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8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흘러가도록
출17:1-7; 빌2:5-13; 마21:28-32
하늘은 점점 높고 깊어지고,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코스모스가 곳곳에 피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나뭇잎들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밤톨이 잘 여물어 때가 되면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져 밤을 내어주듯이, 가을은 대지의 생명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보내면서 절정을 준비합니다. 남은 추석연휴 기간 동안, 대자연의 흐름과 리듬을 따라 걸으며 단순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받은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경험이 깊어지길 기원합니다.
광야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정 중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아갔던 공간입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뱀과 전갈과 무법의 약탈자들의 침략, 내란의 위협으로 인한 원시적 공포가 감도는 이른바 혼돈의 원형과 같은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그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가 바로 광야였습니다.
사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살면서 노예의 삶에 길들여졌던 이스라엘인들은 인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장소인 광야 한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도록 그들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광야는 자유인이라는 참된 신원을 발견하기에 적절한 장소입니다. 일상적 삶이 차단된 만큼 내면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고, 영혼의 양식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자유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내향화의 길을 가야합니다. 집단무의식과 관념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때 묻지 않은 땅인 광야는 아직 접촉되지 않은 정신의 한 부분을 상징합니다. 광야에 머문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적 본성 안으로 들어가 가라앉아 그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신성을 체험하는 창조적 퇴행의 공간입니다. 모든 것이 황량하고 공허해서 끔찍한 공허감과 고독 속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이 고통의 시간은 실제로는 배양의 시간입니다.
자유를 찾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척박한 삶에 이내 불평합니다. 지난 주 설교 본문이었던 출애굽기 16장에서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어지는 17장에서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광야 전승에서 하나의 중심 주제는 바로 “불평”입니다.(영어로 murmuring motif라고 하는데, murmur는 중얼대고 궁시렁 거린다는 의미입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에서 벗어나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생활에 겁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는 이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축을 기르며 비옥한 땅에서 살던 그들이 광야의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것은 고역이었을 겁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땅에서 하늘을 향해 외친 불평과 부르짖음은 언제나 하나님 구원의 절대적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억누르는 문제들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르비딤에 머물렀지만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스런 배양의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바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구체적인 현실에 붙잡혀서 중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합리주의에 사로잡혀서 이성적이지만, 모든 상징을 배제한 채 상상력과 자유를 잃어버린 노예 상태입니다. 생명력과 생기 없이, 현실의 문제에 딱 달라붙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돌덩이와도 같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심혼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샘입니다. 심혼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상징들은 삶의 현실로 들어오려고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합리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을 찾아다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 어디서 상징이 삶의 현실로 들어오려 하는지를 찾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런 내면의 리듬을 따라갈 수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마, 즉 여성성은 내면의 리듬을 따라가도록 이끄는 인도자이며, 동시에 상징적 삶을 살아내도록 하는 정수입니다. 합리적 의식이 상징적 삶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여성성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난 뛰어들어 그것을 알아낼 것이다.’ 우리 안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엽니다. 아니마는 우리에게 심혼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꾸밈없는 솔직함을 선사합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여성성과, 창조성, 생명력이 결핍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가망이 없는 갈등과 궁지에 몰렸을 때 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는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성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상상력, 비합리적인 것을 통해 문제 속으로 들어가 접촉하는 것입니다. 즉, 심혼에서 퍼 올린 상징이 우리 삶의 현실로 들어오도록 내면의 리듬을 따르는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성과 합리주의적인 태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감정, 상징, 상상력과 같은 여성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을 가져옵니다. 이런 생각이 환상이라는 것은 그 미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용감하고 정직하면 자주 기적을 이룹니다. 의식적 태도의 교만함으로 경시되었던 인격의 열등한 부분들이 인간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집니다. 메마른 광야의 바위에서 샘이 터져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시해왔던 하위인격이 자기 안에 통합되는 기적과 같습니다.
메마른 광야와 단단한 바위는 우리 안에 억눌려 있고 생기를 잃은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생명의 샘이 말라 생명력을 잃고, 삶이 그 의미와 매력을 상실해 바위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 말입니다. 심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상징이 우리의 삶에 가닿아 삶이 고유한 토대를 잃지 않도록 우리는 빈틈없이 돌아가는 생각과 합리주의로부터 떨어져 작은 틈과 흐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바위 앞에 서 계시는데, 모세가 나일 강을 치던 그 지팡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민담과 꿈에서 지팡이는 권력과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지팡이는 무의식에서 방향을 지시하는 원리입니다. 지팡이는 직무를 수행하고, 길을 지시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혼돈의 요소를 정돈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방향성이 있고, 그 방향으로 나갈만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바위를 지팡이로 내리치는 이미지는 강렬합니다. 우리 안에 막혀서 나오지 못하던 생명수가 지팡이로 내리친 그 작은 틈을 뚫고 나와 메마른 땅과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에서는 우리가 씨름하는 문제가 시원하고 명쾌하게 바로 해결되기보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는 논쟁과 의심이 일어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세는 단 한 명이지만, 불평을 터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전히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자유를 향해 하나님의 목소리만을 듣고 따라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영적 여정을 하는 중에 끊임없이 걸림돌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우리 안에서 노예의 습성에 젖어 있는 백성들은 계속해서 다툼을 일으키고 시험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의 긴장감과 압력을 또한 견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리와 자신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분별하고 내면의 흐름을 따르는 내적 투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자신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옛날이야기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년을 보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불평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들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빠지는 함정 앞에서 늘 하던 패턴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더라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의식의 톱니바퀴가 또다시 맞물려 돌아갔음을 알아차릴 때 생기는 작은 틈 사이에 일어나는 리듬과 흐름을 보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가을이 무르익도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연으로부터 리듬을 배우십시오. 대자연은 대지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내보내면서 아름다운 가을 축제의 절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리듬을 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모든 집착과 고집을 바람에 흩날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철 음식과 과일을 먹으면서 우리 안에 맺은 결실과 희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둔 밤하늘을 아름답게 비추는 보름달을 보면서, 우리 안에 억눌려 있는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품어 안는 넉넉한 마음과 용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순수함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생기와 자유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 바위를 쪼개셔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이 물을 흡족하게 마시는”(시78:15) 기적은 평범한 일상이 리듬을 탈 때 일어납니다. 바윗돌 같은 우리의 단단하고 확고한 생각이 깨져야 그 안에서 물이 터져 나옵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고집과 집착에서 떨어져 작은 틈을 내는 연습을 하십시오. 매일 시간을 내어 자연 안에, 침묵과 고요 속에 머무십시오. 자유를 향한 우리의 영적 여정은 평범한 일상이 리듬을 타고 흐르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형상대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존재하길 갈망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을 따라 흘러가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