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 마음이 머무는 시
종-경주 남산 / 정일근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 감상
정일근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종소리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시가 많다. 어쩌면 내 취향에 맞는 시가 많아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감동을 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는 복효근, 도종환, 안도현, 정일근 시인의 시가 많다.
이번에 선택한 이 시는 단순한 종이 아니다. 산사의 범종 울림처럼 고요하면서도 맑고 깊다. 불교에서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불교의 사물이라고 한다. 그중 범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범종은 새벽 예불에는 28번을 울려 28天(하늘)으로 이루어진 하늘 세계에 두루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고, 저녁 예불에는 33번 타종하여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주관하는 제석천왕이 머무는 도리천의 선경궁을 비롯한 33궁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란다. 아마도 시인은 자주 찾는 경주 남산에서 범종 소리를 듣고 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 시를 길어 올린 듯하다.
멀리 퍼지는 종소리를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내는 소리라고 표현한 부분이 참 흥미롭다. 형체가 없는 소리가 몸을 얻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숨을 쉰다는 의미다. 소리가 모나지 않고 둥글다는 인식은 시적 화자가 갈등을 넘어 화해를 소망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소리의 울림이 끊어지지 않고 멀리, 더 멀리까지 가 닿을 수 있도록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생성의 소리가 소멸의 소리를 살려 더 멀리까지 상생하며 가 닿도록 하는 것이다. 종소리가 서로 밀어주고 밀어주어 목적지에 닿게 되고 그 소리가 굴러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까지 가 닿은 것이다. 시를 다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감동이 밀려와 머릿속에 깊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머물게 되는 시이다.
‘경주 남산’ 연작시에 실린 시들은 세월의 지층에 묻힌 순수 절대의 사랑을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서정의 힘과 놀라운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빼어난 시편들이다. 시와 산문 33집에 소개한 적이 있는 <길-경주 남산>과 이번에 소개한 <종-경주 남산>은 경주 남산 시집에 실린 연작시 중에서 선택한 것이다. 이 『경주 남산』시집에는 그야말로 서정시의 한 아름다운 풍광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들이 많다.
경주 남산에 불어오는 천년 세월의 바람에서 시인은 불교적 사색과 우주적 명상을 함께 곁들이며,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또 한편으로는 순금처럼 맑은 사랑을 담은 여러 편의 노래를 길어 올린다. 섬세한 감성과 조탁의 언어로 경주 남산의 천년 세월과 어우러져 시로써 담보할 수 있는 삶의 결정을 선연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소개>
정일근 / 1958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 경남대 사대 국어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 7편의 시를 발표하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오른손잡이의 슬픔』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소금 성자』 『저녁의 고래』 등이 있다. 한국시조작품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지훈문학상, 월하진해문학상,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 특별상, 김달진 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