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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직을 떠나고 난 지 2년 만에 그룹이 부도가 난 거네요.
“당시 삼미는 1조4000억원 정도 빚이 있었습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동생은 삼미특수강 절반을 포항제철에 팔았습니다.
7000억원 정도 받았죠. 빚을 갚아서 부채비율이 100% 정도에 불과했어요.
캐나다 법인도 포철에 넘긴 상태였고요.
남들 다 하던 분식도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덩치를 줄였던 게 오히려 실수였어요.
마침 한보철강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나와 이름이 같은 김영삼 대통령 아들이 한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거였죠.
그 바람에 한보가 부도나고 은행 임원 4~5명이 구속됐습니다.
그러자 은행들이 한꺼번에 대출을 죄고 들어왔습니다.
부도를 내도 충격이 덜한 회사를 찾다 보니 우리가 희생양이 된 거죠.”
-회장 시절 야구단을 창단한 건 의외였습니다.
“본래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우린 소비재가 없었지만 프로야구가 될 것도 같고 야구협회 사무총장이 안쓰럽기도 해서 발표 전날 전격적으로 결정했어요.”
-구단 성적은 좋지 않았죠.
“준비 없이 창단한 데다 인천·강원엔 선수도 부족했습니다.
첫해 18연패에 꼴찌라는 수모를 당했죠.
얼마 전 ‘슈퍼스타 감사용’이란 영화도 나왔더군요
. 그랬더니 오기가 나는 거예요.
이건희 삼성 회장을 찾아갔습니다.
‘회장님 선수 좀 주십시오’ 그랬죠.
그래서 데려온 게 정구왕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재일동포 선수 두 명을 데려올 옵션도 있었어요.
워낙 실력 격차가 나니 우리에게만 그런 권리를 준 거죠.
일본에 있는 장훈씨가 보내준 게 장명부 투수와 이영구 타자였습니다.
장 선수는 그해 30승을 올렸죠.
꼴찌였던 슈퍼스타즈가 이듬해 전반기 1위로 치고 올라간 거예요
. 한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딱 맞더군요.
당시 감독이 김진영씨였는데 다혈질이었어요.
동대문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맞붙었는데 심판 뒤쪽에서 보호막을 걷어차며 거칠게 판정에 항의를 한 거예요.
하필 그 장면을 전두환 대통령이 보고 “저거 뭐냐”고 한마디 하자 김 감독이 구속돼 버렸죠.
감독이 빠지니 바로 2등으로 밀립디다.
부랴부랴 후임으로 백인천씨를 스카우트해 왔어요
. 초반엔 잘했는데 백 감독조차 불미스러운 일로 물러나 결국 1등을 못해봤어요.”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아이티에 선교센터와 함께 병원·기술학교를 짓는 겁니다.
이번에 포르토프랭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당장 먹을 물과 식량도 급하지만 아이티는 길게 봐야 합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구호 말고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게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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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종로 삼일빌딩의 주인 세계 제패 꿈꾸던 철강왕
그룹 잃은 뒤엔 직장암으로 사경 헤맸던 그. 선교사로 아이티에 나타나다
그는 한때 서울 종로 삼일빌딩 주인이자 ‘슈퍼스타 감사용’이 소속됐던 야구단 구단주였다. 특수강으로 세계를 제패하리라 꿈꿨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좌절했다.
그러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옛 삼미그룹 2대 회장 김현철(59)이다.
선교사로 변신한 그를 지난 14일(현지시간) 지진 참상의 현장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다섯 차례 포르토프랭스를 다녀왔지만 이번 여행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2002년 두 차례 직장암 수술 후 대변 주머니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14~18일 그와 함께 포르토프랭스를 다녀온 뒤 19~20일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났다.
95년을 마지막으로 국내 언론과 접촉을 끊었던 그가 그동안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포르토프랭스에는 왜 가셨나요.
“지진 다음 날인 13일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포르토프랭스에 긴급 구호물자를 가져가는데 길 안내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튿날 만났죠.
그런데 현지 사정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에 세우려는 선교회 터도 볼 겸 같이 가기로 한 거죠.”
-신앙인이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2002년 우연히 대장 검사를 했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담담했죠.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더니 “지금 누구 얘기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한데 막상 수술하러 가면서 ‘암센터’라는 표시를 보니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수술은 잘 됐는데 일주일 뒤 수술 부위가 터져버렸어요.
응급실에 실려갔죠.
몽롱한 와중에서도 ‘이젠 끝이구나’ 싶더군요.
그때 신에게 매달렸습니다
.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했죠.”
-선교사로 첫 부임지가 도미니카인데.
“95년에 모든 걸 던지고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김 회장은 95년 12월 19일 둘째 현배씨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캐나다 법인 대표로 갔다).
처음엔 영주권 신청도 안 했어요.
캐나다 법인 대표였으니까요.
그런데 96년 동생이 캐나다 법인을 포항제철에 넘겼습니다.
캐나다 법인을 팔아버리니 내 신분이 공중에 떴어요.
부랴부랴 영주권 신청을 했습니다.
설상가상 97년 그룹이 부도가 났어요.
동생은 물론이고 나까지 기소당하고 출국정지자 리스트에 올랐죠.
이 때문에 캐나다 영주권 신청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여권 만료 기간은 다가오고 해서 급하게 알아봤더니 도미니카 이민이 비교적 쉽더군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하나님이 아이티로 가게 하려고 예정한 것 같아요.”
-삼미그룹 회장 때와 지금, 어느 쪽이 행복하신가요.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우리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꾼 잠깐뿐이었어요.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고 나니 반대예요.
모든 걸 내려놓자 늘 행복해졌어요.
비록 아버님이 이룬 삼미그룹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마저 이젠 내려놨어요.
회사는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만 빼면 말이에요.”
-95년 갑자기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세간에선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만 29세에 회장이 돼 오래 하기도 했고 동생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죠.
그런 차에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졌습니다
. 검찰에 불려 다니며 온갖 망신을 당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며 기업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떠난 겁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97년 그룹부도 뒤 연대보증이 풀리지 않아 부도 후 전 재산을 은행에 차압당했습니다.
아이가 셋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막연했죠.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더군요.
캐나다 법인에서 퇴직금 40여만 달러를 줬어요.
그 돈으로 뭐할까 궁리하다 우연히 주식 투자 안내서를 봤죠.
이거다 싶었습니다
. 그때부터 미국 주식을 사기 시작했는데 주가가 막 날아가는 거예요.
사기만 하면 몇 배씩 올랐죠.
그 덕에 살았습니다.
계속 투자를 했다면 다 날렸을 텐데 결정적 순간에 아내가 제동을 걸어줬습니다.
도미니카에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죠.”
삼미그룹의 모태는 1921년 창업자 김두식이 서울 을지로에 열었던 비누 원료 공장이었다.
6·25전쟁 후 그는 전후 복구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목재가공을 하는 대일기업을 설립했고 59년엔 인천 만석동에 국내 최대 제재공장을 세웠다.
60년대 합판 수출로 고속성장을 했다.
원목을 실어 나르기 위해 해운회사도 인수했다.
69년엔 3·1절을 기념해 삼일빌딩을 짓기도 했다.
삼일빌딩은 85년 여의도 63빌딩이 설 때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로 서울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70년 삼양특수강을 인수해 목재·해운·특수강을 바탕으로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그룹이 안정된 77년 창업자 김 회장이 골수암에 걸렸다.
3년 뒤 그가 타계하는 바람에 맏아들 현철씨가 만 29세로 회장에 올랐다.
그는 경기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고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마친 뒤 귀국했을 때 마침 특수강 증설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 7000만 달러에 달하는 일본 기계 대신 독일 기계를 3000만 달러에 들여와 단번에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현철씨는 젊은 혈기로 무리하게 그룹을 확장하다 83년 2차 오일쇼크를 만나 삼일빌딩과 삼미 슈퍼스타즈,
해운업을 매각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승승장구했으나 89년 인수한 북미그룹 특수강 회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95년 노태우 비자금과 97년 외환위기를 연달아 겪으며 그룹은 공중분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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