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분단에 희생된 비전향 장기수 한백렬
한백렬(문대46)은 48년 <쥬노와 공작>과 49년 <천치> 공연에 참여했던 고대극회의 전설적인 무대감독이었다.
그는 1920년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 에서
천도교계 독립운동가 한순회의 셋째(또는 넷째) 아들로 태어났 다.
그의 부친 한순회는 광주군 천도교구장으로서 1927년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조직된 좌우합작 항일민족운동단체 <신간회> 의 광주지회장으로 활동했고,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천도교 중앙교회 봉도(奉道, 간부) 로서 1936년 이래로 "무궁한 내 조화로 개 같은 왜적 놈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전지무궁(傳之無窮) 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서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라 는내용으로 일제의 패망을 기도하게 하는 특별기도운동에 주동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1938년(무인년) 적발되어 옥고를 치렀고(무인독립운동 또는 무인멸왜기도운동이라 불리는 이 공로로 1993년 대통령 표창 추서), 해방 후에는 천도교청우당(天 道教青友黨) 임시대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 부친을 둔 한백렬은 1940년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동일학원을 세워 고아로서 식모살이를 하는 처녀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사회사업을 하다가
해방 후 서른이 넘어 고려대 문과대에 입학해 고대극회 활동을 했다.
최창봉보다 4살 연상인 그는 당시 종로4가 형님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들은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좌익운동가들이었다.
인공치하의 서울에서 <아큐정전> 에 출연 당시에는 좌익이었다가 이후 우익으로 전향했던 윤채림을 형님 집 안방 천장에 숨겨주기도 했던 그는 1950년 10월에 형들을 만나러 평양으로 갔다가 거기서 출판물 관리 사업을 맡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1953년 2월 북한의 내각 간부학교에 입학, 1954년 8월에 남파되었다가 56년 10월에 체포되었다.
간첩죄로 체포된 그는 모진 고문을 받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다쳤으나 제때 치 료를 받지 못해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로 인해 그는 1960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5.16군사쿠데타 이후의 특별지시 때문에 61년 7월 재수감되고, 68년 대전에서 만기 출소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옥살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전향서 를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신 시대인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에 따라 77년 청주 보안 감호소에 수감되었다가 1989년 7월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고 나서야 비로소 재출소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도합 23년간을 감옥에서 지냈지만, 사회안전법 대신 제정된 보안관찰법에 따라 그해 11월 연지동 기독교 회관에서 열린 '피보안 감호자 석방 환영대회'에 참석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 입건되는 등 그의 창살 없는 감옥은 계속되었다.
1998년에 전향 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 6.15 공동선언이 이뤄진 이후, 당시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기거하던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엿하게 성장한 자식들을 두고 북으 로 떠나는 게 못내 미안하지만, 조국 통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어렵게 북송을 결심했다."는 말을 남기고 2000년 9월 2일 남북합의에 따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송환되었다.
평양으로 간 그는 2009년 5월 12일 89세 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90년대 초 출소해있던 한백렬을 잠시 만나 지난 회포를 풀었던 최창봉은 2008년 고대극예술동우회 공연 시 기고한 글에서 김기영, 윤태호, 최종문, 한백렬 등의 초창기 고대극회 회원들에 대해 비록 좌익 입장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인간성은 따뜻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사람들이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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