈호’사社를 퇴사해야 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삶에 대해서는 스즈키 노리히사,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소화, 1995)을 참고할 수 있다.)
불경 사건과 이로 인한 고초를 우치무라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불경 사건 이후 우치무라는 그의 첫 저서 <크리스천의 위로>의 2장 ‘겨레에게 버림받았을 때’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만일 애국이 진정이라면, 진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한 진정이다. 이리하여 완전한 사회에 있어서는 이 둘이 결코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나라를 사랑하여, 온 국문이 다 신성한 애국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회에 있어서 만일 나라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나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때야말로 인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이며, 나라에서 버림받은 것을 하늘에도 땅에도, 호소할 사람도 하나님도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 전집 1>, 크리스챤서적, 34쪽.
우치무라의 애국주의는 '두 개의 J'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Japan'과 'Jesus'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에 빗대어 '예수는 우리의 미래의 생명이 있는 곳이고 일본은 우리의 현재의 생명이 있는 곳'이라고 한 데서 이 사상이 표명되고 있다. 이 '두 개의 J' 사상은 국가주의를 절대화하는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889년과 1890년 메이지 헌법과 교육칙어가 제정, 발포된 것은 천황제 국가주의가 확립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이 와중에 불경 사건을 일으킨 것은 그의 내면에 '두 개의 J'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애국은 천황제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이 아니라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정의와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크리스천의 위로>에서 우치무라는 역사에서 참된 애국자이면서도 국민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없지 않다며, 예수 그리스도, 소크라테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단테 알리기에리 등을 거명하고 있다. 그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 또는 영웅들과 같은 반열에 서서 선지자로서의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치무라 불경 사건과 그의 애국심이 <성서조선> 동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는 점은 우치무라 서거 이후 동인들이 쓴 여러 글에서 확인된다. 한 예로 류석동의 글 「내촌감삼 선생을 추억하며」의 구절을 옮겨보자.
선생은 명치 초년의 소위 선각자와는 대조적 입장에 섰음으로 타인이 추측할 수 없는 비참한 일이 많이 있었을 것이나 선생부터 직접 듣고 또한 일본 일반사회에서도 잘 아는 선생 일생에 가장 쓰라린 사건은 제일고등학교 불경 사건과 무전론無戰論 주창이다. (중략) 선생의 생애는 이 두 사건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배의 연속이고 전투의 계속이었다. 한 시대 한 나라의 대표자 예언자가 되려면 과연 이러하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난다.
<성서조선> 18호, 1930. 7. 4-5쪽.
함석헌이 애국을 선지자의 성격으로 내세우면서 우치무라 간조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점은 후일 함석헌이 쓴 자전적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도쿄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러 문제로 고민하던 중 김교신의 소개로 우치무라의 예레미야 강의를 듣게 되는데,1959년에 쓴 자전적 글에서 함석헌은 우치무라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한 학교에 있는 김교신 형이 우치무라 모임에 나가는 줄을 알게 됐다. 그래 곧 그의 소개로 선생의 문하에 가게 되었다. 가니 그때 그는 매 주일 「예레미야」 강의를 하는 때였다. 그때 인생문제와 민족문제가 한데 얽혀 맘에 결정을 못했던 나는 그 강의를 듣는 동안에 많이 풀린 것이 있고 참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함석헌저작집 6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 247쪽.
우치무라의 예레미야 강의를 통해 자신을 붙들고 있던 신앙과 민족문제를 일치시킬 수 있었다는 그의 기록으로 볼 때 「선지자」를 쓸 무렵 함석헌의 선지자 표상에는 우치무라의 예레미야 강의와 우치무라 자신의 애국적 삶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함석헌이 <성서조선> 초기부터 선지자적 정념에 이끌려 선지자 연구로 나아간 데는 이런 사정이 놓여 있었다.
함석헌이 선지자의 애국이 단순히 열렬한 것만도 아니고 국수주의자의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고, 영원한 진리, 보편적 정의에 부합하는 애국이어야 한다고 한 것은 우치무라의 '진정한 애국'과 이어져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와 함석헌은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이 둘의 '애국'도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의미로 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치무라에게 있어 강조점은 국가주의로부터 개인의 양심과 종교적 자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에 있었다면,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함석헌의 강조점은 조선의 해방에 있었다. 이후 일제가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 나서게 되면서 이 차이는 점차 커지게 된다. 우치무라의 비전론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는 해도 전면적인 전쟁 거부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고 그 안에 모순과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우치무라의 ‘두 개의 J’ 사상이 제국주의의 확산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을까? 1927년의 함석헌은 우치무라와 자신 사이에 놓인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후 이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었을까? (우치무라의 비전론이 지닌 한계에 대해서는 양현혜,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 5장 ‘사회 평론가 시대’ 참고)
여기에서 흥미롭게 볼 지점은 이처럼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이 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이 「선지자」를 비롯한 <성서조선> 초기 글에서 우치무라를 거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김교신이 「입신의 동기」에서 우치무라를 ‘신뢰할 만한 기독교 교사’라고 칭하면서 그 이름을 슬쩍 감추는 것과도 비견된다. 함석헌과 김교신의 내면에 식민지적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어, 일본인 애국자를 스승으로, 선지자로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점에 있어 함석헌은 김교신보다 더 철저했던 것 같다. 우치무라 서거 이후 <성서조선> 17-20호에서 동인들이 우치무라를 추모하는 글을 발표하고 있을 무렵 함석헌은 「이십세기의 출애굽」, 「산 신앙」(<성서조선> 18호), 「푸로테스탄트의 정신」(<성서조선> 20호) 등을 발표하면서도 우치무라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푸로테스탄트의 정신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무교회를 말하면서 우치무라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나중에 쓴 글을 근거로 이 영향 관계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김교신과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치무라를 만나기 전 함석헌에게는 오산이라는 한 세계가 있었다. 그것은 남강과 다석으로 대표되는 세계,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합된 세계였다. 도쿄 유학 당시 함석헌에게 있어 이 둘이 어떻게 하나로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실존적 물음으로 다가와 있었는데 우치무라의 가르침은 이에 대한 답이 되었던 것 같다. 우치무라의 이름을 감추면서 자신이 맞닥뜨린 실존적 물음에 답하고자 한 글이 바로 「선지자」였던 셈이다.
<성서조선>은 함석헌을 매개로 오산과 이어져 있었다. 동인들은 <성서조선> 초기 몇 년 동안 거의 매년 오산을 방문했으며, 심지어 만년의 남강이 서대문 밖 공덕리에 있던 <성서조선>사를 방문한 일도 있었다. 이후 일이지만 김교신은 유영모의 성서 강의에 한동안 참석하였으며, 이 둘은 김교신이 불의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단단한 신뢰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남강과 우치무라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서거했기에, <성서조선> 17호는 ‘남강 이승훈 선생 기념호’로 간행했는데, 이 호에는 함석헌의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류석동의 「내촌감삼 선생을 추억하며」가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