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의 관계★
앞에서는 초의와 완당에 대하여 언급하며 다산 정약용 부분이 미진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한 후 다산에 대하여 몇 자 적겠습니다.
다산의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입니다.
“살얼음이 낀 개울을 건너듯 조심스럽게”란 뜻이라니 얼마나 일생을 조심하며 살았는지
짐작이 가지요.
저도 이런 마음입니다.
제가 올린 내용도 그렇고 글쏨씨도 딱딱하여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올립니다.
추사는 경주 김씨이며 아래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순옹주를 부인으로 둔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정순왕후도 이 집안 출신이다.
[친부는 김노경, 큰집(김노영)에 양자로 입적 ]
화순옹주는 영조의 따님으로 남편인 김한신이 죽자 곡기를 끊고 따라 죽어
정조로부터 열녀로 정려되어,
추사고택(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그 정려문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
사대부 나 일반 가문의 정려문은 많이 보았으나 왕실 가족의 정려문은 처음이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애지중지 하여왔고, 옹주가 곡기를 끊자 수차례 밥을 들도록
간곡히 요청하였음 에도 자진하자 크게 노하였으며 그래도
묘지명을 지어 주었다.
[영조어필 김한신, 화순옹주 묘지명]
김정희는
추사(秋史)·완당(阮堂)·승련노인(勝蓮老人)·즉과(卽果)·과노(果老)· 노과(老果)·병과(病果)
·노완(老阮)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 실사구시(實事求是齋)등 많은 호를 사용하였고.
실사구시재에서 보듯이 실학파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 박제가에 사사(師事)를 받았고 사실주의 학문인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청나라 여러
고증학자(옹방강, 섭지선, 완원 등)와 교우를 깊이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가면 중국인 섭지선이 쓴 낙선재 현판이 걸려있다.
운현궁 현판 - 추사가 대원군에게 써준 노안당.
다산 茶山 정약용 丁若鏞 1762 영조 38 ∼ 1836 헌종 2년
다산의 집안은 남인계열 이면서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큰형 약현의 처남이 이벽이며 사위가 황사영.
매형이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이승훈,
셋째형 약종과 그의 아들 철상 등이 모두 천주교와 연루되어
신유사옥-1801년(순조 1)으로 처형되고.
다산 자신과 둘째형 약전도 강진과 흑산도로 귀양 가게 된다.
다산이 형 약전과 유배가다 헤여진곳은 나주 율정에이다. 형은 흑산도, 다산은 강진으로
떠나며 지은 이별의 시가 있다.
율정별(栗亭別) - 다산 정약용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이하생략)
이렇게 헤여진 정약전은 자산어보라는 귀중한 책을 남기고 귀양지
흑산도에서 숨을 거둔다.
18년간 유배 생활 중 11년을 머물며 제자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강진군 백련사에서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울창한 동백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20~30분 정도를 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동백이외에 황칠나무도 간간히 보이는 길.
동백이 만개할 때는 대단하단다.
백련사는 839년(신라 문성왕 1년) 무염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백련사 혜장선사가 이웃
다산초당에 유배된
다산으로 부터 경학을 배우는 한편, 차를 나누려 오가던 길이기도하다.
연지석가산, 약천, 정석등 다산의 체취가 남아있으나 오늘날 보며는 주위에 나무가 많아
그런지 좁고 습기가 많아보였다.
-추사가 쓴 다산초당과 보정산방 현판-즉과도인의 호를 쓴 것으로 보아 완당이 제주 해배후
과천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보정산방 - 정약용을 보배스럽게 모신다는 뜻.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
강진 유배중 부인 남양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폭을 보내왔다. 35년의 세월이 지나
다홍색의 짙은 색이 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 치마폭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해남 윤씨 집안으로 시집가는 외동딸을 위해
매화나무 에 멧새 두 마리를 그려 넣고 시 한 수를 써넣었다- (梅鳥圖)
다산이 백성을 사랑하여 쓴 대표적인 서적
경세유표(經世遺表)
유표 遺表-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
경세 經世'란 국가제도의 뼈대를 세워 운영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 |
목민심서(牧民心書)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暴政을 비판한 책 |
흠흠신서(欽欽新書)
조선 순조 때 정약용이 저술한 형법서(刑法書). |
다산은 정조의 한강도하를 위한 배다리 설치, 완벽한 화성축성 설계와 축성 능률을 올리기 위해
과학기기를 사용함으로 5.7㎞나되는 공사를 단 2년 6개월 만에 완료하였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馬峴)에는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한
여유당과 그의 묘소및 실학박물관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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