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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의인의 순종 ♣
오늘 제 1독서인 지혜서는 의인과 악인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진 알렉산드리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의인에게 반감을 가지며(2,12-16), 악을 버리기는커녕 의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2,14)고 투덜거립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을 돌보아주시는지 시험하려고, 의인에게 모욕과 고통을 줍니다. 위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려 그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합니다(2,16-19).
악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의와 선을 거스르고, 의인을 시기 질투하고 박해하는 악인은 늘 있어왔지요. 한편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7,1).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를 훤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축제 때에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성(神性)과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선언하심으로써(7,10. 28)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왔고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잘 아셨기에(7,29), 죽이려는 유다인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때(7,30)는 실패와 절망의 때가 아니라, 죽여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의 때입니다.
오늘 의인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주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세를 돌아봅니다. 혹시 우리도 제1독서의 악인들처럼 하느님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이 아닌 현세를 중요시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을 시기하고 열등감에 떨어지지는 않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모욕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하느님을 시험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의 시간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매순간이 하느님 안에서의 호흡이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하느님의 때’이기에,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한 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목적 추구에 집착하여, 구원의 때, 하느님 영광의 때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혜서의 악인들처럼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모르고,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은 채”(지혜 2,22) 악의 늪에 젖어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드러난 행동으로서의 악도 문제지만, 드러나지 않는 마음속의 악한 지향, 하느님을 부인하는 교만은 더욱 더 경계해야 합니다.
악인들처럼 옳지 못한 생각 때문에(2,1) 의인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과 자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보고 있던 유다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요한 7,28)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뵙지 못하는 소경이 되지는 말아야겠지요. 하느님의 뜻은 악인들의 음모가 아니라 의인의 순종을 통해 드러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한다는 것은 영혼의 처참한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선, 의와 온유, 아름다움과 생명을 주시는 창조의 손길과 무관한 삶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고 비참할 뿐입니다.
오늘도 옳은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에 동참하고,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겸손과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겸손하게 살아내는 깨어있는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박성태 신부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초막절이란 농사철이 끝나는 가을에 큰 기쁨으로 지키던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언약을 새롭게하는 절기로서 9월 말에서 10초 초순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2키로미터 이내에 거주하는 모든 성인 남자는
이 축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고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버젓이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즉, 최고 의회 의원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같은데
그들이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인데 메시아가 오실 때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최고 의회 의원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성전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며, 당신을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그 분께서 당신을 보내셨기 때문에 오신 것이라고 명백히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만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는 것 자체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갓 사람으로서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상황 아래 있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지
우리는 일상 안에 절실히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 즉,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고를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갇혀 살게 됩니다.
열린 사고를 하되 정확하고 사실과 진리에 근거를 두고 정보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통해서
잘 못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나아가서 그 정보를 가지고 진리에 봉사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를 숨기는데 이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갔지만
경비병들은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생애에 그와 같이 올바르고 정당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에
권력을 부정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결정지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잡으러간 경비병의 처지가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께서도 성부 앞에서 증언할 것이며
부정하면 당신도 심판 때에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희생을 각오한 증거가 요구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선택과 포기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결정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결정이기를 기도합니다.
부산교구 박성태 신부
민경덕 신부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찬미예수님,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친구가 제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우리 담임 선생님이 무척이나 화가 나있으니, 오늘은 왠지 조심해야겠어”
라고 말입니다.
그런 대화를 마치고 나서, 저와 그 친구는 수업에 들어갔고, 점심때를 맞이했습니다.
너무나도 볕이 좋은 날이였기에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잠자리를 잡으로 학교 운동장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서였는지, 그만 잠자리에 빠져서 점심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잠자리를 잡으려고 점점 학교에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문득, “아 오늘 우리 담임선생님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친구와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 무척이나 갈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두려움이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제 옆에 있던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부드럽고 낮은 음성으로, 그리고 정말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한 눈빛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경덕아, 나 집에 갈래”라고...
저는 황당했습니다. 물론 교실에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그냥 집에 간다는 것은 더욱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섬세한 목소리와 미세한 떨림으로
“그래도 교실에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간 다음 그 친구는 집으로 향했고,
저는 그 친구의 가방을 챙겨주기로 약속을 하고,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느님께서는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 선생님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잠시 병원에 다녀오신다고,
우리에게 자율학습을 하라고 하셨고, 저는 아무런 일 없듯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처럼 교실에 편히 앉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 한 켠에서는 집으로 들어간 친구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순간의 결단이 많은 것들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유다로 들어가십니다.
진정 하느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미카엘 성당 신자 여러분,
우리는 가끔 꼭 참석해야 할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자들의 6가지 의무중 하나인 주일미사와 대축일 미사.
정말 우리는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의무를 저버렸을 때,
고해성사 보기도 민망하고, 고해를 보지 않으면, 성당에 나가면 성체도 못 모시고,
그렇게 한 번 두 번 빠지다 보면 결국 자기자신도 모르게 냉담자,
혹은 쉬는 양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정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린 마음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자비로운 모습으로
이렇게 말씀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이야, 이젠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갖지않길 바란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고, 너의 버팀목이 되어주리라”하고 말입니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길 원하십니다.
그 길이 험하고, 힘드시더라도 우리가 함께 있다면 당신의 십자가가
조금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도다”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신부